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재회 (2)
네 마리의 준마가 이끄는 사두마차가 장원 바깥에 멈춰섰다.
“여기가 숙정방인가요?”
“그렇습니다, 공녀님.”
마차를 호종하는 무인들 중 하나가 공손히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시비였다. 단순한 시비가 아니라 지근거리에서 호위까지 도맡은 여고수.
그녀가 나오고 나서야 군청색 비단에 은색 수실로 무늬를 새긴 당혜의 주인이 마차를 나왔다.
삼단같은 긴 머리에 부딪친 햇살이 반짝인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궁장 미녀의 등장에 저잣거리에 몰린 군웅이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화창한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따가운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일산(日傘).”
“여기 있습니다, 공녀님.”
“고마워요.”
햇살을 가리는 그늘막 아래로 쏙 들어간 조영옥이 고개를 돌려 숙정방이라 적힌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그 아래엔 단목정을 비롯한 숙정방의 간부들이 줄지어 마중을 나온 상황.
조영옥의 배다른 동생이자 호위대를 이끄는 조영빈이 말에서 내려 다가갔다.
“태화문의 조영옥 공녀를 수행하는 조영빈이오.”
“숙정방을 책임진 단목정입니다. 태화문 공녀님의 왕림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강 무사는 어디 있소?”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화문의 이공녀가 왔는데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마디 내뱉으려는데 등 뒤에서 귀찮음이 물씬 느껴지는 전음이 날아왔다.
[동생아, 꼬투리 잡지 말고 그냥 들어가자.]
조영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이 이딴 말을 했으면 용서하지 않았을 텐데 말한 당사자가 하필이면 조영옥이었다.
사실 방주가 직접 마중을 나왔으니 따지고 들 명분도 없긴 했다.
명색이 방주가 있는데 비선실세는 왜 안 나왔냐고 대놓고 따질 수는 없지 않은가.
똥 씹은 표정으로 화를 꾹꾹 눌러참는 조영빈을 뒤로하고 조영옥이 싱긋 웃었다.
“단목정 방주라고 했나요? 태화문의 조영옥입니다. 성대한 환대에 감사드려요.”
“아, 예.”
사실 성대한 환영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방주와 간부들이 바깥에 나와 있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단목정은 그런 자잘한 건 생각하지 못했다.
일개 흑도 방파의 서출인 그녀와는 달리 태생부터 고귀한 여인.
풍문으로만 듣던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현실감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주군은 이런 사람들과....’
새삼 노는 물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두 미녀가 나란히 선 채 문지방을 넘자 양측의 무인들이 두 사람을 호종한다.
그러나 숙정방도들은 위축된 반면 태화문은 거칠 게 없는 기세로 장원을 가로질렀다.
주객이 전도된 분위기에 단목정의 안색이 흐려졌지만, 이게 숙정방의 현실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태화문은 숙정방이 아니라 강엽을 보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으니까.
* * *
강엽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이면 낮에 찾아와가지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은 애저녁에 지났는데, 체감상으로는 낮이 훨씬 긴 것 같다.
심지어 날씨도 좋아서 시선을 창밖에 둘 때마다 연못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이 보였다.
“.......”
직접 태양을 본 게 아닌데도 바늘로 콕콕 쑤시는 듯한 고통.
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아니, 벗어날 수는 있을까?’
경지가 오르고 혈공진기가 강해질수록 고통의 강도는 줄어들고 있지만, 태양볕 아래에선 여전히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
흑무암쇄진을 얻은 만큼 싸움이 나도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다며 위안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방책을 찾아서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건지.
그렇게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삼킬 때였다.
“저 여자가 조영옥이야?”
월동문을 지나서 걸어오는 조영옥을 발견한 백서희가 눈을 얇게 떴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쳇, 사천삼미라더니 꽤 예쁘네.”
백서희는 혀를 찼지만 그녀도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누가 더 아름다운지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서로 다른 매력을 가졌다고 해야 할 정도로.
이윽고 양측의 무리가 가까워졌을 때 강엽이 일어나서 포권을 쥐었다.
“어서 오시오, 이공녀.”
잠시 백서희를 보고 이채를 띤 조영옥이 우아한 미소로 화답했다.
“오랜만이에요, 강 무사. 그동안 잘 지냈나요?”
“염려해준 덕분에. 밖에서 마중하지 못한 점은 미안하오.”
“...안색이 안 좋군요.”
아닌 게 아니라 강엽의 얼굴은 송골송골 식은땀이 절어있는 데다 몰골도 초췌한 게 병색이 완연했다.
사실은 창문을 뚫고 들이치는 태양볕 때문이지만 조영옥이 그 사실을 알 리는 만무.
“혹시 혼섬잔도와 싸울 때 내상을...?”
“크흠!”
