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13화 (113/450)
  • 18화. 안개 (5)

    강엽은 추측을 섣불리 늘어놓지 않았다.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말하려면 먼저 흑접주의 일기를 보여줘야 하는데, 백서희가 받을 충격은 둘째치고 지금은 일기가 수중에 없기 때문에 보여줄 수가 없었다.

    ‘내 생각이 정답이라는 법도 없고.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지하의 어둠 속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누구냐?”

    낮은 목소리가 그들을 제지했다.

    “나야.”

    “아, 백 소저였군. 근데... 한 명이 더 있는 것 같은데.”

    그늘진 구석에 숨어있는 자.

    빼꼼 모습을 드러낸 봉두난발의 사내가 강엽을 향해 경계 어린 시선을 던졌다.

    “누군지 알고 데려온 거요?”

    “믿어도 돼. 나랑 같이 일...해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는 사람이야.”

    백서희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일전의 흑접 토벌을 두고 같이 일해봤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 않나.

    강엽을 위아래로 훑어본 사내가 떨떠름하게 물러났다.

    “뭐... 그렇다면야. 백 소저의 지인이라면 믿을 만하겠지. 반갑소, 상추영이라고 하오.”

    “강엽이오.”

    대충 포권을 나누자 백서희가 소개했다.

    “그는 마을 주민이야.”

    “무림인이?”

    초음으로 살펴본 결과 상추영의 단전에 깃든 공력은 사십 년을 헤아렸다.

    이제까지 만난 강자들과 비교해보면 대단한 축기량은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산골 마을의 주민이 이만큼 내공을 쌓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엄밀히 말해서 마을 주민은 아니오. 사부님과 함께 마을에서 좀 떨어진 오두막에서 살았었으니까. 사부님은 이 년 전에 작고하셨지만....”

    “은거기인의 제자다?”

    “은거기인은 너무 과분한 칭찬인데. 속세를 등진 사람답게 괴팍한 노인네이긴 했지.”

    킬킬거리며 웃은 상추영이 돌연 무언가 떠올렸는지 아차 했다.

    “내 정신 좀 보게. 운가장주는 방금 운기에 들었소.”

    “깨어나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그렇겠지. 한번 운기하면 서너 시진은 걸리니까. 그러게 왜 무모한 짓을 해가지고....”

    “자식들이 위험에 처했잖아. 자식을 살리기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게 부모인걸.”

    강엽은 하필이면 백서희가 그 말을 했다는 게 꽤 역설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친부인 흑접주는 자식들을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았나.

    이어 상추영이 강엽에 대해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내자 백서희가 살짝 눈치를 살폈다.

    [말해줘도 돼?]

    [일일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

    재생력에 대한 것만 숨기면 된다.

    허락을 받은 백서희가 말했다.

    “강엽은 낭인전 소속이야.”

    “낭인전? 천하팔존인 낭왕이 만들었다는 낭인전 말이오?”

    “그 낭인전 맞아.”

    백서희가 재차 확인시켜주자 상추영이 신기해했다.

    “낭인전에 대해선 사부님께 들어봤소. 예전에 그쪽 일을 몇 번 하셨다고 하던데.”

    “선사께서 낭인전 소속이셨소?”

    “후후, 그건 잘 모르겠소. 당신의 과거에 대해선 말을 아꼈던 분이라서.”

    잘 나가던 낭인도 자기 일에 염증을 느껴서 때려치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추영의 스승도 그런 부류가 아니었을까.

    ‘겉으로 보기엔 수상쩍은 낌새는 없는데....’

    상추영이 은연중 흘리는 기도는 지극히 평범했다.

    불문이나 도가의 공력처럼 정순하진 않으나 사마외도처럼 사특하지도 않다. 적당히 때가 묻고 얼룩진 속세의 범부 같은 느낌.

    “혹시 마을 근처에 흑룡교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소?”

    “없소. 내가 알기로 바깥 마을은 사십여 년 전에 화전민들이 일구었소. 초목을 불태워 논밭을 만들었지. 세월이 지나 사람이 늘어나서 마을이 되었고.”

    하필이면 마을을 일군 곳이 마교의 비밀 분타 옆이었으니 옴팡지게 재수가 없었다.

    “나도 자다가 횡액을 맞았소.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사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하산했을 텐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한동안 벌레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던 상추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바깥 소식은 좀 아시오? 운가장주의 말씀으론 무림맹도 왔다고 하던데.”

