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혈룡 (3)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상관추영은 얌전해졌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흑룡교주는 교의 패망을 대비하여 비밀 분타를 만들었는데, 혹시나 정보가 새어나갈 것을 우려해서 위험하다는 구실로 폐쇄했다.
그리고 비밀 분타의 설립에 관여한 자들을 살인멸구하고 한 명의 충신에게만 알려주었다.
“내 사부님이었소.”
“누구지?”
“...흑령수사(黑靈修士) 구밀본.”
“구천호법인가?”
“그 아래인 암영(暗影)이라는 직급에 계셨소.”
혈교와 비교하면 교성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낭인전의 일을 했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었군.”
“며, 몇 번 일하신 건 사실이오. 흑룡교가 망해버려서 돈 나올 구석이 없었으니... 농사 지을 게 아니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낭인전은 신분을 묻지 않으니 본신 무공만 숨기면 되고... 막상 해보니 벌이도 짭짤해서 그거 말고 다른 일은 못하는 몸이 되셨다고....”
상관추영은 차마 사부가 말년에 주색에 빠져 죽을 때까지 기루를 드나들다가 복상사했다는 얘기까진 하지 못했다.
그것까지 말해버리면 사부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겠는가?
물론 거기까지 말하지 않아도 어처구니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세상에. 마교의 잔당 주제에 풍족하게 살았다니.”
“...뭐, 이상한 일은 아니지.”
사실 강엽도 비슷한 처지였다.
낭인전이 신분을 묻지 않고 받아준 덕에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흑룡교의 비고엔 뭐가 있지?”
“나도 모르오. 사부님께 얼핏 듣긴 했는데 실물을 본 적은 없고. 다만 아가씨께서 옥좌에 앉아 교주가 되셔야만 비고의 문이 열릴 거요.”
“위치를 알아도 못 들어간다는 거군.”
“...내가 괜히 아가씨를 교주로 옹립하려는 게 아니오. 아가씨 없이 들어갈 수 있다면 진작 그러지 않았겠소?”
“아까 옥좌에만 앉으면 충실한 흑룡교주가 될 거라고 했지. 혹시 그녀가 앉으면 심성이 변하나?”
그 대목에서 상관추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거짓말로 모면하자니 언제든지 죽여버릴 수 있다던 강엽의 협박이 아른거렸다.
“아마 그럴 거라 생각하오.”
“이유는?”
“...내가 아가씨를 찾은 건 우연이 아니었소.”
백서희가 흑룡교주의 환상을 접했을 때 그도 계시를 받았다.
덕분에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어디로 가면 백서희를 만날지 알 수 있었다.
“아가씨께서 옥좌에 앉으면 술법진에 서린 교주님의 의지가 깃들 것이오. 내 안에 깃든 위대한 계시가 그리 외쳤소.”
“한마디로 흑룡교주의 꼭두각시가 된다?”
“쉽게 말하면... 그렇소. 하지만 그것 말고는 비고에 들어갈 다른 방법이 없소.”
자신이 흑룡교주의 후손임을 알고 있고, 흑룡교를 재건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면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백서희는 아니지 않은가.
“그건 기각이다.”
“뭐?”
강엽이 흑무암쇄진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알기에 백서희는 놀랐다.
“아니, 나야 다행이긴 한데... 진짜로?”
“변수가 너무 많아.”
백서희가 옥좌에 앉으면 어떻게 변할지 예상할 수 없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처럼 미쳐서 적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
“옛날에 죽은 망령에게 휘둘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방해꾼들 치우고 술법진을 푼다. 흑룡교의 비고는 그 뒤에 찾아도 돼.”
“궤, 궤변이오! 술법진을 푼다니, 그게 가능할 리가...”
“다른 대안 있나? 있으면 지껄여보든가.”
그런 게 있다면 진작 말했겠지.
벙어리가 된 상관추영을 무시한 강엽이 백서희를 돌아봤다.
“이견은?”
“다, 당연히 없지!”
백서희는 어쩐지 멋쩍어져서 시선을 피했다. 나름대로 이유를 댔지만 결국 강엽은 쉬운 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게 고맙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옥좌까지 안내해라, 길잡이.”
“휴우,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가지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협박을 받은 상관추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 * *
끊임없이 바뀌는 기관진식은 이제 통로를 넘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좁은 통로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 수백 명이 들어설 만큼 넓은 석실이 나온 것이다.
애초에 지하까지 부지를 넓혀놨기에 가능한 거대한 규모.