강엽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햇볕 때문에 몸 상태가 나락에 빠졌다고 고백할 수는 없지 않은가?
“...쉬운 상대는 아니었지.”
마중하지 않은 것을 내상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다행이었다.
강엽이 연기를 한다는 것을 아는 백서희는 어이가 없었지만, 태양이 강엽에겐 쥐약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심 혀만 찼다.
‘십초 만에 이겼으면서 대놓고 사기를 치네.’
그래도 덕분에 강엽이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던 조영빈도 이번엔 감히 불만을 표시하지 못했다.
단목정이 걱정스럽게 불렀다.
“주군....”
“난 괜찮으니 차를 내오도록.”
방주인 그녀도 걱정하는 낯빛을 지우지 못했기에 누구도 강엽이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지 못했다.
이윽고 양측의 무리가 수장들의 뒤에 시립한 가운데 강엽과 조영옥이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강엽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조영옥은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혼섬잔도는 어디 있죠?”
“거동이 불편해서 방에 가둬놨소.”
조영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엽도 내상(?)을 입었는데 혼섬잔도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렇군요. 혼섬잔도와 그 부하들의 신병을 인도받을 수 있을까요?”
“그전에 약속부터 받고 싶은데.”
태화문이 숙정방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혀야 신병을 내주겠다는 뜻이었다.
태화문의 무인들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지만 조영옥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혼섬잔도의 일은 본문의 공식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그 혼자만의 일탈이에요.”
“태화문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넘어가는 게 서로 편하지 않을까요?”
“흐음....”
하긴 더 들춰봤자 불편하기만 하리라.
강엽이 단목정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단목정이 다시 고섭풍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잠시 후 숙정방도들이 혼섬잔도를 태운 운거(雲車)를 대청까지 몰고 왔다.
혼섬잔도는 조영옥을 보고 올 게 왔음을 직감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지에 붕대를 감은 꼬락서니를 훑은 조영옥이 입꼬리를 올렸다.
“꼴이 말이 아니군요.”
“....”
혼섬잔도가 붉으락푸르락 변한 채 입을 다물자 조영옥의 뒤편에 시립한 부하들이 발끈했다.
“도각주(屠閣主), 공녀께서 하문하시지 않소?!”
그것은 혼섬잔도의 공식 직위였다. 본인이 이끄는 조직을 통째로 데리고 대공자에게 충성한 것이다.
차마 모욕을 넘기지 못한 혼섬잔도가 눈을 부릅뜨며 일갈했다.
“예전엔 감히 노부의 눈도 못 마주친 잡것들이... 이공녀의 앞이라고 함부로 떠드는구나!”
내상을 입었기 때문에 내공이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기백만은 강건했기에 내심 그를 두려워했던 무인들은 흠칫 굳어졌다.
“이공녀, 이 늙은이를 패배자라고 불러도 좋소! 하지만 같은 문도라는 자각이 있다면 더 이상 모욕을 주지 마시오!”
“패배자라고 불러도 된다면서 모욕하지 말라는 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각주께서 하시던 일을 떠올리면... 글쎄요. 존중해드리기는 어려운데요.”
천금상단에 피해를 입혀 그녀의 자금줄에 타격을 주려고 했으니 봐줄 요소가 전혀 없었다.
“문주님의 허락도 없이 노주에서 무엇을 했는지 실토해야 할 겁니다. 각주는 물론 각주의 부하들도요.”
“청우방주도 데리고 가시오.”
추임새를 하듯 덧붙인 한마디에 좌중의 시선이 강엽에게 모였다.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야 더 정확히 심문할 수 있지 않겠소?”
“지당한 말씀이에요.”
조영옥의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물론 반대로 혼섬잔도의 면상은 썩어문드러졌다.
* * *
혼섬잔도와 그의 부하들, 청우방의 칼잡이들까지 인계하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양측이 대립하는 일 없이 합의를 봤기 때문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단목정이 부른 악공들과 무희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술과 산해진미가 혀를 즐겁게 했다.
어느 정도 연회가 마무리됐을 무렵 강엽과 조영옥은 산책을 구실로 어둑해진 경내를 거닐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인들이 따라왔지만 끼어들진 않았기에 조용히 얘기할 수 있었다.
“낮엔 그렇게 덥더니 밤엔 선선하네요.”
“밤에도 더웠다면 끔찍했을 거요.”
해가 저문 만큼 강엽도 신색을 되찾았다. 옆모습을 힐끔거린 조영옥이 물었다.
“몸은 좀 어떤가요?”
“견딜 만하오.”
“혼섬잔도의 패도는 묵직하죠. 내가중수법의 묘리를 담은 암경은 경맥에 손상을 입히고요. 잘못 치료하면 내상이 덧날 수도 있으니 몸조리 잘하셔야 해요.”
