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개 (7)
강엽의 표정이 굳어졌다.
노인은 백서희의 기파가 흐트러진 찰나를 포착, 그 위치를 특정해 두 사람이 있는 곳을 찔렀다.
한 치만 꺾였다면 빗나가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천운이 따랐어.’
대전을 가득 채운 사악한 기운.
타인의 기척을 감지하는 기감에 잡음이 낄 정도로 강렬한 마기가 영향을 끼친 것이리라.
하나 두 번의 기적을 기대할 순 없다.
[지금부턴 전음도 쓰지 마.]
“....”
백서희는 감히 고갯짓도 하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강엽이 암신을 쓰는 것은 봤어도 함께 어둠 속에 녹아든 것은 처음이었다.
‘...색깔이 사라진 것 같아.’
주변의 사물들이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풍경.
그렇기에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가능해? 아무리 은신술이 뛰어나도 그렇지, 다른 사람까지 숨겨준다고?’
은신술은 여러 가지가 수반된다.
지형지물은 물론이고 시선과 호흡, 심박까지 통제하는 기술 위에 성립하는 기예.
그녀가 익힌 무영환살공은 공력의 운용까지 더해 존재감을 극도로 낮춘다.
하지만 그걸로는 강엽처럼 다른 사람의 모습까지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영환살공은 물론, 그녀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은신술도 이런 공능을 구사할 순 없었다.
‘차라리 진법이라면 모를까....’
기실 암신은 무공도, 진법도 아니지만 백서희가 거기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나 혈교의 교성이 그들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안고 만약을 대비할 뿐.
강엽은 강엽대로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서 은밀히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삼가 교성께 보고 올립니다! 적들이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흑포를 입은 혈령교위가 대전에 들어오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수의 예를 갖추었다.
노인의 허연 눈썹이 씰룩거렸다.
“무림맹이더냐?”
“그렇습니다. 호천단주 팽관후가 낭인전 및 귀주성의 무림인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흠, 그래. 기어이 왔군....”
자글자글한 눈매를 찡그린 노인이 팔 자로 휘어진 콧수염을 어루만지면서 불쾌감을 표했다.
“머릿수가 많진 않겠지. 낭인전에 귀주 무림을 탈탈 긁어모았어도 이 안갯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놈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야.”
호심의 술법으로 흑룡교의 진법을 방비할 수 있는 혈교와는 입장이 달랐다.
“강호 제일의 진법가라 불리는 제갈세가의 가주가 현신한다면 모를까, 평범한 진법가 한둘로 어찌할 수 있는 술법진이 아니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노인은 부복한 채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 혈령교위에게 말했다.
“네놈은 나가서 독야마랑(獨野魔狼)을 들라 하거라.”
“존명!”
반 각이 지나기도 전에 반백의 초로인이 다섯 명의 혈령교위들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허리가 꼿꼿하고 탄탄한 체구를 지녔는데, 왼쪽 눈에 안대를 찼기 때문에 한쪽 눈만 예리하게 번들거렸다.
그는 부복은 하지 않되 포권을 올려 상전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무림맹이 왔다고 들었네만.”
“예. 쥐새끼들을 추적하던 중에 적들이 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농가에 숨어있던 놈들 말이군. 잡았나?”
“놓쳤습니다. 무림맹이 쥐새끼들을 비호하는 바람에 더는 쫓지 못했습니다.”
“쯧.”
노인이 마뜩찮아하자 독야마랑을 비롯한 혈령교위들이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놓친 건 어쩔 수 없지. 노부가 가볼 테니 자넨 여길 지켜주게. 그럴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적들이 우리가 모르는 경로로 침투할지도 모르니 만약을 대비하도 싶구만.”
“소인 혼자 말입니까?”
“자네 부하들도 있지 않나. 불만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교성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독야마랑의 얼굴에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올랐지만 노인은 매몰차게 나가버렸다.
* * *
노인을 호종하는 교도들까지 모습을 감추자 독야마랑을 따르는 혈령교위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젠장,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요. 공을 쌓을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단혼마백(斷魂魔伯) 그 작자가 그렇지요. 제 식구만 아끼기로 정평이 난 인사 아닙니까?”
“필시 사부님을 견제하는 겁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인사라고 백안시하는 게지요.”
독야마랑을 따르는 혈령교위들은 그의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때 독야마랑이 가장 먼저 불만을 터뜨린 제자의 귓방망이를 대뜸 후려갈겼다.
짜악-!
