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06화 (106/450)

17화. 세력 (1)

중경에 돌아온 뒤 강엽은 장경에게 집 수리를 맡겨둔 채 쭉 안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가가 밀집한 골목 한가운데 있는 안가는 느긋하게 수련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잠시 중경을 떠나겠다고 말하려고 청송객잔을 찾았는데, 장경이 보자마자 서찰을 내밀었다.

“받아. 너한테 온 거야.”

“나한테?”

자신에게 서찰을 보낼 사람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린 강엽은 봉투 겉면에 적힌 글씨를 보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숙정방.

“흠....”

조천방과 거룡방의 전쟁에 끼어들기 전에 잠시 얽혔던 노주의 흑도 방파.

당시 비무대회에서 우승하고 영약을 얻었을 때, 숙정방의 소방주가 휘하의 칼잡이들을 이끌고 강엽을 뒤쫓았었다.

탐욕을 부린 소방주는 죽였지만, 숙정방이 복수하기 전에 노주까지 찾아가 방주를 죽이고 그의 서녀를 방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 여자 이름이 단목정이었지.’

여러 가지로 바빴던 탓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장경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왜 보냈는지 알겠냐?”

“대충은.”

노주 근처에 마교도나 위험한 수배자가 나타나면 청송객잔에 인편을 보내라고 했던 것이다.

‘별로 기대하진 않았는데....’

봉투를 뜯고 서찰을 읽어봤다.

안부를 묻는 말부터 시작한 서찰은 숙정방이 그동안 겪은 일을 짤막하게 언급하고, 근자에 노주에 흘러들어온 한 가지 괴소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강엽이 눈썹을 까딱거리자 장경이 의아해했다.

“뭐라고 적었길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귀주성쪽 소문 들어온 것 있나?”

“귀주성?”

강엽은 대답 대신 서찰을 보여주었다.

서찰을 쭉 읽은 장경이 머리털 한 올 나지 않은 대머리를 벅벅 긁으며 콧잔등을 구겼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안개라....”

사천과 운남, 귀주 삼성의 관문 역할을 하는 노주는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소문이 빨리 퍼지는 편이었다. 중경까지 닿으려면 시일이 걸리니 두 사람이 처음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개라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흑룡교와 연관이 있을까?”

“글쎄....”

짐작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흑접주의 일기를 통해 입수한 흑룡교의 비밀 분타들, 그중 하나가 귀주 서쪽에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확히 어딨는지는 흑접주도 몰랐다.’

생전의 흑접주는 술법진이 비밀 분타를 감싸 외부로부터 격리한 게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술법진까지 동원했다면 상당히 중요한 게 있겠지.

“문제는 시점이군. 하필이면 흑접주가 죽고 나서 안개가 퍼진 게 마음에 걸려.”

안개가 비밀 분타에서 비롯됐는지는 모른다.

만약 연관이 있다면 참 공교로운 시기였다.

“근데 서찰에 적힌 대로라면 안개로 간 사람은 모두 실종됐다고 하잖냐. 보아하니 낭인전 귀양 분타도 쩔쩔매는 것 같은데.”

“그쪽에서 들어온 소식은?”

“없어. 귀주성 분타들하곤 친하지도 않고... 지원이 필요하면 성도 분타에 요청했겠지.”

대륙 전역에 분타를 둔 낭인전은 점조직이기에 다른 성의 분타하고는 교류가 뜸한 편이었다.

“근데 귀양 분타 입장에선 성도 분타에 도와달라고 하는 게 내키지 않을걸. 자존심 상하잖냐.”

귀양 분타와 성도 분타는 각각 귀주와 사천을 총괄하는 입장.

귀양 분타가 성도 분타에 도움을 청하는 건 귀주의 낭인전이 사천의 낭인전보다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성도 분타에 도와달라고 하느니 금패급 낭인을 동원하겠지. 그쪽에도 한 명 있으니까.”

“귀양 분타가 지원을 요청할 일은 없겠군.”

“그래. 낭인전의 이름으로 개입하려면 아예 다른 의뢰를 들고 가야 해.”

“....”

