23화. 수색 (7)
“걱정되지 않으세요?”
강엽은 문득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미인도에서 나온 것처럼 고아한 미인이 장시간 갇혀 쇠약해진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간밤에 치료한 아이의 맥을 확인해본 당묘정이 흑백이 뚜렷한 눈으로 강엽을 돌아보고 있었다.
기둥에 몸을 기댔던 강엽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무슨 뜯에서 묻는 거요?”
“친구분이요. 교위보다 강한 사람이 온다면 필시 교령급일 텐데....”
물론 당우경이 갔으니 별다른 일은 없을지 모르지만, 하후진은 일대일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하후진이 은천패의 고수라고 하나 교령을 상대로 무조건 승리를 장담할 순 없지 않은가?
“자아가 참 쓸데없이 비대한 친구지.”
“네?”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오. 위기에 처했다고 도와주면 오히려 역정을 내겠지.”
적아가 뒤섞인 난전이라면 모를까, 일대일 생사결이라면 자존심이 걸린 승부였다.
강엽은 그런 자존심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후진의 의지를 존중했다. 물론 하후진이 정말 위기에 처한다면 나서겠지만, 지금은 그 대신 당우경이 가 있었다.
“당 원주님께 몰래 부탁드렸소. 그 친구가 위험에 처하면 도와달라고.”
“아....”
하긴 당우경이 나선다면 하후진이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뒷일은 조금 골치 아파지겠지만.
“뭐, 그 녀석이라면 이길 거라 생각하오.”
상대가 교령급이라면 하후진이 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물론 교령급 안에서도 격차가 나뉘니 당묘정의 말마따나 고전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하후진의 재능과 감각이라면, 위기에 몰려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낼 거라 내다봤다.
진조의 영성을 물려받은 자신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난 녀석이었으니까.
만일 교령이 하후진을 위협할 만큼 강하다면....
‘오히려 더 발전할 수 있겠지.’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백서희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햇볕에 약한 강엽을 대신해서 바깥을 경계하고 있었다.
“시작된 것 같아!”
강엽은 바로 알아듣고 기감을 확장했다.
산 아래에서 강렬한 기파를 뿌리는 두 고수가 맞부딪치는 감각이 피부로 전해졌다.
‘지지 마라.’
* * *
쿠우우웅!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세상에.”
“이만한 열양지기라니....”
암야대의 무인들이 넋이 나가서 중얼거렸다.
사천삼패의 일원으로서 무수한 고수들을 봤지만, 이 정도로 뜨거운 열양지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삼화취정의 고수로서 암야대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은 당우경 역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미파의 혜정 사태에게 하후진이 염왕도문의 전승자라는 사실을 들었으나, 정작 염왕도문의 무공을 보지 못했기에 와닿지 않았는데....
‘명불허전이구나. 저게 흑룡교주를 죽인 무맥인가.’
마치 불꽃의 맹수가 날뛰는 듯한 무위.
동료를 잃은 상실감에 분노했던 암야대의 무인들조차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뭣도 모르고 덤빈 혈교도들이 무처럼 썰렸는데, 잘린 단면에서 피나 내장이 흐르기는커녕 시커멓게 타들어가기만 했다.
처음엔 순교를 부르짖었던 혈교도들도 참혹한 죽음에 당혹감을 느꼈는지 주춤거렸다.
투아아아앙!
고막을 때리는 한 줄기 굉음.
오직 교령만이 침착하게 공방을 교환하고 있었다.
‘완전히 정반대로군.’
대도를 쉴 새 없이 놀리며 움직임을 가져가는 하후진.
그에 비해 교령은 정중동의 이치로 신법을 세밀히 조절하며 열기와 경파를 흘리고 있었다.
당우경은 교령이 발바닥의 용천혈뿐만 아니라 전신의 근육과 혈도를 이용한다는 것을 알아봤다.
일견 힘들이지 않고 피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
게다가 쏟아지는 열기로부터 옷과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호신기를 더욱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공력 소모가 크겠지만... 염왕도문의 전승자도 그리 여유롭지는 않다는 게 문제다.’
삼화취정에 올랐어도 타인의 내공 수위를 알아볼 수는 없기에 하후진의 축기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하나 두 사람의 축기량이 비슷하다면 하후진이 먼저 지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설마 그것도 생각 못하고 싸우는 건... 음?’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자세히 관찰한 당우경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사방에 타기 좋은 것들이 널려 있는데도 산불이 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진즉 사방으로 불길이 퍼져나가 온 산천을 태워야 하는데도.
멀지 않은 곳에 물길이 있어 그렇다고 보기엔 하후진이 퍼붓는 열양지기가 너무 과격했다.
당우경의 눈에 경탄이 스쳐지나갔다.
“허어, 이런 기사가 있나!”
“...예?”
암야대의 무인이 저도 모르게 황당한 표정을 짓다 결례를 깨닫고 사죄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아닐세.”
당우경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서 불꽃을 두른 하후진을 가리켰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를 아나?”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암야대의 무인들은 상황을 잊고 당우경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무릇 고수의 가르침은 금과옥조처럼 매우 귀중했다.
