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개 (8)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안쪽에서 싸움이 벌어질 무렵, 바깥쪽에서는 두 세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호천단주 팽관후를 주축으로 하는 쉰 명의 귀주 무림인들과 단혼마백이 지휘하는 혈교.
선두에 선 팽관후가 중얼거렸다.
“혈귀놈들을 이토록 많이 본 건 처음이군.”
전면전을 걸었던 흑룡교와는 달리 기이한 사술과 약으로 교세를 넓혔던 혈교였다.
무림맹과 황실이 몇 년간 대대적으로 토벌전을 펼치고 나서야 간신히 사그라들었다.
그 후로 간혹 출몰한 적은 있어도, 대대적으로 분탕질을 친 적은 없었건만.
‘교성이 있다고 했던가.’
입구에서 재회한 운가장주.
그의 말에 의하면 놈들 중에 교성이 있었다.
“누군지 알 것 같군.”
오 척 단신의 통통한 노인네.
외양도 볼품없고 강렬한 기도를 흘리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살벌한 기세를 내뿜는 혈교도들 가운데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후개, 저 노인네가 누군지 알겠는가?”
일찌감치 합류해서 전령 노릇을 한 후개였다.
곰곰이 노인을 훑어본 후개가 뭔가 깨달았는지 살집에 파묻힌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설마?”
“아는 자인가?”
“그, 글쎄요. 안다고 해야 할지.... 저도 처음 보긴 하는데... 아무래도 단혼마백 같습니다.”
“단혼마백?”
팽관후가 흠칫했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온 귀주성의 무림인들도 웅성거렸다.
“단혼마백이라면 석년에 남궁세가의 창룡대(蒼龍隊)를 궤멸시킨 노마두가 아닌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과거 금패급의 낭인도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소.”
“형산파의 장문지재를 격살한 일화도 유명하지요. 그 사건이 형산파의 쇠락으로 이어졌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사건들.
단혼마백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도 주변의 말을 듣고 아연해졌다.
비교적 침착한 것은 팽관후와 야차마곤, 그리고 함께 온 전강뿐.
“허어, 늙은 마구니가 명줄도 길군.”
야차마곤이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반면 전강은 딱딱해진 얼굴로 단혼마백을 바라봤다.
“노부의 정체를 알아맞히다니 제법 눈썰미가 있구나. 뚱뚱한 거지놈아, 네놈이 개방의 후개렷다?”
“하, 하하... 말학 후배가 노선배의 심기를 어지럽혔나 봅니다?”
식은땀을 소나기처럼 쏟아내면서도 속을 긁으려는 듯 몹시 비아냥거리는 말투.
단혼마백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끌끌, 노선배라.... 노부가 용두방주와 비슷한 배분임은 알고 지껄이는 것이냐?”
“사부님께 들었습지요. 두 분이 석년에 생사결을 벌이셨다구요.”
비단 후개가 단혼마백을 단번에 알아본 것은 그의 특징적인 체구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부이자 개방의 용두방주인 만리독행개가 젊은 시절 단혼마백과 겨루었던 일화를 들은 덕이었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공물이랍시고 수백 명이나 죽인 천하의 개쌍놈을 어르신이나 노사라고 부를 순 없지 않습니까? 후배딴엔 노선배로 타협을 보는 것이니 양해해주십쇼.”
“빌어먹을 거지 새끼가 감히-!”
분개한 것은 단혼마백을 호종하는 교령이었다.
“이교의 죄인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네놈의 목을 잘라다 개봉까지 보내야겠다.”
개봉은 개방 총타가 자리한 곳.
후개의 목을 사부인 개방주에게 보내겠다는 엄포였다.
“해볼 수 있으면 해봐라, 마교의 잡졸놈아.”
“이런 시건방진...!”
“그만.”
단혼마백이 소매를 올리자 교령이 입을 다물었다.
