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개 (6)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곳.
야명주가 달린 지하실과는 달리 비밀통로엔 어두컴컴한 암흑천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놈의 흑룡교는 왜 이리 지하를 좋아하는 건지.”
흑접주와 싸운 장소도 지하였다.
그때를 떠올리며 이놈들이야말로 어둠의 자식이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린 강엽은, 마침 백서희가 침을 꼴딱 삼키는 소릴 듣고 실소했다.
“쫄았나?”
“흥, 쫄긴 누가 쫄았다고.”
담담한 척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걱정, 두려움, 분노... 그 모든 감정들이 한데 어우러져 어지럽게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도 아니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흑룡교와 자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테지.
지금까지 알아낸 것과 추측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쉽지만 강엽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임을 확인한 다음에 알려줄 생각이었다.
“가자고.”
“응.”
복도가 넓진 않았기에 강엽이 전위를 맡고 백서희가 후위를 맡는 모양새가 되었다.
탈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벽에서 화살이 쏘아지거나 땅바닥이 꺼지는 등 쓸데없는 기관진식이 작동하진 않았다.
문득 백서희가 물었다.
“그런데 넌 왜 온 거야?”
처음엔 의뢰 때문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개인적인 볼일로 온 것 같달까.
“흑무암쇄진이 있을지도 몰라서.”
“아, 그러고 보니 전에도 물어봤었지.”
강엽에게 패해 사로잡혔을 때 흑무암쇄진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심문당했던 것이다.
“혹시 흑접을 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겸사겸사였지.”
이번엔 정말 흑무암쇄진만 찾기 위해 온 것이다.
중간에 혈교가 난입하는 바람에 일진이 꼬이긴 했지만 말이다.
“왜 찾는지 물어봐도 돼?”
“아니.”
강엽의 목소리가 워낙 단호했는지라 백서희는 더는 묻지 않았다.
내심 비싸게 군다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술법진에 대해서 얼마나 알지?”
“흑무암쇄진? 아니면....”
“우리 위에 있는 것 말이야.”
“잘 알진 못해. 흑접에서도 술법진은 좀 봤지만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이야.”
옥좌에 앉아야만 술법진이 사라진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
물론 그 대가는 술법진에 사로잡힌 사람들 전부의 목숨이기 때문에 그 선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렀다.
강엽이 물었다.
“다른 사람이 앉으면 어떻게 될까?”
백서희 본인이 싫어서 거부했다고 쳐도 혈교의 교성까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글쎄, 잘 모르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백서희도 확신하지 못했기에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녀가 거부했다고 다른 사람이 냉큼 그 자리를 차지하진 못할 것이다. 혈교가 중심부에 들어가고도 한참을 끙끙거리는 걸 보면 확실했다.
강엽은 상념에 잠겼다.
‘문제는 그녀가 죽는 경우겠지.’
흑룡교주의 마지막 핏줄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
과연 그때도 술법진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것인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주인이 없으니 아무나 옥좌에 앉아 술법진의 혜택을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술법진이 폭주하는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할 터.
그렇게 한참을 나아간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나가는 출구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막다른 석벽이지만 기관으로 열 수 있었다.
백서희가 미간을 찡그렸다.
“나가자마자 혈귀놈들 마주치면 재수 없는데.”
석벽이 두껍기 때문에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벽돌 중 하나를 지긋이 누르자 앞을 가로막은 석벽이 그르릉 소리를 내며 반쯤 회전했다.
“.......”
건너편은 좌우로 길쭉한 통로였다.
틈새로 나온 두 사람은 경악으로 턱을 다물지 못하는 교도들을 발견하고 시선을 빠르게 교환했다.
눈빛만으로 어떻게 움직임을 가져갈지 의견을 나눈 것.
“치, 침입...!”
경호성을 발하기도 전에 비호처럼 달려드는 두 사람이었다.
강엽은 호각을 들어올린 자의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곡지혈을 찔린 교도는 온몸을 마비시키는 저릿저릿한 충격에 호각을 놔버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호각을 낚아챈 강엽이 놈의 목을 붙잡고 가볍게 부러뜨렸다.
우두둑!
“켁!”
강엽이 한 사람을 상대하는 동안 백서희는 비수를 날려 두 명의 교도를 한꺼번에 꿰뚫었다. 목구멍이 뚫린 교도들이 즉사했다.
마지막 남은 교도가 눈을 부릅떴다.
“너는...!”
세 번이나 싸웠기 때문인지 백서희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아봤을 땐 이미 백서희가 면전까지 쇄도한 뒤였다. 칼날이 절반쯤 빠져나오기 전에 백서희가 그의 목에 다리를 걸고 몸으로 휘감아버렸다.
균형을 잃은 교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땅바닥이 뒤통수에 닿기 직전이었다.
쿵!
“꺼어...!”
머리가 깨진 마지막 교도를 뒤로한 백서희가 손바닥을 툭툭 털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훗, 봤지? 내가 더 많이 쓰러트렸어.”
“그놈들 더 많이 쓰러트려서 뭐하려고.”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혀를 내두른 강엽이 반쯤 열린 석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거 다시 닫을 수 있나?”
“어디 보자. 이쪽 벽돌을 눌러서 여닫는 것 같아.”
“좋아. 그럼 이놈들 숨기자고.”
괜히 시체를 남겨둬서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시체들을 건너편으로 옮긴 뒤 석벽의 벽돌을 누르자 반쯤 열려있던 문이 다시 닫혔다.
강엽은 꽉 다물린 이음매를 보며 감탄했다.
‘공기도 안 새는군.’
기관이 작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이런 데 문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겠지.
강엽은 초음의 파동을 뿌려서 일대의 구조를 샅샅이 훑어 머릿속에 정리했다.
