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미행 (5)
“허억!”
불현듯 눈을 뜬 종 무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부러진 팔뿐만 아니라 온몸이 쑤시는 탓에 몸을 일으키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마는 열로 뜨거웠고 등 뒤는 땀으로 축축했다.
그래도 억지로 상반신을 일으켜서 주변을 둘러보자 칠흑 같은 어둠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명암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는...?’
그가 있던 작업장은 아니었다. 그곳엔 창문도 없고, 원목을 깐 바닥도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깼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왜 이제야 알아차린 것일까?
“너!”
차가운 인상의 흑포 청년이 의자에 앉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종 무인의 안색이 한겨울 얼음 호수에 빠진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삭신을 쑤시는 고통마저 잊을 만큼 충격에 빠져서 말을 더듬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백장귀(白匠鬼)는? 백장귀는 어떻게 된 거냐?”
그와 함께 싸웠던 괴인. 아랫것들은 백공 또는 어르신이라고 불렀지만, 진짜 별호는 백장귀였다.
강엽이 실소했다.
“본인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텐데. 이름 종극. 나이는 서른여덟. 섬서성 작수(柞水) 태생. 맞나?”
“...!”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냈냐는 경악 어린 시선.
한심하단 얼굴로 종극을 내려다본 강엽이 둥그런 동패를 던졌다.
“숨겨야 할 짓을 할 거면 호패는 떼놓고 다녀라.”
“....”
할 말이 궁해진 종극을 내려다본 강엽은 코웃음을 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종극이 주저하며 물었다.
“...여긴 어디냐?”
“중경.”
강엽이 창문을 가리켰다. 하현달이 걸린 밤하늘 아래 장강의 검은 물결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야경을 보고 있던 종극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으름장을 놨다.
“실수한 거다.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느냐?”
“이상명. 장안대상회의 대공자.”
“...!”
“그것도 모르고 일을 벌였으려고.”
“그걸 알면서 어찌?”
“장안대상회. 대단하긴 하지. 천하십대상회에 들어가는 굴지의 대상단이니.”
본디 진상(晋商)에 근본을 둔 장안대상회는 염업으로 섬서의 상계를 평정하여 거만의 부를 이뤘다.
이젠 섬서를 넘어 강북 전역은 물론 대파산맥 너머의 사천땅에도 조금씩 세를 확장하는 지경.
그런 대상단의 후계자가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놓고 어찌 이렇게 태연한 걸까?
강엽이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근데 장안대상회는 멀고 난 가깝지 않나?”
“큭큭, 어리석은 놈. 내가 입을 열 것 같으냐? 백날 고문해봐라. 내 입이 열리는지.”
“그래?”
강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에 차가운 손길을 닿는 것을 느낀 종극은 본능적으로 눈매를 파르르 떨었지만, 절대 굴종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두렵긴 한가 본데. 그런데도 침묵을 택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가족인가?”
“크억!”
어깨 위 견정혈(肩井穴)을 지긋이 누르자 종극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러나 부상당한 몸으로는 흡혈귀의 악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깨에서 손을 뗀 강엽이 작게 뇌까렸다.
“입을 나불대면 가족이 다칠까 봐 두렵나 보군.”
“.......”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
끝까지 입을 다문다면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겠지만, 입을 열면 가족들이 화를 입는다.
“근데 당신 가족이 정말로 안전할까?”
“무, 무슨 소리냐?”
“발품 좀 팔면 당신 가족이 사는 곳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은데.”
“이런 비겁한 놈! 네놈이 그러고도 무인이냐!”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제 상전의 취미를 위해 죄없는 여자들을 잡아다 인형으로 만든 놈이.”
“그건 내가 아니라 백장귀가 한 짓이다!”
“어쨌든 당신도 일조했잖나. 대공자의 명령으로 자금을 전달했을 텐데?”
“...!”
“그 돈으로 흑도 패거리를 고용했을 테고.”
죽은 백장귀도 대공자를 자금줄로 삼아 거래를 해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대공자가 직접 돈을 전달했을 리는 없으니 필시 그의 심복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을 터.
“사실 입을 열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뭐라고?”
“당신을 천금상단(天金商團)에 넘길 거거든.”
