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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104화 (104/450)
  • 16화. 미행 (4)

    강엽은 지체하지 않았다.

    스가악!

    마음이 동한 순간, 핏빛 궤적들이 일당을 누비고 지나친다.

    “크악!”

    “뭐, 뭐야!?”

    살과 뼈가 갈라지고 피가 튄다.

    미처 강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자들에겐 날벼락이 떨어진 격.

    “침착해라! 누군지 몰라도... 컥!”

    부하들을 독려한 장년인은 정작 배후의 기습을 대비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뒤통수가 붙잡힌 채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널브러진 장년인의 동공은 풀린 듯이 공허했다.

    “형님!”

    “이 새끼가!”

    분개하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강엽은 그곳에 없었다.

    “아악!”

    소리 없이 배후에 침투해서 손톱을 휘두르고 무릎을 때려 균형을 무너뜨린다.

    손날을 얻어맞은 어깻죽지가 박살나고, 팔꿈치를 얻어맞은 안면부가 움푹 함몰된다.

    순식간에 장년인 일당이 정리되자 백발의 괴인과 종 무인은 어정쩡하게 굳어져버렸다.

    상대의 빈틈을 놓칠 강엽이 아니었다.

    “건방진 놈!”

    자신이 표적이 됐음을 알아차린 종 무인이 노호를 토하며 발검했다.

    빛살같은 쾌검이 목줄기를 노려온다.

    하지만 초감각을 쓰고 있는 강엽은 그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을 쥔 오른손의 완맥을 금나수로 제압하고....

    ‘일단 죽지 않을 만큼만 세게 한 방.’

    내가중수의 이치를 담은 일권을 복부에 꽂는다.

    터엉!

    “...!”

    통렬한 한 방을 내장으로 받아낸 종 무인의 안색이 하얗게 굳어졌다.

    믿었던 호신기는 어처구니없이 뚫린 상황.

    ‘이게 무슨...!’

    어금니를 꽉 깨물고 무릎 슬격을 올려쳤으나 강엽 역시 똑같이 받아치고 그를 벽으로 밑어붙였다.

    우드득!

    “끄악!”

    완맥을 잡힌 손목이 뚝 분질러진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절했을 격통 속에서도 종 무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목구멍을 쥐어짰다.

    “도, 도와주시오!”

    백발의 괴인이 마뜩찮은 얼굴로 두 팔을 걷어올렸다.

    딱히 종 무인에게 동료의식을 갖고 있진 않지만, 기습을 가할 절호의 기회임은 알고 있는 것.

    훤히 드러난 등을 향해 지풍을 내쏘는 찰나, 강엽은 종 무인의 팔을 놓고 태극반을 휘감았다.

    탕! 투앙!

    넓게 퍼진 태극반에 걸려 살짝 꺾인 지풍.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어도 주의를 돌리는 데는 성공했다.

    “이봐! 약한 친구를 괴롭히면 쓰나!”

    별 미친 소리를 늘어놓으며 대겸(大鎌)을 휘두른다.

    강엽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터졌다.

    -휘리릭!

    “컥...!”

    “으음!”

    괴인이 살짝 휘청이는 틈을 타서 종 무인의 수혈을 짚는다.

    놈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에야 강엽은 괴인에게 온전히 신경을 집중했다.

    괴인이 하얀 눈썹을 잘게 찌푸렸다.

    “뭐야? 아까 저놈들은 신나게 썰어놓고선 왜 그놈만 살려주는데?”

    “알아서 알아봐라.”

    무공으로 보나 장년인의 언행으로 보나 종 무인이란 자는 대공자의 심복이 분명했다.

    만약 그가 장안대상회 내부에도 익히 알려진 존재라면 살아있는 증거인 셈.

    그 행동에서 무언가 떠올린 듯 괴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너, 혹시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는 거냐?”

    “....”

    “하긴 대답은 안 들어도 뻔한가? 여기가 우연히 올 곳은 아니니까.”

    괴인이 단단히 글러먹었다고 구시렁거렸지만 의외로 낭패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보란 듯이 팔을 좌우로 벌리고 의기양양해했다.

    “둘러봐라. 아름답지 않나?”

    생전의 모습을 간직한 군상들.

    웃거나 울거나 화를 내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생동감은커녕 부자연스러움만 느껴진다.

    그러나 괴인은 진심으로 뿌듯해하고 있었다.

    “사람은 백 년도 못 살고 죽지만 내 작품들은 영원하지. 그야말로 불멸의 대작이란 말씀이야.”

    “미친놈.”

    욕을 먹었는데도 괴인은 낄낄거렸다.

    “하하핫! 세상사 불광불득(不狂不得) 아니겠나. 미치지 않고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을.”

