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17화 (117/450)
  • 19화. 혈룡 (1)

    “대비책을 마련해놨군.”

    술법진의 폭주와 그로 인한 파동.

    강엽과 독야마랑의 싸움으로 인해 술사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결과, 흑룡교의 술법진이 폭주했다.

    어쩌면 술사들의 역량이 떨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일이 벌어진 지금에 와서 원인을 찾은들 무슨 소용일까.

    쿠구구구구궁......!

    바닥이 갈라지고 벽이 움직인다.

    이 석조건물 자체가 술법진의 폭주를 염두에 두고 고안된 거대한 기관진식이었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내상을 입고 쓰러진 술사들.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자들은 쩍 갈라진 무저갱에 삼켜지고 말았다.

    “.......”

    천지가 개벽하는 참상에 독야마랑이 아연해지는 찰나.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강엽이 손톱에 묻은 피를 떨어트리며 진언을 외웠다.

    멍청하니 있던 독야마랑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이, 이런...!”

    검을 쥔 손이 하박부터 시커멓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감각이 사라지고 나서야 독야마랑은 강엽의 노림수를 깨닫고 안면을 파르르 떨었다.

    검을 바꿔 쥐려고 해봤지만 그걸 그냥 내버려둘 강엽이 아니다.

    투아아아앙!

    “컥!”

    호쾌한 족격이 작렬, 단단한 호신기를 뚫고 중단전이 있는 명치 어림을 강타했다.

    “사부님!”

    멀리서 싸우던 귀주오살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 역시 백서희와 싸우느라 여력이 없는 데다 바닥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독야마랑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그 사이를 옆에서 툭 튀어나온 격벽이 가로막는다.

    강엽 역시 백서희와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뒤쪽을 돌아봤지만.

    “야, 얼른 그놈부터 끝장내!”

    완전히 격리되기 전에 백서희가 외친 말.

    그 말을 한 직후 격벽이 물샐 틈 없이 닫혀버렸다.

    “음....”

    강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백서희의 무사함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술법진의 핵심인 그녀와 떨어지는 게 마음에 걸렸으니까.

    하나 투덜거릴 시간은 없다.

    “쿨럭, 이놈...!”

    마른 기침을 뱉은 독야마랑이 원한을 불태웠다.

    두 사람의 거리도 기관진식에 의해 멀어지고 있었지만, 독야마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훌쩍 뛰었다.

    그새 바꿔 쥔 손으로 검격을 내치자 수십 개의 그림자가 춤춘다.

    비록 혈독으로 팔을 잃었지만 생전의 흑접주와 비견할 만큼 출중한 무공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파파파파파팟!

    피할 방위를 모조리 차단하는 검의 소나기.

    ‘환검(幻劍)!’

    그냥 봐서는 뭐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육안으로 봐서는 실초와 허초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진조의 영성이 말하고 있었다.

    ‘피할 수 있다.’

    활짝 열린 기감이 무엇이 진짜인지 헤아린다.

    강엽이 몸을 뒤집으면서 어둠 속에 녹아들자 독야마랑도 가일층 공력을 끌어올렸다.

    “하찮은 잔재주를!”

    쐐애애애액!

    움직임을 예측하고 동선을 짠다.

    하지만 강엽은 무지막지하게 꺾여오는 소나기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있었다.

    옷자락이 찢기고 살갗이 베여나가도 급소만은 귀신같은 회피 동작으로 흘려버린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면을 때려 검로를 어긋나게 만들었다.

    상체를 비틀어 겨드랑이 아래로 검격을 흘리면서 거리를 좁힌다.

    직후.

    콰앙!

    “끄윽!”

    턱주가리에 장타를 얻어맞은 독야마랑이 뇌가 흔들리는 충격에 비틀거렸다.

    단순하지만 절묘하게 파고든 탓에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것.

    하나 그러면서도 강엽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검을 크게 휘둘러 견제했다.

    투아아아아앙!

    막강한 경파가 석벽에 작렬한다.

    훌쩍 뛰어서 피한 강엽이 눈썹을 구겼다.

    “부수지 못했다고?”

    자세히 살펴보니 미증유의 기운이 석벽을 보호하고 있었다.

    필시 힘으로 기관진식을 뚫지 못하도록 흑룡교가 사전에 조치해놓은 것이겠지.

    “흐아압!”

    그때 바짝 독이 오른 독야마랑이 쫓아왔다.

    꽝! 콰앙!

    이 순간에도 무궁하게 변하는 기관진식 위를 종횡무진 누비며 수십 초식의 공방을 교환.

    전후좌우 시도 때도 없이 위치를 바꾼 그들이 부딪칠 때마다 파찰음이 일고 투명한 충격파가 일렁이듯 뻗어나갔다.

    탕! 쾅! 투아아아앙....!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는 두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똑같이 기관진식에 의해 흘러든 무림인들과 조우하는 것은 필연일 터.

    “어엇!”

    강엽이 아래로 떨어지는 시점과 맞물려 툭 튀어나온 자색무복을 입은 무인이 경호성을 질렀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호천(護天)’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강엽이 잽싸게 경고했다.