긴장했으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는 후개의 당돌함에 단혼마백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맹랑하구나. 왕년의 네 사부처럼 말이다. 주제도 모르고 망둥이처럼 날뛰는 꼴이 꼭 닮았어.”
“본디 거지가 입도 놀리지 못하면 굶어죽는 법.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뜨는 게 거지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목이 잘리고도 입을 놀릴 수 있는지 두고 보마.”
결국 이래나 저래나 목을 잘라서 개방주에게 보내겠다는 뜻.
단혼마백은 후개가 입을 털 시간을 주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노부를 알아본 건 칭찬해주마. 하나 그 숫자로 본교에 맞서겠다는 건 너무 꿈이 큰 게 아니냐?”
“노선배, 싸움은 머릿수로만 하는 게 아니외다. 게다가 노선배도 아끼는 부하를 잃지 않았소? 우릴 비웃을 처지는 아닌 걸로 아오만.”
후개 대신 나선 팽관후의 말.
단혼마백이 혀를 찼다.
“도망친 쥐새끼들이 알려줬나 보군.”
“나와 야차마곤이라면 노선배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귀교(貴敎)와 달리 우린 정예 무인들만 왔으니 숫적 우세쯤은 능히 뒤집을 수 있을 터.”
“허세부리지 말거라. 본교와 달리 너희는 술법진에 저항하는 능력이 없을진대.”
석조건물 내부는 안개에 휩싸이지 않았으나 정신을 좀먹는 술법진의 효능은 더욱 강력했다.
비교적 성취가 낮은 자들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으로 얼굴이 마를 날이 없을 지경.
적들의 면면을 쭉 둘러본 단혼마백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음험하게 웃었다.
“자, 이쯤 되면 인사는 충분히 나눈 것 같은데... 숨어있는 자들도 나오시는 게 어떤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
주변을 슥 훑은 단혼마백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
“나오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할 것인즉.”
“후훗, 마백 어르신은 못 속이겠군요.”
간드러진 교성과 함께 등에 비파를 멘 궁장 여인이 등장하자 귀주성의 무림인들이 긴장했다.
여인을 알아본 후개가 목구멍을 쥐어짰다.
“설마 도비사음(桃琵死音)...!”
호광에서 활동하는 음공 고수였다.
백도의 무림인을 죽인 적은 없지만 손속이 잔혹해서 정사지간으로 분류되는 여인.
그녀가 단혼마백과 팽관후를 향해 연이어 포권했다.
“명성 자자한 단혼마백 어르신과 하북팽가의 비호탈명 팽 대협을 뵈어 영광이에요.”
“도비사음! 귀하 같은 고수가 이런 험지엔 어인 일로 온 것이오?”
돌려 말하고 있지만 너도 흑룡교의 유산을 탐내서 이런 곳에 왔냐는 힐난이었다.
도비사음의 볼우물에 보조개가 피어났다.
“흑룡교는 여러 무공들에 조예가 깊었지요. 이만한 규모라면 비급 한둘쯤 없겠어요?”
“갈! 흑룡교의 마공을 탐하는 요녀로구나!”
야차마곤이 대갈일성을 터뜨렸지만 도비사음은 깔끔히 무시하고 단혼마백을 돌아봤다.
“어르신, 소녀가 바라는 건 오직 음공뿐이에요.”
“도비사음이라고 했느냐?”
“작은 허명일 뿐이지요.”
“아니, 보자마자 알겠구나. 네 연배에 그만한 성취를 이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호호, 어르신께서 그리 칭찬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쉽게도 흑룡교의 비고를 아직 찾진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확실하지. 어쩌면 그 안에 흑룡교의 음공이 있을지도.”
“역시 그렇군요.”
“하나 없을 수도 있는 일. 해서 노부가 한 가지 제안을 하마.”
“세이경청하겠습니다.”
“본교에 들어오는 것은 어떠하냐? 본교 역시 음공에 일가를 이룬 무맥이 있다.”
