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재회 (1)
단목정은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이걸 해내야 인정받을 수 있다!’
강엽이 그냥 시켰다면 답이 없었겠지만 지시방향을 세세히 가르쳐준 만큼 해볼 만했다.
즉시 방도들을 시켜 태화문과 청우방을 구분하고, 노주 최고의 의원을 모셔왔다. 태화문의 사람들에게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빈객당을 배정했다.
숙정방도들이 엄중하게 감시하는 데다 홍예칠위 중 세 명까지 배치되어 있었기에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하인들이 시중까지 드는 만큼 불편함은 없었다.
“그래도 이걸로는 전부 막지 못하겠죠?”
“예, 아마 하인들을 매수하려고 할 겁니다.”
고섭풍이 의견을 보탰다.
하인들을 이용해 밀담을 주고받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인들에게 지시하세요. 요구를 들어주되 쪽지나 전언은 전부 보고하라고요.”
“두루뭉술하게 쓰면 어떡합니까?”
비밀이 탄로나는 것을 우려해서 저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말을 쓰지 않겠는가.
단목정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암어 말이군요. 흐음....”
유려한 턱선 아래로 손등을 괸다. 고섭풍은 방주를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그녀가 입술을 뗐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죠. 일단 모으세요.”
되든 안 되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고섭풍이 쓴웃음을 짓고는 포권을 올렸다.
“알겠습니다, 방주님.”
“잠깐만요, 고 당주.”
“...따로 하명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물어볼 게 있어요.”
나가려다 말고 의아해하는 고섭풍을 향해 단목정이 조금 망설이면서 물었다.
“앞으로 본방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예요.”
“예?”
“우리도 주군과 함께 강해져야 합니다. 그분께 거치적거려선 안 돼요.”
숙정방이 강엽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은 강엽 자신도 계획하지 않았던 사태였다.
단목정 역시 강엽의 위세를 빌려 호가호위할 뿐 숙정방을 어떻게 경영할지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했다.
“제가 알아본 바로 낭인전의 낭인들 중에도 무리를 이루는 부류가 있다고 하더군요. 맞나요?”
“아, 예. 그럴 겁니다. 낭인들이 본디 떠돌이들이긴 하지만... 요즘엔 한 곳에 정착해서 세력을 일구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낭인전을 거간꾼으로 삼아 돈을 벌고 무리를 이룬다.
그렇게 신흥 문파나 방파로 거듭나서 토착세력과 경쟁하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아무나 그러는 건 아닙니다. 주로 은패급 이상의 낭인들이 그렇지요.”
고섭풍은 몰랐지만 과거 강엽과 하후진의 손에 죽은 비호창 양평이 그런 존재였다.
은천패의 낭인으로서 자기만의 문파를 세우겠다는 야망을 품다 낭왕삼칙을 어겨서 척살된 자.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강엽은 숙정방을 접수함으로써 그가 이루고자 했던 야망을 이룬 것이다.
단목정이 말을 받았다.
“본방이 살아남으려면 주군과 함께해야겠죠. 그분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처럼은 안 된다. 숙정방 전체가 함께 강해져야 한다.
단목정이 비급을 꺼내들자 고섭풍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받으세요.”
“이, 이건 무공 비급이 아닙니까?”
“주군께서 주셨습니다.”
용아십도(龍牙十刀). 그것은 석판에 새겨진 무공 구결을 서책에 필사한 비급이었다.
강엽이 떠나기 전에 석판을 주고 용아십도의 무공 구결을 옮겨적으라고 했던 것이다.
“이, 이걸 그분께서...!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예. 고 당주뿐만 아니라 간부들도 각자에게 맞는 걸 익힐 겁니다. 일단 고 당주께 먼저 드리는 거고요.”
강엽은 비급 필사를 단목정에게 맡겼다.
본인이 하기는 귀찮기도 하거니와, 단목정이 비급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무공 구결에 조금은 익숙해지길 바랐던 것이다.
“다만 익히기 전에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건 흑룡교의 무공이에요.”
“예에?”
마교의 무공이라는 말에 고섭풍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흑도 방파에게도 마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설령 수십 년 전에 멸문한 마교라도 말이다.
“이번에 귀주성에 갔다가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아! 귀주성의 안개 사태 말씀이군요.”
“맞아요. 주군의 말씀에 따르면 그건 흑룡교의 비밀 분타가 일으킨 사태였죠. 혈교의 교성과 흑룡교의 잔당들을 격살하고 무공 비급들을 얻었다고 하셨어요.”
“.......”
단목정도 자세한 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전한 말로도 고섭풍은 기함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혈교의 교성을 죽이다니...!
“한데... 마교의 무공이라면 마공이 아닙니까?”
고섭풍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공은 강한 힘을 주지만, 수련자의 심성을 끔찍하게 뒤틀어버리니까.
알게 모르게 심마에 빠지면서 인간에서 멀어지는 비인외도의 길.