    “무림맹도 혈교가 왔다는 건 알고 있소.”

    혈교가 흑룡교의 유산을 홀라당 가로채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무림맹도 서두르리라.

    “하지만 교성의 존재까지는 모를 수도.”

    그 말에 백서희와 상추영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교성이라고?”

    “음?”

    강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마치 교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듣는 반응 같지 않은가?

    “혈사교령이 죽기 전에 교성이 자기 복수를 해줄 거라고 하던데. 몰랐나?”

    “습격받을 땐 몰랐어. 그 뒤에 충돌했을 때도 듣지 못했고. 교령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백서희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당연하지만 교령과 교성의 무게감은 전혀 다르다.

    일대일이라면 그녀도 교령과 싸워볼 만했다. 그렇기에 일대일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잡힐 위험을 감수하고 적들의 머릿수를 줄여나갔던 것이다.

    “관건은 시간이군. 적들이 옥좌에 있다고 했지?”

    “어.”

    “뭘 하는지는 알고?”

    “음, 그, 글쎄....”

    상추영을 힐끔거리면서 말끝을 흐리더니 전음으로 대답했다.

    [내 생각이긴 한데... 술법진을 가로채려는 게 아닐까 싶어.]

    목소리가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아무 증거도 없는 직감에 불과할 뿐.

    하지만 백서희는 자신의 답에 강한 믿음을 갖고 강엽을 응시했다.

    “좋아. 최악을 가정해야겠지.”

    어차피 흑무암쇄진을 손에 넣는 것과 별개로 혈교는 언젠가 맞부딪쳐야 할 적이었다.

    술법진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때를 대비하면 놈들의 힘을 깎아두는 게 좋으리라.

    “혈사교령이 죽었으니 놈들도 경계를 강화할 거다. 돌파하는 게 쉽진 않을 거야.”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무림맹이 오기 전에 놈들이 일을 끝내버린다면 그땐 돌이키지 못해.”

    강엽도 우려한 일이었다.

    무림맹이 정예들만 꾸려서 온다고 해도 안개를 통과하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릴 터.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었다.

    “무, 무얼 하려고? 설마 우리끼리 놈들 소굴에 들어가자는 거요?”

    “아니.”

    강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추영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만 들어갈 것이오.”

    “...?!”

    상추영이 미친놈처럼 쳐다봐도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들킨다면 그때 가서 판단할 일.

    지금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술법진의 중심부로 가서 파훼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봐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놈들이 어느 정도 진척을 이루었는지라도 파악해야 하고.

    그렇게 말하려는데 별안간 백서희가 나섰다.

    “잠깐! 나도 가겠어!”

    “넌 또 왜?”

    “혈귀놈들에게 한방 먹여주고 싶으니까. 그놈들이 뜻을 이루길 놔둘 수는 없잖아.”

    혈교가 뜻을 이룬다는 것은 술법진 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죽는 것을 의미했다.

    거기까지 들은 강엽은 얼떨떨한 표정이 됐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비록 곡절이 있었다지만 그녀는 전직 살수였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어떤 사람이든 죽였던 냉정한 살수. 한데 인명을 구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다.

    백서희가 픽 웃었다.

    “왜, 나 같은 년은 사람들 구하면 안 돼?”

    “그건 아니지.”

    “...뭐, 나도 인제 와서 양심 있는 척하는 게 가증스럽다는 걸 모르진 않아. 그래도....”

    물론 사람들이 술법진의 제물로 전락한 게 백서희의 잘못은 아니다.

    우연히 근처에서 살았거나 길을 지났다는 이유로 부조리한 운명에 휩쓸렸을 뿐.

    하나 이 사태의 당사자로서 이 일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난 더 이상 살수가 아니야.”

    급작스러운 과거 고백에 상추영이 흠칫 놀랐지만, 백서희는 눈꼬리를 치켜뜬 채 강엽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니 윗대가리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돼.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움직일 거야.”

    “....”

    “불만 있어?”

    안 된다고 하면 들이받을 것 같은 되바라진 기세에 강엽은 픽 웃고 말았다.

    “각오는 됐겠지?”

    “그걸 말이라고. 나만 믿어.”

    백서희가 가슴을 콩콩 치며 씩 웃었다.

    아술법진의 중심부로 향하는 길은 며칠이나마 일찍 들어온 그녀가 강엽보다 훨씬 빠삭한 것이다.