“혈음요종(血音妖宗)!”
“네가 원한다면 혈음요종의 공부를 익힐 수 있도록 노부가 힘써주마. 네 무위라면 교령 자리는 충분히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가로 어르신을 도와드려야겠군요.”
“그게 인지상정 아니겠느냐?”
비단 무림맹 때문이 아니라도 도비사음 같은 고수가 혈교에 귀의한다면 큰 힘이 되리라.
눈앞에서 일어나는 작태에 팽관후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외쳤다.
“노선배, 제정신이 아니구려! 무림맹이 빤히 보고 있는데 입교를 권유하다니...!”
하지만 도비사음은 진정으로 고민하는 눈치였다.
“...만약 소녀가 거절하면 어찌하실 건가요?”
“아무것도. 하나 너 역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지. 그러니 빨리 결정하길 바란다.”
단혼마백이 시선을 멀리 향하며 말했다.
“너무 늦으면 콩고물도 주워 먹지 못할 테니까.”
“하핫! 그건 우리더러 하는 말이겠지?”
불청객은 도비사음만이 아니다.
일단의 인영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도 있었고, 도비사음처럼 독보강호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팽 단주님!”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오!”
이제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내뿜는 무리들.
야차마곤이 이를 뿌득 갈았다.
“모두 흑룡교의 사술을 탐하는 마구니들이구나!”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팽관후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무공 비급이나 영약을 위해 사지를 뛰어드는 게 무림인이란 족속들의 본성이 아니던가.
순찰조까지 돌리며 술법진 외곽을 감시해도 그 넓은 범위를 전부 틀어막기는 불가능했다.
“혈교가 외곽을 들쑤셔준 덕분에 들어오기 쉬웠지.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각 지역에서 나름의 명성을 떨치는 자들이었다.
“폭산호부(暴山虎斧), 동정귀옹(洞庭鬼翁), 황충팔객(蝗蟲八客), 적마표(赤魔彪)... 켁, 녹림채의 두목에 동정호의 물귀신까지 죄다 몰려왔잖아?”
후개의 입을 통해 불청객들의 별호를 들은 호천단의 무인들과 귀주성의 무림인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 도비사음 못지않은 절정고수였던 것이다.
단혼마백이 동정귀옹을 돌아봤다.
“흠, 자네까지 왔을 줄은 몰랐구만.”
낚싯대를 든 호리호리한 초로인이 방립을 살짝 들어올리며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 오랜만이외다.”
“평생을 동정호에서 안빈낙도하며 지낼 것 같은 자네도 흑룡교의 유산을 탐내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흑룡교이지 않소. 이런 기회 흔치 않소이다.”
“본교에 귀의할 생각은 없나?”
“어디 들어가는 건 내키지 않아서 말이오. 하나 잠시 손을 잡을 수는 있을 것 같소만.”
“무림맹과 손을 잡지 않고?”
“허허, 저 고집쟁이들이 흑룡교의 유산을 나눠줄 리가 있나. 마백께서 명예를 걸고 약속하신다면 이 육 모가 최선을 다해 돕겠소.”
“약속하겠네.”
다른 고수들도 협력을 약속하자 중간에 낀 무림맹과 귀주성의 무림인들만 곤혹스러워졌다.
그들이 무림맹의 정예이자 귀주성을 대표하는 무림인이라 해도 불청객들이 혈교의 편을 든다면 완벽히 열세인 것이다.
팽관후가 동정귀옹을 노려봤다.
“후환이 두렵지 않으시오?”
“현명한 자라면 대세를 읽을 줄 알아야지.”
비단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단지 흑룡교의 유산이 탐나서 혈교의 편에 선 것은 아니다.
단혼마백의 존재만으로도 혈교가 우세하다고 판단해서 강자에게 줄을 대는 것.