생각지도 못한 손찌검에 맞은 제자는 물론 다른 제자들의 얼굴까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사, 사부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여기가 어디 우리만 있는 곳이라더냐?”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술사들.
다들 구슬땀을 흘리며 진언을 외우는 데 여념이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제서야 독야마랑의 제자들도 실책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송구합니다. 저희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명심하거라. 아무리 네놈들이라도 이 사부의 얼굴에 먹칠을 하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
짧게 경고를 남긴 독야마랑은 제자들을 입구에 배치하고 그 자신은 술사들의 지척에서 대기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강엽이 물었다.
[독야마랑이 누구지?]
단혼마백이라 불린 노인이 독야마랑을 불렀을 때 백서희의 손가락이 움찔 떨린 것이다.
[이제 얘기해도 돼?]
[기파만 조심한다면.]
단혼마백이 떠났어도 허리에 두른 손을 풀진 않았다.
뒤늦게 강엽의 손길을 의식한 백서희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마냥 벌게졌지만 암신의 공능을 실감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도, 독야마랑은 귀주에서 활동한 해결사야.]
[해결사라고?]
[돈이면 뭐든 다 해. 청부살인을 하는 낭인이라고 생각하면 돼. 보아하니 혈교에 투신해서 교령 자리를 꿰찬 것 같은데.]
[아하.]
당연하지만 모든 낭인들이 낭인전 소속은 아니다.
청부살인을 금하는 낭왕삼칙에 반감을 가진 부류들은 개별적으로 의뢰를 받아 활동하고 있었다.
[독야마랑은 살수로서도 일류야. 우리 윗대가리들도 독야마랑의 실력은 인정했거든.]
[그런 것 같군.]
놀랍게도 독야마랑은 중단전을 개척한 고수였다.
같은 교령의 신분임에도 강엽의 손에 죽은 자보다 확연히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다.
[독야마랑의 제자들은?]
[귀주오살. 사부 못지않게 악독한 놈들이야. 흑도의 해결사 출신인데 독야마랑이 거뒀어.]
[귀주오살이라....]
강엽은 몰랐지만 귀주오살과 싸울 뻔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 태화문의 조영옥이 개최한 비무대회에서 우승하고 영약을 받아갔을 때, 귀주오살도 숙정방의 소방주처럼 그를 쫓았던 것이다.
결국 강엽을 놓치는 바람에 중도에 포기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할 거야?]
[친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시간이 문제네. 무림맹이 그 땅딸보 노인네를 감당할 수 있을까? 망할 안개 때문에 숫자도 많지 않을 텐데.]
[...한 명은 감당할 수 있을 거다.]
전강이 제 실력을 드러낸다면 무림맹을 쉽게 몰살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술법을 자세히 살필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간다!’
백서희의 허리에서 손을 떼자마자 독야마랑을 향해 짓쳐들었다.
“헛!”
독야마랑은 감각적인 고수였다.
어둠과 한 몸이 된 강엽을 발견하진 못해도 기민하게 대처했다.
쐐애애액!
한 줄기 빛살이 허공을 관통한다.
싸늘한 검격이 한껏 비틀린 어깨 삼각근을 한 끗 차이로 스치는 찰나, 독야마랑이 검을 역수로 바꿔 잡고 다시 한번 휘둘렀다.
강엽을 시야에 두지 않고도 행동 반경을 내다본 것이다.
강엽은 그 신속함에 탄복하면서도 짓쳐들어오는 칼날을 자성검으로 막아섰다.
칼날이 얽히며 노란 불티가 튀자 자연스레 암신이 풀려나면서 강엽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제서야 강엽의 얼굴을 본 독야마랑이 외안을 치켜뜨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입구는 분명 철통같이 방비했거늘....”
“철통은 무슨. 내가 보기엔 너희들 모두 눈뜬 장님이었다.”
도발을 당한 독야마랑의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카악!”
“막내야!”
무방비하게 당한 막내의 모습에 귀주오살 전원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날카로운 흉기에 당한 오살이 눈을 부릅뜬 채 목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경동맥이 잘린 목은 피분수를 울컥 내뿜을 뿐.
어차피 죽을 목숨인 오살을 내버려둔 백서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삼살을 향해 달려갔다.
“이 개 같은 년이!”
격분한 삼살이 검을 휘두르고, 이살과 사살이 차례차레 합류해서 백서희를 삼면에서 둘러싼다.
백서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끄러지듯 삼살의 검을 피하고는 다리를 걸어버렸다.
