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18화 (118/450)
  • 19화. 혈룡 (2)

    백서희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뭐라고....’

    흑룡교주가 작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나.

    마치 속내를 내다본 것 같은 말.

    정신을 차린 백서희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녀의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흑룡교주의 앞에 끌려왔다.

    덕분에 흑룡교주의 용모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의외로 세월의 풍상은 보이지 않았다.

    입고 있는 용포 만큼이나 새카만 흑발과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매끈한 얼굴.

    하지만 수려한 이목구비와 달리 그의 눈동자엔 젊은이 같은 열정이나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검은 무저갱은 깊고 무심해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조정의 노회한 중신이나 깨달음을 얻은 고승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법 멋진 풍경이지.

    함성을 지르는 그대로 굳어진 교도들.

    석상 같은 모습을 쭉 둘러본 흑룡교주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중원을 침공하기 전에 저런 연설을 했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어. 아무리 강해도 천하를 뒤엎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정지한 세상을 오시한 흑룡교주가 자조적으로 말을 잇는다.

    -심지어 천기조차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천기를 엿보는 혜안을 손에 넣었다고 자부하는 광오함.

    하지만 머나먼 옛날에 죽은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을 불러와서 태연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만으로도 흑룡교주의 권능은 초월적인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실패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본교가 천하를 석권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릴 때... 적어도 교맥만은 끊이지 않도록 말이다.

    흑룡교가 무너져도 교맥을 잇겠다는 광기 어린 집념.

    여러 가지 방안을 고안한 흑룡교주는 중원 곳곳의 비밀 분타에서 은밀한 계획을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내 마지막 후손을 위해 준비한 안락한 보금자리.

    어째서 마지막 후손이어야 했나.

    간단한 이유였다.

    -후손이 둘 이상 남을 경우 누가 교맥을 이을 정통한 후계자인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술법진만으로는 개개인의 역량이나 성품을 판별하기 힘들었지.

    흑접주가 어렸을 적엔 흑룡교주의 후예들이 소수나마 남아 있었기에 술법진이 발동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흑룡교주의 후예들은 정체를 발각당해 살해당하거나 나이가 들어 죽었다.

    만약 흑접주가 자식을 보지 않고 홀로 살아갔으면 이미 술법진은 진작에 주인을 정했을 터.

    역설적으로 흑접주가 흑룡교의 부활을 위해 자식들을 본 게 흑룡교의 부활을 늦춘 것이다.

    -이 술법진이 발동됐다는 것은 내 후손들이 전부 죽고 너 하나 살아남았다는 뜻이겠지.

    여상히 중얼거리는 말에 백서희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네가 무슨 이름으로 살아가는지는 중요치 않다. 하지만 술법진이 너를 교주의 권좌로 안내하리라.

    낮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그제야 퍼뜩 정신 차린 백서희가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쳤다.

    ‘이런 씹, 웃기지...!’

    -네게 거부권은 없다, 후손이여.

    일방적으로 속마음을 끊고 손가락을 딱 튕긴다.

    -밖에 나가면 길잡이가 있을 것이다. 그가 너를 옥좌로 데려갈 테니 본교의 재건에 힘쓰라.

    화아아아악!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다.

    크고 웅장한 전각들도, 광장을 가득 메꾼 교도들도, 그리고 흑룡교주 그 자신도.

    검은 잿가루만 흩날리는 세상에서 백서희는 의식이 현실로 급부상하는 것을 느꼈다.

    * * *

    “윽!”

    깨어나자마자 이마를 붙잡았다.

    다행히 머릿속을 찌른 두통은 빠르게 가라앉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었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다른 사람의 기척을 깨닫고 날카롭게 묻는다.

    솔직히 여기서 볼 거라고 생각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전에 얘기를 나누었을 때와 달리 상전을 모시듯 공경심을 드러내는 봉두난발의 사내.

    “아시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말씀해주셨을 텐데요.”

    “...상추영.”

    “본명은 상관추영이라고 합니다, 아가씨.”

    “....”

    백서희는 상관추영의 정체가 뭔지는 관심 없었다.

    정말 궁금한 건 다른 거였으니까.

    “사실이야?”

    “예?”

    “사실이냐고! 내가 흑룡교주의 후손이라는 게!”

    “아... 그것 말이군요.”

    “말해!”

    “하하. 예, 사실입니다. 저 또한 아가씨께서 교주님의 혈손이라는 걸 방금 알았습니다. 사실 처음 뵈었을 때는 긴가민가했습니다.”