“단순히 내공이 많거나, 초식에 대한 문제가 아닐세.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가르침을 주십시오.”
“감각의 격이 다르네.”
“기감 말씀입니까?”
내가기공을 익힌 고수라면 모두 기감을 지녔다.
정확히 말하면 기감을 지녀야만 천지자연의 기를 인식하고, 호흡법을 통해 단전에 토납할 수 있다.
그러나 당우경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
“비슷하지만 좀 다르네. 고수는 천지의 기를 인식하는 것만 아니라 그 너머로 감각을 확장하거든.”
벽을 넘느니, 깨달음을 얻느니 하는 표현들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감각의 확장이었다.
감각이 고차원적인 경지에 닿는다.
그로써 몰랐던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자네들도 알 테지. 기감에 극도로 집중하여 진기의 본질을 고찰해야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다루는 진기의 본질을 깨닫고 의념을 불어넣어 수족으로 부릴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턴 검기니 권기니 하는 외기 발출(外氣 拔出)의 경지로 나아간다.
이른바 절정고수가 되는 것이다.
“저 청년은, 외기를 발출하는 것을 넘어 그 외기마저 통제하는 경지에 이르렀네.”
“예에?”
당우경의 말에 깜짝 놀란 암야대의 무인들이 하후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 사방을 불사를 듯 거칠게 날뛰는 창염이 다시 대도로 빨려들어왔던 것이다.
“흡자결입니까?”
“그냥 흡자결이라면 빨아들이는 순간에 불꽃이 꺼졌겠지.”
게다가 하후진의 창염은 흡자결로는 거둘 수 없을 만큼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흡자결의 내공 운용법도 쓰이지만... 불꽃이 미치는 범위를 의념으로 장악했기에 바깥으로 뿌린 불꽃마저 회수하는 게야.”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청천벽력 같았다.
“자신의 주변을 경맥처럼 인식하는 걸세. 땅바닥을 혈도 삼아 진기를 회수하고 있어.”
“...!”
실제로 자세히 보면 창염이 대도에 모이는 경로가 비슷했다. 그렇기에 창염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지 않고 일정 권역만 태우고 있는 것이다.
“아까 한 말을 이해하겠나? 더 빠르고,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닐세.”
하수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기에 고수라 불리는 것이다.
당우경의 눈빛이 심유해졌다.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원리가 그와 같지. 저걸 해낼 수 있어야만 만천화우에 입문할 수 있다.’
사천당문의 절대비기 만천화우.
현 당문에서는 오직 가주만이 완성한 비기였다. 한데 삼화취정에 오르지도 못한 하후진이 만천화우와 비슷한 짓을 흉내낸 것이다.
물론 만천화우에 비하면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하후진의 무재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대목.
‘염왕도문이 대단한 것인가, 아니면 염왕도문을 계승한 저 청년이 대단한 것인가.’
둘 다겠지. 염왕이 저 청년의 재능을 알아보고 거두어서 정성껏 가르쳤을 테니까.
당문의 어른으로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당우경은 하후진에게 맡기길 잘했다고 느꼈다.
오히려 당묘정을 데려오지 않는 것을 후회했다. 어쩌면 완성된 만천화우를 보는 것보다 훨씬 얻는 게 많을지도 모르는데.
“죽어, 이 기생오래비 새꺄!”
쿠아아아아앙!
지축이 울리는 폭음.
대도에 모인 창염을 한 점에 폭사시키자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장대한 불꽃이 솟구쳤다.
암야대의 무인 중 한 명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해치웠나?”
백서희가 들었다면 강호 격언 운운하며 한탄했을 소리였다.
* * *
“후우....”
하후진은 숨을 고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역시 대규환도(大叫喚刀)는 빡세구만.’
염왕팔도의 오초식 대규환도.
다수의 적들을 한꺼번에 격살하기 위해 고안된 초식이었다. 바깥으로 퍼뜨린 창염을 거두어들였다가 한꺼번에 폭출시켜 넓은 범위를 초토화시키는 도격.
제대로 쓰려면 중단전의 개방이 필수였기에 실전에서 써먹는 건 처음이었다.
근육과 혈도에 심하게 부하가 걸리면서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래도 놈들을 전부 죽였으니까.’
기생오래비처럼 얍삽하게 생긴 놈뿐만 아니라 혈귀들까지 범위에 둔 필살초였다.
교위나 평교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령 역시 호신기를 둘렀어도 무사치 못할....
“...뭐야?”
시커먼 연기 사이로 언뜻 비추는 윤곽.
하후진이 섬뜩한 느낌을 받고 도면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연기를 뚫고 쇄도했다.
카앙-!
“흐읍!”
생각보다 묵직한 반탄력에 하후진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을 때 그를 덮친 교령이 으르렁거렸다.
값비싼 비단 유삼이 불타버린 것은 물론 피부에도 흉물스러운 화상이 남았다. 호신기로 상쇄했음에도 완벽히 막는 데는 실패한 것.
“그런 무식한 짓거리를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덕분에 아껴뒀던 수를 쓸 수밖에 없구나.”
부상을 입은 교령의 얼굴은 붉다 못해 갈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안구마저 충혈되어서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았다.