“여, 역시 이런 곳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젠장, 지금 그런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오! 호랑이굴에 들어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자들도, 애써 용기를 낸 자들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자리가 묫자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선두에 선 팽관후가 단혼마백을 노려보며 도파를 잡고, 야차마곤은 전강과 밀담을 나누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이 우형과 팽 단주가 단혼마백을 감당하겠네. 사제는 다른 마구니들을 맡아주게.]
[제가 단혼마백을 맡겠습니다.]
[자네 혼자선 무리야!]
[아닙니다.]
우물처럼 깊고 그윽한 동공에서 금광이 번뜩이자 야차마곤은 한순간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고 깜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전음을 한다는 것도 깜빡했다.
“사, 사제! 자네 설마...!”
동문으로 함께했을 때 두 사람 사이의 무공 격차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전강의 경지는 사형인 야차마곤을 초월했다.
그동안 야차마곤이 낭인전의 낭인으로 일하며 숱한 실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강이 짧게 웃으며 걸음을 뗐다.
[운이 좋았습니다.]
우우우우웅...!
옅은 금색의 기파가 물결처럼 퍼져나가자 무림맹과 귀주성의 무림인들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반대로 동정귀옹을 비롯한 불청객들은 오싹함을 느꼈다.
팽관휘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은....”
그는 전강의 정체를 몰랐다. 야차마곤이 오랜만에 만난 사제라면서 데려왔을 뿐.
하지만 전강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힘을 숨기고 계셨소?”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미안하오.”
포권이 아니라 불가의 반장(半掌)을 한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단혼마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인이 숨어 있었군.”
“사실 웬만하면 나서고 싶지 않았소. 이미 반쯤은 무림을 떠난 몸이니까....”
만약 무림맹의 전력만으로 혈교를 제압할 수 있다면 굳이 기세를 드러내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단혼마백의 존재와 불청객들의 개입이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한 가지만 물읍시다. 혹시 귀교의 교령을 죽인 사람을 만나봤소?”
“음, 너희들 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단혼마백이 반문하자 전강이 엷게 웃었다.
“그렇구려. 당신은 실수했소. 우릴 맞이할 게 아니라 술법진의 중심부를 지켰어야 했소.”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쿠아아아아아앙!
넓은 공동을 흔들어대는 무지막지한 충격파.
안색이 변한 단혼마백이 고개를 홱 틀었다.
반면 전강은 안쪽의 소란에 강엽이 깊게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그 친구가 성공했군.”
“아까 느낀 기척이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단혼마백이 아연해하며 몸을 날리려는 순간, 전강의 기세가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이놈이...!”
“미안하지만 가게 놔둘 순 없어서.”
말은 그렇게 해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단혼마백의 노안에 서릿발 같은 노기가 서렸다.
“네놈이 감히...!”
“혈교와는 악연이 많소.”
쿠웅! 쿠그그그긍...!
진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야말로 진짜 시작이라는 듯이 벽이 움직이고 땅바닥이 꺼지는 등 격변을 거듭한다.
그것은 전강도, 단혼마백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흑룡교의 술법진이 폭주하자 숨겨져 있던 기관진식이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서로에게만 집중했던 두 사람은 다른 곳엔 일절 시선을 주지 않았다.
“...네놈은 뭐냐? 너와 같은 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거늘.”
“아니, 당신은 들어봤을 것이오. 지금은 잊혀졌지만, 한때는 ‘우리’야말로 혈교의 가장 큰 적이었으니.”
“우리? 설마...!”
바위같은 근육질 거구에 아른거리는 금색 서광.
순간 단혼마백의 머릿속에서 십수 년 전 혈교를 쳐죽인 악귀나찰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외소림(外少林)...!”
사마외도의 무리를 멸하기 위해 탄생한 소림의 암검들.
태산북두 소림의 정종신공을 익혔으나 살계를 저버린 아라한이 세월을 뛰어넘어 현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