“아뇨. 주군의 말씀에 따르면 마교의 무공이라고 모두 마공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고섭풍이 염려하는 것처럼 사람의 심성을 뒤틀어버리는 마공도 존재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적어도 도법만 익힌다고 마성에 빠지진 않아요. 심법을 같이 익힌다면 모를까.”
“.......”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고 당주가 익히지 않겠다고 해도 이해하겠습니다.”
“...문주님은 어떻게 하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전 이미 익히고 있습니다.”
물론 용아십도는 아니다. 단목정의 가녀린 체격에 패도적인 용아십도는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일전에 강엽이 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흑룡교주의 혈손들이 몸을 갈고 닦는 수선공. 아무리 바빠도 두 시진은 짬을 내서 수련했다.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어요. 힘이 없으면 당한다는 것을.”
강엽이 없었다면 숙정방은 청우방에 먹혔을 것이다. 그녀의 운명도 알 수 없었으리라.
같은 일을 겪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이미 기호지세입니다. 이 길의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든 전 주군과 함께하겠어요.”
흑룡교의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고 강엽이 당장 그녀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엽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지는 못할 터.
“방주님, 저는....”
고섭풍은 말을 잇지 못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단지 강엽의 이름에 기대 안위를 도모하려는 힘없는 여인이 아니었다. 단목정은 진심으로 숙정방을 성장시킬 작정이었다.
“주군의 권위에 기댔다고 하나 저는 아직 방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어요. 고 당주가 저를 계속 도와줬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고섭풍도 인정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을. 선택을 미루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리라.
결국 그의 손이 그녀가 내민 비급으로 향했다.
* * *
강엽과 백서희가 돌아온 것은 사흘 뒤였다.
막 수선공을 수련 중이었던 단목정은 땀을 닦을 새도 없이 곧장 대문으로 달려갔다.
“오셨습니까, 주군.”
“그동안 별일 없었고?”
“네. 태화문에서도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강엽이 떠나고 나서 곧장 태화문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사흘 만에 오진 못할 것이다.
“그쪽도 주판알 튕기느라 바쁘겠지. 태화문은?”
“하명하신 대로 접객당에 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인들을 매수해서 밀지를 나누려고 했습니다. 밀지 내용은 따로 정리했습니다.”
“밀지라... 그건 생각하지 못했는데. 잘했다.”
아무래도 급하게 가다 보니 놓친 게 몇 가지 있었는데 단목정이 잘 처리한 것 같았다.
칭찬을 받은 단목정이 환해졌지만, 금세 표정을 수습하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밀지는 내 방에 가져다놓고... 수련 중이었나?”
몸에 딱 달라붙는 경장과 땀에 젖은 얼굴만 봐도 그녀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 만했다.
“네! 주군께서 주신 무공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해봐. 방주는 남들보다 출발이 늦지만, 수선공만 대성하면 격차는 좁혀질 거다.”
근골이 발달하고 경맥을 닦는 수선공의 효능. 비록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나중 가선 창대하리라.
‘내공 부족은 영약으로 채워주면 될 테고.’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장경에게 영약을 구해달라고 했는데 얼마나 모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몸에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최대한 여러 가지 영약을 모아달라고 했었는데....
‘왠지 양기의 영약은 안 맞을 것 같지만, 그땐 백서희나 단목정에게 주면 되겠지.’
강엽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밀지를 읽어본 뒤에 혼섬잔도를 만나볼 뜻을 밝혔다. 단목정이 보필하겠다고 나섰지만 백서희가 말렸다.
“에이, 수련 중에 멈추면 쓰나! 강엽, 괜찮다면 내가 방주의 무공을 봐주고 싶은데 그래도 돼?”
“음... 뭐, 괜찮겠지?”
백서희도 절정지경의 고수다. 강엽이나 홍예칠위 중 자권을 빼면 가장 강했다.
강하다고 잘 가르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경험 삼아 한번 맡겨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강엽이 떠나자 단목정이 아쉬워했지만, 땀을 많이 흘린 것을 아는지라 고집부리지 못했다.
백서희가 픽 웃었다. 상대가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말을 놨을 텐데. 그래도 일방의 방주인지라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서 대했다.
“반가워요. 저번엔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죠?”
“아, 네.”
서로 통성명은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단목정은 백서희가 누군지, 강엽과 어떤 사이인지 알지 못했다.
백서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숙정방의 방주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저 목석은 내버려두고 여자들끼리 수련이나 하자구요. 하는 김에 수다도 떨구요.”
“그, 그래도 방금 전에 돌아오셨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먼지투성이인걸? 땀 좀 흘린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요. 차라리 시원하게 땀 빼고 목욕하는 게 낫지.”
결국 단목정은 백서희의 손에 잡혀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팔자가 좋으시군.”
강엽이 들어오자 혼섬잔도의 면상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지만, 왼팔을 제외한 사지가 부러졌기에 일어나진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시비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강엽의 눈짓을 받은 시비들이 허리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허락도 없이 의자 하나를 빼서 방만한 자세로 앉자 혼섬잔도가 빈정거렸다.
“그렇게 앉으면 척추에 안 좋네.”
“염려해줘서 고맙소. 근데 내 척추 건강을 걱정하기 전에 노인장 걱정부터 하는 게 좋지 않겠소?”