천금상단은 사천을 대표하는 대상단. 장안대상회의 사천 진출을 가장 극심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천금상단은 나쁠 거 없지. 장안대상회의 대공자가 사천에서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다고 소문을 내면 사천 민심이 들끓을 테니까. 이걸 빌미로 장안대상회를 협박해서 양보를 받아낼 수도 있겠군.”
“....”
그 말에 종극은 강엽이 천금상단의 사주를 받고 작업장을 급습했다고 생각했다. 영문은 몰라도 천금상단에서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게 분명했다.
“웃기지 마라! 장안대상회가 인정할 리가 없어!”
“인정하지 않겠지. 하지만 증거가 있다면? 흑접의 장부에 장안대상회 대공자의 이름이 있다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뭣이!?”
“정체를 숨겼어도 소용없어. 흑접은 섭혼술로 의뢰인의 정체를 알아내거든.”
그 말에 종극은 흑접에 의뢰를 하러 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설마 그때!’
종극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정신이 몽롱해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땐 별거 아니라고 넘겼었는데....
“호오, 표정을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나 본데. 당신이 직접 의뢰를 하러 갔던 모양이지?”
“...네놈은 그걸 어찌 아는 거냐? 살수놈들이 장부를 만들었다는 걸 어찌!”
“실제로 봤으니까.”
“뭐?”
“흑접을 토벌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
“네놈이 누구길래?”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쯤 했으면 증언은 충분할 텐데.”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이 드르륵 열렸다. 지금껏 벽인 줄 알았던 것은 기실 공간 사이를 나누는 칸막이였던 것이다.
백색 장삼을 입은 훤칠한 미공자와 매부리코 노인이 등장하자 종극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이공자님, 당신이 대체 왜 여기에...!”
“사업차 성도에 들른 참이었소.”
장안대상회의 이공자 이정명. 그와 호위로 붙은 매부리코 노인은 착잡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형님이 그런 악취미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소. 한 집에 살면서도 너무 몰랐군.”
이상명은 특출난 구석은 없되 딱히 하자도 없는 착실한 후계자였다. 설마 미녀의 시체를 박제로 만드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 이공자님! 제가 다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종극의 낯빛에서 핏기가 가셨다.
장안대상회의 이공자 앞에서 죄를 시인했으니 빼도 박도 할 수 없었다.
“닥쳐라, 이놈!”
격분한 매부리코 노인이 벼락같이 출수했다.
카앙!
“어허, 증인을 죽이면 쓰나.”
노인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자성검에 막혔다.
졸지에 정수리가 쪼개질 뻔한 종극은 덜덜 떨었고, 매부리코 노인은 눈을 부릅뜬 채 외쳤다.
“자성검...!”
매부리코 노인은 강엽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그가 자성검을 가졌다는 것까진 까맣게 몰랐다.
“허튼 짓을 하면 증거인멸 시도로 간주하지. 그땐 노인장이라고 봐주진 않겠소.”
“하룻강아지놈이 감히....”
노인이 노기를 토하든 말든 강엽은 이정명만 바라봤다.
“이래도 부정하진 않겠지?”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것은 사원루주의 공이었다.
강엽이 종극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도에 머물고 있는 이정명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사원루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기에 이정명은 증거를 요구했다.
그리고 사원루주는 두 사람을 사원루에 초청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겼고....
‘이놈은 우리가 있는 것도 모르고 증언을 지껄였지.’
이정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노인이 종극을 죽이려 한 까닭은 대공자의 비리가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된다는 경각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엽이 증거인멸을 그대로 내버려둘 리가 만무.
‘천금상단을 들먹인 것도 그래서일 테고.’
흑접의 장부와 종극만 있으면 대공자는 끝장이었다. 이 사실이 소문나면 실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단에서 내쫓기리라.
‘내 입장에선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하지만 상단이 평지풍파에 휩싸이는 것은 원치 않는다.
대공자는 조용히 몰락해야 한다.
“화노(和老).”
“으음!”
매부리코 노인, 화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검을 거두었다.
이정명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저질렀소. 화노께서 성정이 급하셔서 실수하셨을 뿐. 증거를 인멸하겠다는 뜻은 전혀 없었소이다.”
강엽은 퍽이나 그러겠다는 듯이 피식거렸지만 그 이상 딴죽을 걸진 않았다.