    강엽과는 달리 상관추영은 그녀가 어떤 경로로 술법진에 들어왔는지 듣지 못했다.

    혹시나 흑룡교의 유산을 탐내서 들어온 게 아닌지 의심했기에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

    “제가 아는 교주님의 성씨와는 다르나, 그분의 계시를 받았다면 틀림없이 용혈이시겠지요.”

    “....”

    섬세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뒷골목에서 태어난 비루한 고아가 알고 보니 천하를 질타했던 흑룡교주의 후손이라니, 이게 무슨 질 나쁜 농담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하긴 진실을 몰랐다면 충격받을 만하지요.”

    백서희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지껄이는 상관추영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다.

    “시끄러워.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들으셔야 합니다. 아가씨께선 위대한 흑룡교주의 마지막 후손....”

    “닥치라고, 이 새끼야-!”

    쐐애액!

    허공을 꿰뚫는 날카로운 검극.

    하나 상관추영의 몸엔 닿지 못했다. 그 앞에 있는 무언가가 검을 막았기 때문이다.

    쩌저저저적...!

    깨진 유리처럼 크고 작은 균열들이 허공을 타고 번진다.

    백서희는 반사된 상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사술?”

    “아뇨, 일종의 진법입니다.”

    목소리가 들린 순간 크고 작은 거울들이 사방팔방에서 출현, 물샐 틈 없이 그녀를 에워쌌다.

    -유리경반진(琉璃鏡反陣).

    빠져나갈 틈이 없다.

    거울상에 맺힌 수십 명의 자신이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에 백서희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무인이 아니었어?”

    “무공도 익혔습니다. 주력이 아닐 뿐이지요.”

    무공만 논한다면 두 사람의 격차는 확연하겠지만, 상관추영은 진법의 힘으로 열세를 뒤집었다.

    “풍문에 따르면 강호 제일의 진법가인 제갈세가주는 진법으로 비와 바람을 부린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에 견줄 바는 아니나, 아가씨를 막기에 부족함은 없을 겁니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누가 당해준대!?”

    쾅! 쾅! 촤아아아악!

    암기를 퍼붓고 쌍검과 은혼사를 휘둘러 거울들을 깨부순다.

    하나 그때마다 새로운 거울이 생겨났다.

    -소용없어....

    -하지 마... 포기하면 편해....

    똑같은 얼굴로 조롱하는 거울들.

    백서희는 깊은 빡침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울컥했다.

    “이년들이 진짜...!”

    “말이 험하시군요. 위대한 핏줄이라도 교육받지 못하면 시정잡배가 되는 건지....”

    “넌 닥치라고 했지!”

    “아가씨께는 훈육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상관 모가 특별히 조교해드리지요.”

    상관추영의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흑룡교가 멸문한 지도 어언 오십 년.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멸문했으니 충성심 또한 깊지 않았다.

    그럼에도 흑룡교주의 혈손을 진득하게 기다린 까닭은 바로....

    “그것 아십니까? 사실 여긴 새로운 흑룡교주를 위해 지어진 시설입니다. 새로운 교주를 위해 모든 게 준비되어 있지요.”

    수십 채의 전각군과 대대로 교주를 섬긴 충신의 일맥. 그리고....

    “이곳 깊숙한 곳엔 흑룡교의 비고가 있습니다. 오직 교주와 허락을 받은 충신만 들어갈 수 있지요. 그러니 아가씨께서는 교주가 되셔야만 합니다. 오랜 세월 당신만을 기다리다 죽은 사부님과 그 뒤를 이은 저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상관추영은 백서희의 의지는 상관없었다. 강제로 옥좌에 앉힌다면 충실한 흑룡교주가 될 테니까.

    설령 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옥좌에 깃든 전대 교주의 의지에 의해 변해갈 터였다.

    “큭큭, 혈교 그 아둔한 놈들이 술법진을 폭주시켰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글쎄.”

    등 뒤에서 훅 들어온 목소리.

    무뚝뚝한 목소리에서 익숙함을 느낀 상관추영은 소름이 돋았다.

    백서희에게 집중하는 동안에도 주변 경계는 소홀히 하지 않았거늘 어떻게...?

    투아아앙!

    “크헉!”

    기습을 처맞고 날아간 상관추영을 향해 강엽이 천천히 걸어갔다.

    “으윽, 네놈...!”

    “떠벌리는 소리 잘 들었다. 그래, 흑룡교의 비고가 있다고?”