“말투가 달라졌구만.”
“그땐 적으로 만났으니까. 사실 그땐 당신을 죽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소.”
깍지를 끼고 등받이에 몸을 눕힌 강엽의 눈에 일순간 붉은 흉광이 스쳐지나갔다.
“곧 시체가 될 사람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지 않겠소?”
순간적으로 폭사한 살기는 혼섬잔도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 강렬했다.
목울대를 움직이고는 작게 물었다.
“...지금은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게냐?”
“방주가 설명했을 텐데.”
“그래. 갑자기 이 방을 주고 지극정성으로 돌봤지. 뜬금없이 연회까지 제안하더구나. 태세전환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어지럽더군.”
“그래서 노인장 생각은?”
“청우방에게 뒤집어씌우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셈이겠지? 미리 말해주마. 그건 불가능하다.”
청우방과 사돈을 맺은 건 그의 의지였지만 배후엔 대공자가 있었다. 청우방을 이용해서 노주 흑도 방파들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충하려는 심산.
“노주의 흑도 방파들을 모은다고 그렇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소만. 단순히 머릿수를 채우려는 용도라면 몰라도.”
지금보다 약했던 시절의 강엽도 숙정방을 어렵지 않게 무릎 꿇렸다.
물론 당시에도 은천패에 준하는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달리 말하면 노주의 흑도 방파들을 싹 긁어모아봤자 절정고수 세 명밖에 안 된다는 뜻.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이 별안간 입꼬리를 당겼다.
“아니군. 노주는 교두보일 뿐이야. 진짜 손에 넣고자 한 세력은 따로 있었어. 귀주나 운남의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것이오?”
“...!”
“귀주엔 대방파가 없지. 얼마 전에 난리를 겪어서 어수선한 상태고. 운남이겠군.”
그리고 운남엔 구파인 점창파도 우습게 볼 수 없는 대방파가 준동하고 있었다.
흑접주의 일기장에서도 언급됐던 세력.
“맹월림.”
노주는 사천에서 운남으로 가는 관문이지만, 반대로 운남에서 사천으로 오는 관문이기도 했다.
미리 노주의 흑도 무림을 복속시키면 맹월림이 사천으로 진출하기 한결 쉬워지는 것이다.
“조영옥이 장강 중류의 물류를 손에 넣었지. 조천방과도 협력하는 관계고. 맹월림을 이용해서 그 여자의 영역을 어지럽히려는 거요?”
“반맞 맞았구나.”
“그럼?”
“이공녀의 외가가 어딘지 아느냐?”
대공자와 조영옥은 배다른 남매.
당연히 외가도 달랐다.
“천금상단이다.”
“...!”
이건 강엽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장안대상회에 비견되는 대상단이 조영옥의 외가였다니?
“천금상단주의 차녀가 이공녀의 모친이다.”
“맹월림을 끌어들여 천금상단을 압박하겠다고?”
“이미 운남에선 그러고 있느니라. 남만의 야만족들은 거리낄 게 없지. 놈들은 상대가 대상단이든 뭐든 욕심 나는 건 부수고 빼앗는다.”
“천금상단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당연히 가만있진 않지. 하나 운남의 밀림에서 맹월림과 싸워 이길 세력은 없다.”
“밀림에선 인간만이 적이 아니지....”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맹수들과 독물들, 푹푹 찌는 더위와 풍토병까지.
그 옛날 폭풍같은 기세로 대륙을 병탄했던 원나라도 운남을 정복하느라 쩔쩔매지 않았던가?
“그 말을 조영옥에게 똑같이 할 수 있소?”
“이미 이공녀도 알고 있다. 증거가 없을 뿐이지.”
“당신이 입을 열면 증거가 될 텐데.”
“노부가 열 거라 생각하느냐?”
“수하들 목숨을 걸 수 있소?”
“뭐라?”
그 순간 강엽이 소매에서 무언가 종이를 잔뜩 꺼내 혼섬잔도의 무릎 위에 툭 던졌다.
침상에 몸을 기대고 있던 혼섬잔도는 수북하게 쌓인 쪽지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이게 뭐냐?”
“읽어보시오. 다행히 암어를 쓰진 않았더군.”
그건 태화문의 사람들이 나눈 밀지를 옮겨적은 쪽지였다.
어느 정도 우회적으로 돌려 적긴 했지만 그들의 운명을 걱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맹월림을 이용해 천금상단을 압박하고 있다면 조영옥이 이를 갈고 있겠지. 그녀의 자금도 상당 부분 천금상단에 의존할 테니까.”
“네놈......!”
“조영옥을 설득할 필요도 없었군.”
납덩이처럼 경직된 혼섬잔도를 향해 강엽이 짐짓 과장스러운 태도로 포권했다.
“귀중한 정보 알려줘서 고맙소, 노인장. 당신 부하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조영옥에게 넘겨드리지.”
* * *
그리고 이틀 뒤, 태화문의 사자가 도착했다.
조영옥이 직접 부하들을 대동하고 숙정방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