“내가 동아줄을 줬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는데.”
“알고 있소. 나 역시 형님의 비리를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이, 이공자님!”
종극이 애타게 불렀지만 이정명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일단 형님 때문에 피해를 본 여인에게 사과하고 싶소.”
* * *
잠시 후 홍가려가 들어왔다. 주변이 환해지는 아름다움을 접한 이정명과 화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중경제일미이자 사천삼미라더니 과연....’
그 역시 동년배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아름다운 사람을 여럿 봤지만 홍가려 같은 미녀는 처음이었다.
홍가려는 홍가려대로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홍가려라고 합니다. 저를 부르셨다고요.”
“그렇소. 형님 문제를 처리하기 전에 소저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전 사과가 필요 없어요.”
쌀쌀맞은 말투에 화노가 매부리코를 찌푸렸지만, 이공자는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소저가 원하는 건 형님의 처벌이겠지. 형님이 어찌 되기를 바라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그가 죽기를 바란다면 죽일 건가요?”
“계집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화노가 이글거리는 눈길로 쏘아보자 홍가려의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렸다.
강엽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못할 말은 한 건 아니지.”
“무어라?”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이 업보를 되돌려받기를 바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아니면 그쪽 대공자가 얼마나 큰 죄를 짓든 처벌하지 말라는 건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화노!”
이정명이 일갈하자 화노가 끄응 신음하며 물러났다.
이정명이 홍가려를 돌아봤다.
“강 무사의 말이 맞소. 형님은 죄를 졌소. 대상단의 후계자라고 피할 순 없을 터. 하나 형님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시오.”
“그럼 이 문답에 무슨 의미가 있죠?”
“소저의 말씀을 아버지께 전해드리겠소.”
이정명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상회주에게 전달하는 것.
홍가려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문을 열었다.
“...대공자가 제대로 처벌받기를 원합니다. 그로 인해 죽었던 여인들을 위해서라도.”
“으음.”
이정명이 침음했다. 홍가려 이전에도 많은 여인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알겠소. 형님의 죄는 과감없이 보고하겠소. 또한 형님의 욕심으로 희생된 여인들을 반드시 찾아내서 예우를 다해 장사지낼 것이오.”
그건 대공자의 죄를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약속이었다.
홍가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다른 건 필요치 않으시오?”
“저는 괜찮아요. 그런 게 있다면 강 무사님께 드리세요. 고생은 저분이 다 했으니까요.”
“...그러리다.”
“그럼.”
홍가려가 차갑게 돌아서자 이정명은 씁쓸해하며 강엽을 돌아봤다.
“그쪽은 원하는 게 있으시오?”
“글쎄.”
강엽도 대답하기 애매했다.
물질적인 보상을 챙겨도 괜찮겠지만....
“장안대상회가 암시장을 굴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소?”
“홍가려가 말해줬소. 초대장도 받았고.”
붉은 비단봉투에 담긴 초대장을 내밀자 이정명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엄밀히 말하면 장안대상회가 암시장을 주관하진 않소. 우리는 지분만 가졌을 뿐이오.”
“주관하는 세력은 따로 있다?”
“그보단 여러 세력이 출자한 형태에 가깝소. 천금상단도 있고, 태화문도 있지. 그들이 지명한 대리인이 암시장을 주관하고 있소.”
“태화문이라....”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이야. 강엽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이정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암시장은 한중(漢中)에 있소. 상시적으로 열리지만, 가장 큰 지하 경매는 매달 보름에 열리고.”
“암시장은 경매장 아래에 있다고 들었는데. 경매장이 또 있는 거요?”
“지상의 경매장은 위장이오. 정말 귀한 물건들은 지하 경매장에 있소.”
“그렇군.”
“형님이 실각하면 그 초대장도 의미가 없을 터. 암시장에 가고 싶다면 내 따로 초대장을 주겠소.”
“부탁하겠소.”
이 달 보름은 지났으니 다음 달은 되어야 가볼 수 있으리라.
‘그동안은 수련이나 해야 하나?’
청송객잔도 요즘은 대형 의뢰가 없으니 흑접주의 비고로 가서 수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머릿속으로 짠 수련 계획이 무색하게도, 얼마 뒤 강엽을 찾는 서찰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