강엽이 팔짱을 꼈다.

귀주성의 안개가 흑룡교와 관련이 있다면 좌시할 순 없다. 얼마간의 위험은 각오할 수밖에.

장경이 물었다.

“...갈 거냐?”

“요즘은 대형 의뢰도 없다면서.”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안개에 갇힌 사람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까. 조금 시간을 두고 신중히 움직이는 게 낫지 않냐는 거지.”

“그 말도 일리가 있긴 한데....”

안전만 놓고 보면 장경의 의견이 옳다.

하지만 시간을 끌면 다른 사람의 손에 흑룡교의 유산이 넘어갈 수도 있는 일.

‘말이 통하는 인물이라면 협상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장경이 아쉬워했다.

“쩝, 하후진이나 청수를 데려가면 좋을 텐데.”

“두 녀석 다 중경에 없으니까.”

이전에 만났을 때 하후진은 당분간 쉬겠다면서 행선지도 안 알리고 사라졌고, 청수 역시 한동안은 번잡한 속세를 벗어나서 수행에 전념할 뜻을 밝혔다.

“모르지. 흑접에서 싸웠을 때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강엽이 실전을 통해 중단전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듯이 두 사람도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일전에 대련했을 때보다 더 강해져서 돌아온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

“일단 숙정방에 들려서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그 사이 새로운 소식이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차를 홀짝인 강엽은 문득 위화감을 깨닫고 물었다.

“근데 전강이 안 보이는데?”

“휴가야.”

뚱하게 대답한 장경이 주방을 가리켰다.

“점소이 겸 주방장이 사라져서 개점 휴업 상태지.”

“....”

강엽이 침묵했다. 그러고 보니 이 객잔에서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전강이 유일하던가?

“뭐, 간단한 안주는 나도 만들 줄 알지만 전강처럼 잘 만들지는 못해서 말이야. 배고픈 놈들은 지들이 알아서 다른 데서 먹고 오겠지.”

애초에 음식이나 술 장사로 돈을 많이 벌지도 않았다. 객잔은 어디까지나 부업일 뿐.

참고로 전강은 처음엔 휴가를 거절했지만, 장경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강제로 떠밀었다.

“하긴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순 없지. 넌?”

“안 그래도 좀 쉬려고. 내가 뭐 전생에 일 못해서 뒈진 귀신도 아니고 가끔은 쉬어야지. 마침 근자엔 대형 의뢰도 잘 안 들어오고.”

원래 낭인전의 일거리가 그랬다. 바쁠 땐 한꺼번에 엄청나게 몰리지만 한가할 땐 파리만 날린다.

강엽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혹시 나만 바쁜 건가?”

“그걸 이제 알았냐?”

장경이 코웃음을 쳤다.

* * *

뱃길을 통해 노주에 도착한 강엽은 선착장의 객잔에서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 사위가 어두컴컴해진 뒤에야 숙정방을 찾아갔다.

‘제기랄, 이놈의 태양은....’

온몸을 두꺼운 천으로 가렸는데도 여전히 온몸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

중단전을 개통하며 한 단계 성장했는데도 이 고통은 도무지 사그러들 줄 모른다.

그나마 쥐꼬리만큼 줄어든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새삼 흑무암쇄진의 필요성을 절감한 강엽은 치를 떨며 숙정방의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뉘시오?”

야밤에 찾아오는 불청객.

강엽이 죽립을 벗자 숙정방의 문지기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 화들짝 놀랐다.

“방주에게 전해라. 강엽이 왔다고.”

“예, 옙!”

숙정방에서 강엽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신임 방주인 단목정이 조만간 강엽이 올지도 모르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애꾸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공수의 예를 취했다.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

별 해괴한 소릴 들었다는 듯이 강엽이 표정을 찌푸리자 애꾸 사내가 겸연쩍어했다.

“지금 방주님께서 그리 부르라고 명하셨습니다.”

“강 무사라고 부르면 된다. 그때도 말했을 텐데.”

“쇤네가 어찌 감히.... 그리고 이렇게 불러야 아랫것들도 몸가짐을 조심합니다.”

“자세히 말해봐.”