“어금니에 혈라분을 심어두지 않았다면 골로 갈 뻔했어.”
정신없이 싸우는 동안엔 주머니를 털 시간이 없다. 그랬다간 일전에 교위가 그랬듯이 팔이 잘리거나 목숨을 잃을 게 뻔했다.
때문에 상층부는 혈라분을 굳힌 단환을 치아 사이에 박아두었다.
생니를 뽑는 것은 죽도록 아팠지만 정말로 죽는 것보다는 낫다. 교령은 상층부의 혜안에 감탄하면서도 자신을 궁지에 몰아붙인 하후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경의를 표하마. 네놈은 나 냉혼서생(冷魂書生) 서무기의 상대가 될 자격을 가졌다.”
일전에 강엽의 손에 죽은 독야마랑처럼 냉혼서생 역시 혈교에 포섭된 외부의 인사였다.
그리고 혈교의 마공을 익히면서 중단전을 개방, 그로써 교령의 지위에 올라섰다.
“그 대가로 네놈 모가지를 가져가겠다!”
“이런 썅...!”
혈라분을 복용한 교령의 공력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강해진 상태. 반대로 하후진은 절초를 쓴 부작용으로 잠시 무력해졌다.
“안 되겠군.”
보다못한 당우경이 나서려고 했다. 하후진에게 원망을 듣더라도 일단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귓전으로 전음이 날아왔다.
[나서지 말라니까!]
하후진이 그의 기파가 움트는 것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쓰러트릴 수 있으니 지켜만 보쇼!]
[방법이 있소이까?]
[암, 있고 말고!]
멀리서 봐도 하후진은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비약을 먹은 냉혼서생과 맞서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우경은 하후진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후진의 목소리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다른 놈들도 있잖수!]
대규환도는 냉혼서생을 중심으로 일대를 휩쓸어버렸지만 혈교도들을 전멸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냉혼서생이 대부분의 위력을 박아낸 덕분에 서너 명이 살아 있었다. 그들 역시 혈라분을 복용하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원주님, 혈귀들이 옵니다!”
“웬만하면 생포... 아니, 모두 죽이게.”
당우경은 의원이지만 무학자이기도 했다. 처음 보는 비약의 효능에 호기심이 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의 안전을 우선해야 할 때다.’
죽이고 시체를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우경의 지시에 암야대가 병장기를 휘둘렀다.
당우경 역시 검게 물든 독장(毒掌)을 뻗었다.
그들이 싸우는 동안 하후진과 냉혼서생도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좀 죽어라, 이 끈질긴 놈아!”
“내가 할 말이다, 사이비 새꺄!”
냉혼서생이 미칠 듯이 주먹을 뻗고 발길질을 날려도 하후진은 꿋꿋하게 버텼다.
쓰러질 듯 말 듯 휘청거리는데, 상처를 입으면서도 결정타는 허용하지 않았다.
‘강엽 그놈만은 훨씬 못해.’
주먹에 실린 묵직함도, 몸을 움직이는 속도도 강엽에 못 미친다.
권각술을 쓰는 고수들 중에서 하후진이 본 가장 강한 고수는 강엽이었다. 최근엔 자성검법인지 뭔지 익혀서 검도 쓰지만, 하여튼 냉혼서생이 백날 팔다리를 놀려봤자 강엽만큼 위협적이진 않았다.
뭣보다 그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비책이 남아 있었다. 강엽과 대련할 때도 쓰지 않은 구명절초.
“대규환도를 미리 써놔서 다행이구만.”
“뭐라고 지껄인 거냐?”
너무 작아서 듣지 못했다.
갈색으로 물든 냉혼서생이 시뻘게진 눈을 찌푸리자 하후진이 입가를 이죽거렸다.
“넌 이미 죽어있다, 혈귀놈아.”
“멱을 잡아뜯어야 헛소리를 나불거리지 않을 놈이로다.”
그렇게 판단한 냉혼서생이 무섭게 타오르는 진기를 수양명대장경에 보내려고 할 때였다.
불현듯 몸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열기가 솟구쳐서 진기와 충돌했다.
“커억!?”
“그 약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고민했지. 교령급이 그 약을 처먹으면 어떻게 상대할까 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가 끝내겠다고 고집을 부린 게 아니었다. 하후진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열뢰(熱雷).
염왕팔도엔 들지 않으나, 염왕도문의 무공 중 하나였다. 상대의 몸에 닿은 열양지기를 응용하는 기예.
시커먼 피를 울컥 토한 냉혼서생은 경맥 곳곳을 침투한 열양지기의 정체를 알았다.
앞서 대규환도로 인해 피부 위에 남은 열양지기.
하후진은 그 열양지기를 이용하여 내가중수법 같은 묘리를 발휘한 것이다.
“말했잖냐. 넌 이미 죽어있다고. 그러니까...!”
“아, 안 돼!”
“뒈져라, 이 새끼야!”
콰콰콰콰콰쾅!
주요 경혈에 침투한 열뢰가 일제히 폭발한다.
갈색빛이 도는 냉혼서생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지만, 적의 손속은 가차없이 그의 목숨을 거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