    “피해!”

    “잡것이 방해하지 마라!”

    상처입은 짐승처럼 외친 독야마랑은 봐주지 않았다.

    수직으로 내쳐진 검이 무림맹도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길쭉하게 갈라버린다.

    쐐애애애액!

    악귀나찰처럼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독야마랑이 검기를 날렸다.

    고개를 젖혔음에도 광대뼈가 드러날 만큼 깊숙이 베였다.

    강엽의 눈에 붉은 혈광이 스쳐지나간 순간, 다섯 줄기의 섬광이 공간을 찢어발겼다.

    “크악!”

    “개싸움을 원한다면.”

    탄탄한 흉근에 다섯 줄기의 상처를 새긴 독야마랑을 향해 흡혈귀가 으르렁거린다.

    “원하는 대로 해주마, 늙은이.”

    상처는 말이 끝나자 아물었다.

    상리를 벗어난 재생력에 독야마랑이 헛바람을 집어삼킨 찰나 강엽의 신형이 사방에 나타났다.

    암신으로 빚어낸 다중허상. 하나하나가 강엽과 똑같은 기세를 풍기고 독야마랑을 압박했다.

    “이런...!”

    독야마랑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기습처럼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강엽이 완맥을 낚아챘다.

    독야마랑은 본능적으로 금나수를 떠올리고 반격초를 가하려고 했으나 강엽이 한발 빨랐다. 놈의 허리춤을 잡고 메쳐버린 것.

    “......!”

    뼛속까지 관통하는 충격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 강엽은 그렇게 내동댕이쳐진 독야마랑을 인정사정없이 걷어차버렸다.

    “크엑!”

    격벽에 부딪친 독야마랑이 한 됫박이나 되는 선혈을 쏟고는 힘없이 허물어졌다.

    “쿨럭, 어윽... 큽!”

    “교령은 두 명째로군.”

    첫 번째 교령은 백서희를 찾느라 바빠서 미처 피를 빨 새도 없었다.

    하지만 독야마랑은 다르다.

    뿌드득!

    “끄, 끄아아악!”

    검을 쥔 손을 짓밟아서 으스러뜨리고, 놈의 목을 잡아올려 억지로 눈높이를 맞췄다.

    콰작!

    “흐어어어!”

    목울대가 꿀렁거릴 때마다 생기가 빠져나가는 독야마랑의 눈빛.

    이윽고 초점을 잃고 흐리멍텅해진 독야마랑을 쓰레기처럼 내던진 강엽이 몸을 돌렸다.

    요사스러운 혈광을 내뿜는 눈동자가 어둠 속을 꿰뚫어본다.

    “봤지?”

    “.......”

    구릿빛 근육을 지닌 이족 사내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 자루 철창을 치켜들었다.

    “나, 난 혈교의 적이 아니다.”

    “네가 누군데?”

    “...적마표. 강호 친구들은 날 적마표라 부른다.”

    “적마표라....”

    강엽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이 적마표라는 상대는 흡혈하는 것을 보고 강엽을 혈교도라고 착각한 모양.

    독야마랑이 교령의 상징으로 찼던 완장은 찢겨졌으니 피아를 헷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강엽이 정색하고 물었다.

    “혈교의 적이 아니란 건 뭔 의미지? 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거냐?”

    “무, 무림맹을 치는 동안 일시적으로 손을 잡기로 했으니까... 왜 그런 걸 묻는 거냐? 너도 혈교라면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내가 안쪽에 있어서 몰랐거든. 그래, 그랬단 말이지. 목적은 역시 흑룡교의 유산인가?”

    “...그렇다. 단혼마백은 우리와 약속했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만 않으면 나눠줄 것이다.”

    “흠, 그래?”

    과연 단혼마백이 흑룡교의 유산을 남겨줄까.

    차라리 장기말로 써먹고 버린다면 몰라도 순순히 나눠줄 것 같진 않았지만 강엽은 말을 삼켰다.

    혈교와 손을 잡은 무림인들이 그걸 몰라서 그런 약속을 한 것은 아닐 테니까.

    설령 단혼마백이 말을 바꾸어도 똘똘 뭉친다면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누가 손을 잡았지?”

    “꽤 많다. 도비사음, 동정귀옹, 황충팔객... 모두 교령에 버금가는 자들이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단혼마백도 무시하지 못할 거다.”

    “널 빼면 열 명이군.”

    낭인전으로 비유하면 은천패급 고수가 열 명이나 혈교와 손을 잡은 셈이었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맙다.”

    “...?”

    적마표의 얼굴에 짙은 의구심이 어렸다.

    강엽이 계속 다가왔기 때문.

    “잠깐, 오지 마라. 다가오면 아무리 혈교라도...!”

    적마표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투앙!

    암신을 펼치며 쇄도한 강엽이 강렬한 권격 경파를 내쏜 것이다.

    철창을 휘둘러 막았음에도 창자루를 타고 흐른 암경이 손목을 찌르르 울렸다.