    * * *

    운가장주는 예순을 바라보는 초로의 나이였다.

    운기조식으로 원기를 돋웠음에도 그의 안색은 원래 나이보다 십 년은 늙은 것처럼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자식들을 구하지 못하고 가문의 무사들마저 잃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강엽과 백서희에게 그동안 일어난 일과 계획을 듣는 동안 그의 표정은 수시로 변했다.

    그리고 중심부에 잠입하겠다는 말로 끝냈을 땐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둘이서만 가겠다니....”

    하나 운가장주가 역시 자신들이 따라가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관운장처럼 복부까지 내려오는 회색 수염을 쓸어내린 그가 무겁게 탄식했다.

    “젊은 친구들에게만 맡기려니 면목이 없구만.”

    “대신 두 분은 따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운가장주의 연배가 연배인 만큼 백서희도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그게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면 무림맹이 올 거예요. 그들에게 여기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세요.”

    물론 후개를 전령으로 보내긴 했다. 하지만 후개는 교성의 존재나 술법진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알겠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운가장주가 힘차게 대답했다.

    백서희가 부탁한 일은 한 문파의 수장이 하기엔 너무나 하찮은 일이다. 그러나 자식들과 부하들을 구할 수 있다면 뭔들 못하랴.

    그때 상추영이 물었다.

    “굳이 두 명이나 무림맹을 기다릴 필요가 있소?”

    “번갈아가면서 호법을 서야 할 거 아냐.”

    “아, 그렇구려. 한 사람만 있으면 제때 말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한창 운기하고 있을 때 무림맹이 찾아온다면 바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운기조식을 한다면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리라.

    상추영을 납득시킨 백서희가 강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가면 우리도 움직여야 해.”

    “방법이 있나?”

    “잠입해야지.”

    뒷말은 육성으로 내뱉지 않았다.

    [다른 비밀통로가 있어. 그걸 이용하면 중심부까지 단번에 뚫고 갈 수 있을 거야.]

    * * *

    교령의 죽음이 위기감을 부추겼는지 혈교도들은 두 사람을 찾겠다고 어슬렁거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거대한 구조물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사방을 둘러싼 다른 전각들과 달리 사각뿔 모양의 계단식 석조 건물의 형상을 한 게, 얼핏 보면 돌무덤을 연상시켰다.

    “여기가 술법진의 중심부야.”

    “과연.”

    강엽은 겉면을 이룬 대리석을 만져보고 눈을 반개했다.

    술법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게 안개가 이 건물을 통해 현현하고 있는 듯했다.

    “문제는 혈교인데... 교령이 죽어서 그런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

    혈교도들로 득실거렸던 거리가 텅텅 비어버렸기에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온 두 사람이었다.

    “둔한 놈들이라도 명색이 그만한 놈이 죽었는데 경각심을 가졌겠지. 곧 있으면 올 무림맹을 경계해서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혈교는 안에서 농성전을 할 결심을 굳힌 것이리라.

    적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곳에 돌격할 이유는 없었다.

    “비밀통로는?”

    “여기야.”

    목소리가 알려주는 데로 따라가는지라 약간 헷갈렸지만 다행히 크게 헤매지 않고 찾아낼 수 있었다.

    마을이 면한 산에서도 한참 깊숙한 곳.

    무성한 수풀을 싹 치워버리자 쇠로 만든 둥근 문이 나타났다.

    “우리가 이용해서 좋긴 한데 왜 이런 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네.”

    “용도가 좀 다른 게 아닐까?”

    “무슨 말이야?”

    “안쪽으로 가려고 만든 게 아니라 바깥으로 가려고 만든 거지.”

    쉽게 말하면 탈출로였다.

    반란이 일어나거나 적들이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한 것이리라.

    “아마 우리가 숨은 그곳도 원래는 탈출이 실패했을 경우를 위해 준비한 안가일 거다.”

    “나참, 마교 아니랄까 봐 규모가 다르네. 이게 일개 분타라고?”

    “아니, 그건....”

    “...?”

    백서희가 돌아보자 강엽은 얼버무렸다.

    “...얼른 내려가자.”

    “실없기는. 나 먼저 갈 테니까 따라와!”

    대답도 듣지 않고 대뜸 떨어진다.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을 향해 몸을 날린 백서희의 모습에 강엽은 왠지 입맛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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