    “닥쳐라, 이교의 죄인! 네놈 따위를 위해 마련된 안배가 아니다!”

    “혈교나 흑룡교나 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교의 죄인 운운하는지 모르겠군. 교리가 같지도 않을 텐데 묘하게 죽이 잘 맞아.”

    “잡스러운 혈귀 따위와 비교하지 마라!”

    “혈교도가 들으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지는데.”

    손가락을 구부리자 불꽃처럼 피어나는 검붉은 기운.

    섬뜩한 악의를 감지한 상관추영은 어금니를 깨물고 죽일 듯이 강엽을 노려봤다.

    “...날 죽이면 아가씨도 무사치 못할 거다.”

    “제 상전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는 하수인이라. 신선한데? 역시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아.”

    피식 실소한 강엽이 돌연 표정을 바꾸며 살기를 내뿜자 상관추영의 낯빛이 납덩이처럼 경직되었다.

    “살고 싶으면 당장 진법 풀어. 알고 있는 건 모두 불고.”

    “허튼 소리!”

    발작하듯 토해낸 외침과 함께 공간 전체가 물결쳤다.

    앞서 백서희에게 펼친 것과 같은 진법으로 강엽을 묶어두려는 것.

    하지만 갑자기 명치를 관통하는 고통이 그를 덮쳤다.

    “커허...!”

    도대체 어떻게.

    눈깔에 핏발이 선 놈을 향해 강엽은 귀싸대기로 대답해줬다.

    털썩 주저앉은 상관추영의 입술에서 피 섞인 침과 이빨 조각들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제기...랄, 이렇게 포기할 수는....’

    무엇을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뎠던가. 흑룡교의 신공을 얻어야만 그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을진대.

    갑자기 튀어나온 이 괴물이 다 망쳐버렸다.

    “끄아아아악!”

    손가락이 어깨 근육을 뚫고 뼈까지 닿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강엽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무자비한 구타를 퍼부었고, 아예 자성검까지 꺼내 놈의 엄지에 가져다 댔다.

    “손까지 병신되고 싶지 않으면 당장 풀어.”

    “자, 잠깐! 할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수전증을 앓는 것처럼 덜덜 떨면서도 수인을 맺어 진법을 푼다.

    물론 강엽은 놈이 엉뚱한 짓을 하면 언제든 목을 날릴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어? 강엽!?”

    진법에서 풀려나온 백서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어, 응, 그래... 근데 그놈은....”

    잠시 얼떨떨해진 그녀는 반병신이 된 채 눈물 콧물 질질 짜는 상관추영의 추태에 묘한 얼굴이 됐다.

    비참한 몰골만 봐도 저간의 사정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쓰읍, 내가 패주려고 했는데.”

    “한 대 정도라면 괜찮아.”

    쌓인 게 있을 테니 양보해주겠다는 말. 고개를 푹 숙인 상관추영을 힐끗 본 백서희가 코웃음을 쳤다.

    “됐어. 보아하니 한 대 때리면 진짜 죽을 것 같은데. 그놈 살려주는 이유가 있는 거 아냐?”

    “알고 있는 게 많은 것 같아서.”

    “그놈이 나를 강제로 옥좌에 앉히려고 했어. 그럼 옥좌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놈 이용해서 옥좌를 찾는 건 어때?”

    거듭된 흡혈로 기감이 전에 없이 날카로워진 강엽이지만, 무작정 감에 의존해서 찾는 것보다는 길잡이를 이용하는 게 몇 배는 빠를 터.

    일리가 있다고 여긴 강엽은 손가락만한 자기병을 꺼내 상관추영이 흘린 피를 담았다.

    “무, 무슨 짓을....”

    “미리 대비하는 거지.”

    미처 자기병에 담기지 않은 피를 바닥에 떨어트려 수인을 맺는다.

    그러자 구멍난 어깨 근육을 중심으로 살갗이 꺼멓게 굳어갔다.

    상관추영이 헉 소리를 내고, 백서희도 깜짝 놀랐다.

    다행히 어깻죽지를 갉아먹은 술법의 독은 심장을 파고들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춘 상태.

    굳어진 부위를 툭툭 친 강엽이 말했다.

    “지금은 일부러 멈춘 거다.”

    피는 충분하니 언제든 혈독을 재개할 수 있으리라.

    파리하게 질린 상관추영을 내버려둔 강엽이 몸을 일으키며 사악하게 웃었다.

    “살고 싶으면 처신 잘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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