    “큭, 대체 왜...!”

    “속여서 미안한걸. 사실 난 혈교도가 아니야.”

    “뭐라고!”

    “덕분에 잘 들었다. 딱히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으로 만났으니 어쩔 수 없군.”

    철창을 튕기듯이 쳐올린 강엽이 몸을 반전시키면서 벼락같이 발검했다.

    쓰아왁!

    “...!”

    호신기를 찢어발기는 검격. 경악으로 눈을 홉뜬 적마표를 향해 강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절정고수를 두 명이나 흡혈한 적은 없었지. 간만에 포식하겠어.”

    단순히 흡혈욕을 달래기 위해서만 피를 마신 것은 아니다. 고수의 피를 마실수록 감각이 예민해진다.

    복잡하게 변화하는 기관진식 속에서 홀연히 사라진 옥좌를 찾고, 나아가 술법진을 풀기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더욱 기감을 갈고 닦아야만 한다.

    “잘 가라.”

    뚜둑!

    * * *

    백서희는 쌍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으휴, 징글징글한 놈들.”

    끊임없이 움직였던 기관진식이 귀주오살의 합격진을 망가뜨린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귀주오살 중의 맏이인 일살은 백여 초를 겨룬 뒤에야 가까스로 쓰러트렸다.

    일살이 딛고 선 발판이 벌어지는 바람에 놈의 주의력이 흐려진 틈을 노린 게 주효했다.

    만약 시기적절하게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싸움이 좀 더 길어지거나 패했을지도 몰랐다.

    ‘그 녀석은 뭐... 알아서 잘 싸우겠지.’

    상대가 독야마랑이라지만 강엽이 패배하는 그림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물론 상대는 흑접주도 인정한 고수인 만큼 결과를 섣불리 예단할 순 없지만, 무공에서 뒤쳐진다고 해도 강엽에겐 재생력이 있지 않나.

    “오히려 내 코가 석 자인걸.”

    그때였다.

    “윽.”

    문득 백서희는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잡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시야가 변한다.

    눈살을 찌푸린 백서희는 어느덧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좁고 어두운 통로 대신 사방이 탁 트인 거대한 광장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이건...?”

    그녀는 하늘 위에 떠 있었다.

    그렇다고 아득한 창공을 노니는 것은 아니다. 광장을 메꾼 사람들의 얼굴 정도는 또렷이 보였으니까.

    먹구름이 낀 밤하늘 아래 흑건을 쓴 수만 명의 무인들이 빼곡하게 선 채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흑룡교 천세! 천세! 천천세!

    하나같이 시커먼 무복을 입은 자들.

    그들의 함성으로 깨달았다.

    ‘흑룡교...!’

    아직 흑룡교가 온전히 성세를 구가하던 시절임을.

    -교주시여!

    -용혈(龍血)의 신인이시여!

    교도들이 열광적으로 연호하는 자.

    금룡이 새겨진 화려한 흑색 용포를 걸친 자가 단상에 올라가는 순간 교도들의 함성은 절정에 달했다.

    오직 황상만이 입을 수 있는 용포를 걸친 흑룡교주와 그를 보필하는 아홉 명의 호법들.

    이윽고 흑룡교주가 손을 들고서야 함성도 천천히 잦아들면서 광장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수천 명의 교도들이 흑룡교주만을 앙망한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백서희는 왠지 모를 섬뜩한 감각에 사로잡혔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흑룡교주가 입을 열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

    -하늘이 인간을 버려 재해가 끊이지 않고, 땅은 말라서 먹을 것이 나지 않는다.

    -그래, 천하 만민이 고통받고 있지.

    -하지만 위정자들은 제 뱃속을 불리는 데만 혈안이 됐고, 무림인이란 족속들은 쌀 한 톨을 위해 민초들을 해치는 풍조가 만연해졌다.

    -지주들은 가난한 농민들의 고혈을 쥐어 짜고, 농민들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자식들을 팔고 있지.

    -이게 과연 누구의 잘못이냐.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않는다.

    흑룡교주의 연설에 몰입한 채 눈을 부릅뜰 뿐.

    -천하의 법도가 무너졌다.

    -우리는 천하의 법도를 바로세울 것이다. 부자와 빈자의 경계를 허물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를 허물어서! 그리하여 이 땅에 지상낙원을 만들리라!

    -모든 중생들을 정토(淨土)로 인도하리라! 모든 중생들은 흑룡의 정토에서 복락을 누리리라!

    교도들의 표정이 전율에 휩싸이는 순간, 흑룡교주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본 교주는 성전을 선포하겠노라!

    -와아아아아아아!

    강호 무림을 향한 선전포고가 아니다.

    천하의 질서를 부정하고, 그들만의 독선적인 교리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성전.

    그리하여 흑룡교는 스스로 마(魔)가 되어 천하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백서희는 그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고.

    -왔구나.

    흑룡교주가 그녀를 보고 말을 걸었을 때는 온몸의 피가 싸늘히 마르는 충격을 맛봤다.

    -내 마지막 후손이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