“음, 길이 어디더라... 잠깐만 기다려 봐.”
“대충 알 것 같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걸음을 옮긴다.
강엽이 선뜻 나설 줄은 몰랐던 백서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나도 여긴 처음인데 어떻게?”
“널 찾았던 감으로.”
“...거참 편리한 감이네.”
“요긴하게 써먹고 있지.”
내부의 구조는 미로처럼 복잡했지만 지속적으로 초음을 통해서 길을 찾은 강엽이었다.
백서희는 그의 뒤를 따르면서도 가끔씩 갈림길을 마주칠 때마다 경계심을 돋웠다.
“혈귀놈들 또 있어?”
“이 주변엔 없어.”
만약 가까이에 있다면 초음으로 내부 구조를 살필 때 같이 걸려들었을 터였다.
“아깐 운이 없었지. 순찰을 다니는 놈들 같은데... 혈교도 머릿수가 넉넉하진 않을 테니 중요한 곳만 지킬 거다. 정문에 많이 배치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음, 그놈들이 무림맹과 충돌할까?”
“할 거야.”
서로의 목적이 상충하는 이상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강엽은 일전에 살폈던 군영을 떠올렸다.
“병력은 무림맹이 많지만 안개를 돌파할 수 있는 고수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는데....”
무림맹 호천단뿐만 아니라 귀주의 무림인들까지 모였기에 머릿수는 천 단위에 달했다.
하지만 태반이 술법에 저항할 힘이 없으니 어느 정도 검증된 고수들만 대동하리라.
강엽의 설명을 들은 백서희는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혈귀놈들은 혈령교위는 물론 평교도들까지 데려왔잖아?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술법으로 대응했을 거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술법엔 술법으로 대응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러는 넌 어때?”
과연 백서희도 술법의 영향을 받았을까?
“음, 그게... 난 아무렇지 않아.”
백서희가 겸연쩍어했다.
목소리에 홀려 안갯속에 들어오긴 했지만, 남들처럼 술법의 영향을 받진 않았던 것이다.
‘하긴 술법의 수혜자가 제물들처럼 이지를 잃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렇게 한참을 나아갔을 때, 불현듯 무언가를 감지한 강엽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은밀한 눈빛을 보냈다.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제법 많은 숫자가.
각자 은신술을 펼친 두 사람이 기척과 숨소리를 죽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 * *
그곳은 커다란 석실이었다.
규모만 보면 가히 대전(大殿)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당한 곳을 찾아 숨은 강엽은 붉은 법복을 입은 술사들이 진언을 외우는 광경에서 낯익음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과거 모산혈조를 따랐던 모산파의 술사들도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교성인가?’
화려한 비단 장삼을 걸친 오척 단신의 노인.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구부정해졌다기보다는 원래부터 단신을 타고난 듯했다. 몸집도 통통해서 얼핏 보면 무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강엽은 노인의 몸에서 숨막히는 존재감을 감지하고 눈매를 가늘게 떴다.
‘축기량은 나와 맞먹는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삼화취정....’
전강처럼 찬란하지는 않으나, 노인 역시 상중하 삼단전이 공명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백서희 역시 노인의 기도를 알아차린 듯 움츠러들었지만 애써 두려움을 떨치며 강엽을 툭 건드렸다.
[저게 옥좌야.]
은어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아홉 개의 계단 위에 왕후장상이나 앉을 법한 크고 아름다운 옥좌가 놓여 있었다.
등받이와 팔걸이 등에 용머리가 달린 옥좌 위로 시커먼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하늘을 향해 오르는 동안 점점 색이 옅어진 연기는 이내 사각추(四角錐, 피라미드)의 뾰족한 천장으로 빨려들어갔고, 작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떻게 멈출 방법이 없을까?]
[모르겠군. 좀 더 가까이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미쳤어? 그럼 들킬 거야!]
지금도 아슬아슬한데 더 가까이 다가가면 들킬 게 불보듯 뻔했다.
그때였다.
“으음?”
별안간 노인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는 게 아닌가?
‘들켰어!’
백서희의 낯빛이 해쓱해졌다.
강엽의 눈빛도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들킨 건 아니야.’
암신을 펼쳤을 때 전강도 강엽을 바로 찾진 못했다.
하물며 지금은 옥좌의 기운이 공간을 잠식하다시피 가득 채웠기에 작정하고 숨는다면 찾기 어려웠다.
‘백서희의 기파가 잠시 흔들렸다. 그걸 느낀 거겠지.’
새삼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초고수의 기감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너희 둘, 노부를 따라오거라.”
혈령교위 두 명을 지목한 노인이 명아주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걸어왔다.
자신의 느낌이 순간의 착각인지 진짜인지 몸소 확인하려는 것이다.
‘윗대가리가 성실하게 일하지 마! 이런 일은 아랫놈들한테 시키라고!’
백서희는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게 이러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때 몸에 닿는 촉감에 본능적으로 흠칫한 그녀는 그것이 강엽의 손길임을 깨달았다.
여태껏 따로 은신술을 펼친 강엽이 그녀를 뒤에서 껴안은 채 어둠 속에 녹아든 것이다.
“흠....”
이윽고 두 사람이 숨은 곳으로 온 노인이 허연 수염을 쓸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호종하는 혈령교위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아무래도 노부의 착각이었나 보구나. 흑룡교의 술법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야.”
그 말을 한 직후 빛살이 번쩍이더니 명아주 지팡이가 허공을 꿰뚫었다.
‘이런 미친!’
명아주 지팡이가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가자 백서희는 심장이 철렁했다.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면 헛숨을 들이켰으리라.
그 와중에도 강엽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노인을 노려봤다.
어둠 속에 숨은 강엽과 노인의 눈이 일순간 마주쳤지만 노인은 바로 앞에 있는 강엽을 알아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