강엽과 백서희는 석실 곳곳을 장식한 거대한 석상들의 모습에 경이로운 감정을 느꼈다.
석상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났지만 가장 작은 석상도 삼 장을 넘었고 가장 큰 석상들은 숫제 오 장에 달하는 크기를 자랑했다.
“이것들은 뭐지?”
“흑룡교의 전설들이오.”
“전설?”
“흑룡교주를 보필했던 구천호법들과 그 밑을 떠받친 기라성 같은 고수들.... 흑룡교의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선조들이오.”
“아까는 안 보였는데?”
“그야 숨겨져 있었으니까.”
석상들을 쭉 둘러본 상관추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관진식이 얼핏 보면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소. 구궁팔괘진의 이치에 따라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소.”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백서희였다.
“구궁팔괘진? 어딜 봐서?”
“...안에 갇힌 자들의 눈으로는 작은 것밖에 볼 수 없지요. 하지만 분명히 그리 움직이고 있습니다.”
백서희가 옥좌에 앉은 것을 거부했음에도 상관추영은 아랫사람처럼 공손히 굴었다.
표정은 퍽 복잡했지만 말이다.
“옥좌는 중앙인 구궁에 있겠군.”
“그렇소.”
상관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바른 길을 모르면 엉뚱한 곳만 헤맬 뿐. 피상을 보고 외곽만 빙빙 도는 것이오.”
“그러는 넌 올바른 길을 알고?”
“...교주님께서 점지하신 길잡이니까.”
“흑룡교주가 아니라 술법진이겠지. 오래전에 죽은 놈이 널 어떻게 알고 고르나?”
“으음.”
상관추영은 부정하지 못했다.
길잡이로 선택된 것은 사부에게 물려받은 신물과 술법진이 공명한 덕이었으니까.
문제는 올바른 길이 항상 안전한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잠깐. 저거 싸움 난 거 아냐?”
멀리서 들려오는 아스라한 소리.
강엽과 백서희가 빤히 쳐다보자 상관추영이 식은땀을 흘렸다.
“우, 우연입니다.”
“하긴 한 명도 안 마주치는 게 이상한 거지. 근데 이 기척은....”
강엽이 미간을 좁혔다.
멈췄는데도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듯했다.
어둠 속을 꿰뚫어본 백서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야, 저 녀석은? 날아다니는 저팔계?”
“우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는 뚱보.
다름 아닌 개방의 후개였다.
“거, 거기서 비키시오!”
후개도 이쪽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는지 얼른 경고했다.
그를 알아본 강엽이 말했다.
“개방 후개다.”
“엥? 저렇게 뚱뚱한데?”
“나도 처음엔 못 믿었지.”
“뭘 처먹고 살이 저리 쪘대.”
답은 상관추영의 입에서 나왔다.
“개, 개방 후개의 풍문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대륙 각지에서 소문난 맛집에만 동냥을 다녔다고....”
개방 후개쯤 되면 굶어죽을 일은 없었다. 신분을 드러내면 어딜 가든 대접받는 것이다.
백서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암만 후개라도 그렇지, 거지놈 취미가 식도락인 게 말이 돼?”
“개방 후개쯤 되면 그냥 거지는 아니지.”
말은 그러면서도 달려오는 후개의 모습을 보는 강엽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후개의 뒤로 십수 명의 혈교도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 명이나 되는 절정고수들이 석상을 넘어오며 강렬한 기세를 뿌리는 게 아닌가?
‘혈교도는 아니다. 혈교와 손 잡은 놈들이군.’
가만히 있으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강엽이 상관추영을 곁눈질했다.
“아까 썼던 진법. 다시 쓸 수 있나?”
“그, 그게 시간이 좀....”
무공과 달리 진법은 쓰려면 사전에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는 것이다.
백서희가 입맛을 쩝 다셨다.
“강호 격언에 강력한 적이 아군이 되면 높은 확률로 무능해진다고 하더니만.”
“무, 무능하다뇨! 그래도 싸울 수는 있습니다!”
상관추영이 억울해하며 외쳤지만 강엽과 백서희 모두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흐음, 구해줘야 하나?”
“실은 얼마나 남았지?”
“은혼사? 아직은 넉넉해.”
“저놈 통과시킨 뒤에 치면 되겠군.”
“내가 개방 후개를 구할 날이 올 줄이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지 백서희는 실소를 흘리면서 한 줄기 잔영이 되었다.
옛 흑룡교의 비기인 유령마보(幽靈魔步)의 현현.