“흔히 백도 정파가 배분이나 항렬에 엄격하다고 하지만, 흑도도 만만치 않습니다. 서열과 권위가 무너지면 배신이 판치기 때문이지요.”

“그건 당신의 지론인가?”

“...전대 방주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강연의 손에 죽은 전대 방주.

그가 평소에 입에 달고 살았던 말버릇이 그를 죽인 강엽의 권위를 뒷받침한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방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렇군.”

강엽은 단목정이 무슨 생각으로 전대 방주의 입버릇을 주워 섬겼는지 알 것 같았다.

강엽이 자신의 배경임을 강조해서 방도들이 감히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이겠지.

겉으로는 강엽의 권위를 치켜세워주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

강엽이 죽는다면 그 권위도 함께 무너지겠지만, 내세울 게 없는 그녀로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수완은 있어. 나쁘지는 않아.’

이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를 신임 방주로 지목한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주군이란 호칭이 낯간지럽지만 말이다.

“내부 단속은 그렇다 치고, 다른 놈들이 숙정방을 넘보진 않나?”

노주에 무림 문파가 숙정방만 있는 건 아니다.

단목정은 서찰에 별일 없다는 식으로 썼지만 실제로도 그런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군 덕분에 없습니다.”

“그것도 내 이름을 팔았나?”

“그, 그렇다기보다는... 소문이 났지요.”

방도들이 강엽을 주군이라고 부르는 탓에 세간에선 숙정방이 강엽에게 복속됐다고 여긴 것이다.

‘숙정방을 건드리면 귀영의 분노를 살 것이다.’

자연히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흑도 방파들은 몸을 사렸다.

“게다가 조천방과 거룡방이 벌인 조운대전(漕運大戰)이나, 흑접 토벌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주군의 명성이 높아진 것도 한몫했습니다.”

강엽의 명성이 숙정방을 지키는 울타리가 된 것이다.

그리 되자 강엽에게 반발심을 갖고 있던 방도들도 공공연히 강엽을 주군이라고 부를 지경이었다.

“어쨌든 내 이름을 이용한 것 아닌가?”

“윽, 그건... 그, 그래도 주군의 명성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강엽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애꾸 사내는 진땀을 흘렸다. 물론 전혀 이득을 취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민간에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혹여나 그런 시도를 하는 방도들은 단목정이 일벌백계했다.

자세한 설명을 들은 강엽은 고개를 주억였다.

“선은 지켰다고 하니 넘어가지.”

“가, 감사합니다.”

만약 숙정방이 자신의 이름을 팔아서 불합리한 이득을 취했다면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인지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걱정할 건 없는 것 같은데.’

숙정방에게 있어 강엽의 명성은 양날의 검이다. 필시 단목정도 그 점을 알고 기강을 잡은 것이리라.

* * *

“주, 주군을 뵙습니다.”

단목정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낯빛이었다.

어쨌든 강엽의 이름을 빌린 것은 사실이니, 그녀로선 혹시나 강엽의 심기가 상하진 않았을까 염려해야 하는 신세였다.

여기서 강엽이 그녀를 질타한다면 방주의 권위가 무너질 터.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던 강엽이 삐딱하게 물었다.

“정말 날 주군으로 모실 건가?”

“물론입니다.”

“그럼 받아주마.”

“감사합니....”

“단.”

조건을 붙인다. 단목정을 응시하는 눈동자에 일순 섬찟한 붉은 기광이 스쳐지나갔다.

“선을 잘 지켜야 할 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좀 이따 내 방으로 와라.”

“예?”

예상치 못한 말에 고개를 든 단목정의 얼굴이 뒤늦게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야심한 시간에 여인에게 찾아오라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강엽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재빨리 덧붙였다.

“장부 들고.”

“...장부요?”

“숙정방의 사업 내역이랑 입출을 기록한 장부. 밑에 거둔 놈들이 뭘로 돈을 버는지는 알아야지. 안개에 대한 소문은 그 뒤에 듣겠다.”

“아, 알겠습니다.”

단목정은 안도하면서도 묘한 아쉬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깜짝 놀라서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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