    “그래서 장안대상회 대공자에게 협력했나?”

    “그 친구 취미가 나랑 비슷하거든. 알고 보니 미녀의 시체를 박제하는 취미가 있더라고. 아무래도 안정적으로 작품을 만들려면 후원자가 있는 편이 낫지.”

    “...사대마교냐?”

    “뭐? 하핫, 아니야. 세상 모든 마인이 사대마교 소속도 아니고. 나 같이 독보강호하는 마인들도 꽤 많지.”

    “어쨌든 마인은 맞다는 거군.”

    “이런 짓을 하는 게 마인이 아니면 뭐겠나. 너도 기파가 꽤 요사한데 나랑 비슷한 부류 아닌가?”

    “너 따위랑 동류 취급 받고 싶진 않은데.”

    “슬픈걸. 간만에 동류를 만나서 서로의 마(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건만. 결국 죽고 죽여야 하는 운명인가... 참 유감이다!”

    쐐애애애액!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발을 흩날리며 대겸을 휘두른다.

    강엽은 암신을 펼쳐 빠져나갔다.

    “흐흐, 뭣 같은 은신술이야. 하지만 소용없다!”

    기감을 갈고 닦는 비술이라도 익힌 건지 괴인은 어지간해선 허상에 속지 않았다. 다만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건 아닌지 정확히 포착하진 못했다.

    “아까 피냄새는 네놈이 풍겼지? 환취(幻臭)로 느껴질 만큼 강렬한 기운... 예술이야! 널 잡아서 박제로 만들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만 해도 짜릿한걸!”

    콰콰콰콰쾅!

    대겸을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경파가 주변을 휩쓸어버린다.

    사방에 전시해둔 인간 박제들이 썩둑썩둑 잘려나가는 광경에 강엽은 인상을 썼다.

    홍가려가 들어간 관짝에 닿는다면 어찌 될지는 불보듯 뻔한 일.

    ‘삼초식 안에 끝낸다.’

    어둠 속에 녹아들면서 화살처럼 쏘아진다.

    백발의 괴인이 이죽거렸다.

    “오냐! 내 그럴 줄 알았다!”

    강엽에게 남은 수는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밖에 없었다.

    강엽의 기감을 대략적으로나마 감지한 괴인은 대겸의 막대를 뚝 떼어버렸다. 언제든지 분리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든 것이다.

    상대가 반드시 약점을 노릴 거라 믿고 역으로 의표를 찌르는 수법.

    촤아아악!

    위에서 찍어버리는 대겸을 몸을 던져 피한다.

    땅바닥을 파고든 겸기(鎌氣)를 흘려버리며 괴인의 발을 걸어버리는 찰나, 괴인이 훌쩍 뛰어올랐다.

    직후 곡괭이로 암벽을 내리찍는 듯한 겸격이 떨어졌다.

    퍼엉!

    한천최심장의 장력이 겸격을 맞고 폭발하는 사이 강엽이 손톱을 휘둘렀다.

    회심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걸 깨달은 괴인은 반발력을 역이용해 팽이처럼 휘돌았다.

    경력이 맞부딪친 첨단에서 벼락같은 불꽃이 일어났다.

    “꽤 하는군! 종가놈을 두들겨팼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하잖아!”

    괴인이 히죽거린 순간이었다.

    ‘지금.’

    강엽은 숨겨뒀던 필살의 수를 꺼내들었다.

    자세를 낮추고 검파를 쥔다. 하체를 단단히 지탱하고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내뿜은 찰나.

    서걱-!

    폭발하듯 격발한 자색 섬광이 괴인의 몸통을 갈라버린다.

    “...엇?”

    멍청하게 입을 뻐끔거리는 순간, 오른쪽 옆구리에서 왼쪽 어깨까지 길쭉한 혈선이 그어진다.

    그 앞엔 은은한 자색 신광을 흩뿌리는 검을 쥔 강엽이 오연하게 서 있었다.

    “그, 그 검은 설마...!”

    말을 끝맺을 새도 없었다.

    사선으로 양단된 몸이 단면을 타고 미끄러진다. 안에 들어있던 피와 내장 등이 흘러나와 강엽의 발치까지 이르렀다.

    그제서야 숨을 고른 강엽이 진기를 가라앉혔다.

    “후우.”

    빠르게 이기긴 했지만 절정고수 두 명과의 연전은 그에게도 꽤 부담스러웠다.

    홍가려가 있는 관짝을 곁눈질한 강엽은 물주머니에 피를 담아 안 보이는 곳에서 꿀꺽꿀꺽 마셨다.