정신없이 도망치던 후개는 불쑥 솟은 하얀 얼굴을 보고 기겁했다.
“처, 처녀귀신!?”
“이게 누구더러 귀신이래!”
빽 소리친 그녀가 유려한 신법으로 후개의 머리 위를 넘었다.
직후 팔찌에서 은사를 세 겹으로 빼내서 길을 막았다.
“잠깐, 저 계집은 설마...!”
“안 돼. 가까이 가지 마라!”
그녀를 알아본 혈령교위들이 고함쳤지만 너무 늦었다.
선두의 교도들이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던진 것이다.
촤아아아아악!
“켁! 뭐, 뭐야!?”
사람의 몸뚱이가 썩둑썩둑 썰려나가자 후개가 뜨악했다.
그때였다.
“길 막지 말고 비켜.”
“엇, 형장은...!”
비로소 강엽의 존재를 알아차린 후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강엽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놈들은 뭐야?”
“황충팔객이라는 놈들이오. 다니는 곳마다 메뚜기 떼처럼 해악을 끼친다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소.”
“팔객? 네 명밖에 없는데?”
“기관진식 때문인 것 같소.”
시도 때도 없이 움직이는 기관진식이 황충팔객을 뿔뿔이 흩어놓은 것이다. 사실 절반이라도 남은 게 그들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석상의 머리나 어깨 등을 밟고 선 황충팔객이 일행을 쭉 훑고 지나가다 백서희에 이르러 멈추었다.
미려한 자태를 훑어보고는 턱을 매만진다. 얄팍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위로 음심이 번졌다.
“생각지도 못한 횡재로군. 시궁창에서 우물(尤物)을 주웠어.”
“으하하! 계집만 살려둡시다. 웬만한 기루에서는 보지도 못할 미녀가 아니오?”
쓰레기 같은 음담패설에 혈교도들조차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황충팔객은 개의치 않았다.
각지를 전전하며 쾌락을 쫓아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아녀자를 겁간했던 그들이었다.
“아랫도리에 지배받는 놈들이 여기도 있었네.”
백서희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성도의 뒷골목부터 흑접까지, 그녀를 욕심냈던 사내들은 신물이 나도록 겪은 그녀였다.
힘이 없던 시절엔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저 새끼들 내가 쳐죽여도 돼?”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안 들을 거지?”
“당연한 말씀.”
“너 혼자서는 무리다.”
“입 다문 놈들은 넘겨줄게.”
“고마워서 눈물 나겠군.”
태연히 주고받는 대화에 피아를 막론하고 얼이 빠졌다.
물론 일찍이 백서희의 무서움을 경험해본 혈교도들은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방심하지 마라! 보통 계집이 아니야!”
“우리도 바보는 아니다.”
백서희가 어떤 식으로 혈교도들을 죽이는지 보지 않았던가.
행실은 썩어빠졌을지언정 절정고수답게 명경지수의 평정심으로 단단히 무장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퍼억!
“컥!”
불시에 나타난 강엽에게 처맞고 날아가기 전까지는.
튕겨나간 황충팔객의 일인이 석상에 부딪쳐 흙먼지를 일으키자 강엽이 빈정거렸다.
“충분히 방심한 것 같은데?”
“아니!?”
다른 황충팔객들이 경악했다.
혈교도들과 후개, 상관추영 등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시야에 있던 강엽이 갑자기 축지법이라도 쓴 것마냥 황충팔객의 배후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촤아아악!
백서희 역시 음담패설을 지껄인 놈의 배후에 나타났다.
아쉽게도 놈이 기민하게 반응한 탓에 기습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식겁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대체 어떻게...!”
“이거 진짜 끝내주네!”
강엽과 손을 잡고 함께 어둠 속에 녹아든 것이다.
거듭된 흡혈로 암신의 효능도 강해져서 황충팔객 같은 절정고수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이를 악문 황충팔객이 둥그런 철구를 던졌다.
안색이 변한 후개가 외쳤다.
“독탄이오! 조심...!”
퍼어엉!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진 독탄.
농밀하게 피어오르는 녹색 독연을 피해 멀리 떨어진 황충팔객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해치웠나?”
그리고 바로 그때, 가느다란 은사가 그의 목을 앞뒤로 휘감았다.
서걱!
목을 잃고 쓰러진 시신.
그를 지나친 백서희가 말했다.
“강호 격언 두 번째. 상대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을 땐 ‘해치웠나?’ 라는 말은 쓰면 안 된다. 십 할 확률로 적이 부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