삼살이 다리를 빼려고 했지만 그녀가 조금 더 빨랐다. 깊게 들어간 족격이 발목을 걷어찬 것.
“큽!”
답답한 신음을 흘린 삼살이 휘청거리자 사살이 부축했다.
이살이 일갈했다.
“죽엇!”
무릎을 튕기며 일어난 백서희는 이살의 검을 양팔의 은혼사로 받아냈다.
터무니없는 짓이었지만 은혼사의 탄성이 말도 안 되는 묘기를 가능케 했다. 경호성을 뱉은 이살을 쳐낸 백서희는 귀신같이 배후를 점하고 목에 은혼사를 걸었다.
올가미에 걸린 이살이 창백해졌다.
“아, 안 돼...!”
“돼.”
썩둑 잘려나가는 이살의 목.
백서희는 피분수를 맞기도 전에 삼살과 사살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일살이 그녀를 막아섰다.
“네년의 사지를 찢어주마!”
일살의 무공은 귀주오살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흑접으로 치면 한 자릿수의 실력.
“칫.”
백서희도 경시하지 못하고 쌍검으로 응수했다.
카카카카카캉!
짧은 시간 수십여 합의 공방을 나눈 두 사람.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귀주오살의 두 사람도 서둘러 합공을 퍼부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하지만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이 합공을 방해했다.
“저, 저거...!”
이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비단 그만 동요한 게 아니라 일살과 사살도 턱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사부인 독야마랑이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 * *
“이런 찢어죽일...!”
독야마랑이 어금니를 갈았다.
일찌감치 중단전을 개척한 그는 강엽이 죽인 교령보다 명백히 몇 수 위의 고수였다.
하지만 막상 강엽과 싸우자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오히려 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놈, 술사들 쪽으로 싸움을 유도하고 있다!’
술사들을 잃는다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어진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하다못해 단혼마백이 돌아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할 터.
촤악!
독야마랑이 주춤한 틈을 타서 하박의 살점을 한 움큼 뜯어낸 강엽이 비아냥거렸다.
“지켜야 할 게 많으니 곤란하지?”
“큭, 비겁한 놈이!”
“마교도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한데? 적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 아닌가?”
물론 강엽은 적의 약점을 물고 뜯는 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술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노골적으로 경파를 쏟아부어 독야마랑의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독야마랑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강엽을 멀리 떨어트려놔야 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몰아붙일 때마다 강엽이 암신을 펼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다.
그리고 역으로 허점을 비집고 들어온다.
타당!
작게 원을 그린 양손이 검면을 후려쳐 타점을 흐트러뜨리자 독야마랑이 호목을 부릅떴다.
불티처럼 튄 경파가 술사들을 향해 튀었던 것이다.
다행히 경파는 술사들을 덮치지 못하고 투명한 힘에 막혔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태극반의 한 수로 의표를 찌른 강엽이 혀를 찼다.
‘하긴. 무방비하게 둘 리가 없지.’
공방의 주도권은 잡았지만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상황이 바뀌면 지금의 유리함도 뒤바뀔 테니까.
그리고 가장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우우우웅...!
크게 준동하는 술법진의 마기.
칠흑처럼 시커먼 마기에 핏빛의 기운이 섞이면서 염료를 섞은 것마냥 검붉게 변하고 있었다.
강엽과 독야마랑은 물론 멀리 있던 백서희와 귀주오살도 깜짝 놀라서 싸움을 멈추었다.
독야마랑이 환희로 소리쳤다.
“오오, 드디어 술법이...!”
혈교의 술사들이 흑룡교의 술법진을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강엽이 눈매를 좁혔다.
“아직이다.”
“뭣이?”
“흑룡교가 각별히 신경 써서 만든 술법진이다. 그렇게 쉽게 파훼되진 않겠지.”
“어이가 없군. 네놈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보이거든.”
싸움에 비유하면 한 방 얻어맞았을 뿐.
술법진의 마기는 외부의 침입에 격노한 것처럼 붉은 혈기를 매섭게 잡아먹기 시작했다.
“커억!”
“이, 이런...!”
독야마랑의 안색이 누렇게 떴다.
술사 한 명이 울긋불긋 핏줄이 치솟더니 피를 토했던 것이다.
그를 시작으로 혈교의 술사들이 차례차례 무너졌다.
쿠구구구구궁......!
용틀임을 하듯 요동치는 흑운(黑雲).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일대를 강타하며 동심원처럼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