    ‘뇌령(雷靈)이 아니었으면 더 오래 싸웠겠지.’

    자성검법 일초식 뇌령.

    지난날 흑접주와 공방을 나눴을 때, 기습처럼 그의 어깻죽지를 갈라버린 초식이기도 했다.

    폭발적인 전진 보법과 함께 극도로 정련된 검격을 날린다. 그 속도는 강엽도 초감각을 쓰지 않으면 따라가지 못할 만큼 신속했다.

    ‘아직은 이것밖에 못 익혔지만....’

    진조의 영성으로도 자성검법 같은 상승 무공을 단기간에 대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과 식을 흉내내는 정도라면 몰라도 그 안에 깃든 오의를 완전히 헤아리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일초식이라도 실전에서 써먹는 것은 몸을 다루는 감각이 그만큼 뛰어난 덕분이었다.

    남들은 몇 년을 들여서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을, 타고난 감각과 그동안의 실전 경험으로 갈음한 것.

    그리고....

    ‘중단전의 효능이 커.’

    중단전을 보금자리로 삼은 미량의 진기. 보름이 넘는 시일 동안 참오를 거듭한 끝에 작게나마 중단전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은 구체적인 형태도, 심상도 담기지 않은 불씨나 다름없기에 하단전과의 연결 역시 미약했지만, 두 단전은 조금씩 공명하고 있었다.

    덕분에 풍부한 축기량을 바탕으로 두 단전을 공명, 한순간 뇌령의 위력을 증폭시킨 것이다.

    입가의 피를 닦은 강엽이 관짝으로 향했다.

    “나다.”

    관짝을 천천히 열자 홍가려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하아, 어떻게 됐어요?”

    “지금까진 잘 풀렸다.”

    대공자의 끄나풀을 잡았다는 말에 홍가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근데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어.”

    “네?”

    의아해하던 홍가려는 강엽의 턱짓을 보고서야 살풍경한 방을 인식했다.

    비명이나 피냄새로 사람이 죽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우욱!”

    입을 틀어막은 채 필사적으로 구역질을 참는 홍가려의 모습에 강엽이 혀를 찼다.

    “시체는 처음 보나?”

    “처, 처음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건....”

    “좋게 생각해. 이놈들이 죽은 덕에 저 꼴이 되는 건 면했잖아.”

    “....”

    괴인의 낫질에 썰려나간 박제들.

    오래된 시체들이 모래인지 철가루인지 모를 검은 가루들을 게워내는 광경 앞에서 홍가려는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순 없어.”

    소란을 들은 시설의 무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홍가려의 말도 듣지 않고 관짝에서 끌어내린 강엽이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앗! 무, 무슨 짓이에요!?”

    “정신 차리라고. 좀 있으면 적들이 올 거다. 언제까지 멍 때릴 건데?”

    “이런 데서 어떻게 멀쩡하라고....”

    하지만 딱밤의 효과는 굉장했다. 이마는 무진장 아팠지만 정신은 번쩍 들었으니까.

    “...근데 제가 도움이 됐나요?”

    뭐라도 하고 싶어 관짝에 갇히는 것까지 감수했는데 잘한 건지 회의감이 들었다.

    오히려 강엽을 방해했던 게 아닐까?

    “없는 것보단 나았지.”

    단순히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은 아니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홍가려를 뒤로한 강엽이 기절한 종 무인을 끌고 왔다.

    “힘으로 뚫었다면 시끄러웠을 거다. 허여멀건한 놈은 모르겠지만, 대공자의 끄나풀인 이놈은 튀었을 가능성이 커.”

    이런 큰 시설에 만약을 대비한 탈출로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랬다면 백발의 괴인은 종 무인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끌었을 터.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시설을 점거해도, 대공자의 끄나풀을 놓쳤다면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물론 이놈이 있었던 건 행운이긴 한데, 행운은 뭐 아무나 얻나? 기회를 잡아야 행운도 있는 거지.”

    홍가려가 궂은일을 해준 덕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놈들을 잡을 수 있었다.

    종 무인을 대충 던져둔 강엽이 홍가려를 돌아봤다.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아, 네!”

    긴장한 얼굴로 수전을 단단히 움켜쥔 홍가려를 일별하고 밖으로 나가자 계단 위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적이다!”

    “잡아! 못 잡으면 우리가 죽어!”

    우르르 몰려오는 무인들의 모습에 강엽이 입가를 당겼다.

    그가 입은 흑포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새하얀 웃음.

    “조무래기밖에 없구만.”

    한 줄기 벼락이 된 그가 뛰어들자 복도엔 처절한 비명과 악다구니만 울려 퍼졌다.

    소란이 잦아드는 데는 일 각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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