사실 내상을 입었어도 재생력 덕분에 금방 치유됐을 것이다. 온 강호 무림을 뒤져봐도 강엽만큼 내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사실 강 무사를 처음 봤을 땐 이 정도로 강해질 줄은 몰랐어요.”
조천방과 거룡방의 싸움이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강엽을 높이 평가하긴 했어도 일 년도 안 돼서 혼섬잔도를 꺾는 고수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 전엔 귀주성의 사태까지 해결하셨다면서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소?”
“단목 방주에게 들었죠. 백 소저라는 분과 얘기하고 계실 때 잠깐 끼어들었거든요.”
“아, 그때 말이군.”
혼섬잔도와 그 부하들을 잘 감시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측간을 구실로 잠시 빠져나온 적이 있었다.
“단목 방주가 그러더군요. 강 무사가 혈교의 단혼마백을 죽였다고요.”
딱히 비밀거리는 아니었다. 강엽이 단혼마백을 격살한 것은 무림맹과 귀주성의 무림인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그들이 입을 열면 사천에도 소문이 닿을 테니 비밀로 하는 의미가 없었다.
“단혼마백은 혼섬잔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초고수. 본문의 풍도마장 어르신과 비견되는 강자인데... 그런 사람을 꺾었다는 말을 들으니 제가 강 무사를 과소평가했나 싶더라고요.”
“운이 좋았소. 나 혼자서 싸운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쓰러트린 거요.”
전강이 없었다면 죽은 것은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삼화취정의 초고수는 태산 같은 존재였다.
조영옥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요? 소위 삼화취정이나 초절정에 오른 고수들은 대방파의 결전병기예요. 합공을 했어도 그런 자를 꺾은 건 대단한 업적이죠.”
달리 말하면 혈교엔 그런 자들이 득실거린다는 뜻이었다. 교성이 단혼마백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물며 팔대교왕이라는, 구파 장문인과 팔가주에 필적하는 절세고수들도 있지 않던가.
‘강호 전체와 싸울 만하군.’
심지어 그런 마교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있으니 새삼 강호가 넓다는 게 느껴졌다.
그때 조영옥이 화제를 돌렸다.
“청우방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접수해야겠지.”
강엽이 차지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냉큼 집어삼킬 것이다. 숙정방, 청우방과 함께 노주삼흑(瀘州三黑)이라고 일컬어지는 양견회가 욕심을 낼 터.
설령 양견회가 얼씬거리지 않는다고 해도 붕 떠버린 청우방을 방치할 이유가 없었다.
“원래는 내실을 다진 뒤에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는데 반대가 되었군.”
“뭐,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리고 청우방은 이용 가치가 있어요.”
“어떻게 말이오?”
“강 무사는 숙정방의 주인이지만 방주는 아니에요. 청우방을 합병할 필요가 없어요. 그럼 숙정방과 청우방을 경쟁 구도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군.”
경쟁 심리를 이용해서 두 방파의 실력을 키우라는 뜻이었다. 강엽이 생각해도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대공자 측은 제가 막을게요. 대신 강 무사는 노주에 맹월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세요.”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건데, 맹월림이 꼭 노주로만 들어오리란 법은 없지 않소?”
노주가 안 된다면 다른 지역을 통해서 들어올 수도 있었다.
가령 노주 옆의 의빈도 운남에서 사천으로 들어오는 관문 중 하나였으니까.
“금사강을 통하면 운남에서 의빈까지 바로일 텐데.”
“의빈엔 상관세가(上官世家)가 있으니까요. 대방파에 비할 건 아니지만 그들의 저력도 만만치 않아요. 게다가 그들은 청성과 아미의 우방이고, 무림맹의 맹방이니 맹월림도 쉽게 도모하진 못하겠죠.”
그렇다고 더 남쪽으로 오자니 험준한 대량산맥과 금병산맥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운남은 사천과 붙어 있지만, 바로 사천으로 넘어오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맹월림도 점창파와 대립하고 있으니 당장 큰 전력을 투사하진 못할 테고... 당분간은 관문을 막는 걸로 충분해요.”
“영원히 막진 못한다는 뜻이군.”
“그들은 일성의 패자예요.”
운남 무림이 사천 무림에 비해 작다지만 맹월림쯤 되면 구파나 팔가에 맞먹는다고 봐야 했다.
“맹월림의 주인은 야망이 크니 운남의 패권을 쥐는 걸로 만족하지 않을 거고요.”
“나도 얼핏 듣긴 했는데 그 정도요?”
“천금상단의 비선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도 있어요. 맹월림에 피처럼 시뻘건 옷을 걸친 무리가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
강엽이 우뚝 서자 조영옥도 걸음을 멈추었다. 별처럼 영롱한 눈동자엔 염려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조심하세요. 놈들이 단혼마백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면 강 무사를 주시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