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76화 (75/450)

13화. 흑접 (1)

“그런 얼굴이었군.”

“왜, 새삼 반했어? 하지만 반하면 안 돼. 나한테 반한 남자를 죽이는 건 가슴 아픈 일이잖아.”

“미친년이기도 하고.”

“푸핫!”

강엽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칠호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더니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 진짜. 진심으로 정색하는 표정 참 웃기네.”

흡사 허점을 노출하는 듯한 행동에 강엽은 잠시 이 기회를 살려 다시 기습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번엔 별다른 재미를 못 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냉철해.’

아마 뛰어든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역공을 걸어오리라.

그걸 역으로 찔러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만, 강엽은 일단 궁금증부터 풀기로 했다.

“한 자릿수인가?”

“글쎄, 어떨까나.”

칠호의 입가에 걸린 해사한 웃음을 보는 순간 강엽은 눈앞의 여자가 한 자릿수라는 것을 확신했다.

일전에 죽인 이십구호보다 월등히 많은 내공을 쌓았거니와, 다른 사람들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쳐들어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지휘부와 별동대로 나뉘었군. 바깥에서 작전을 조율하는 놈이 있겠지. 벌레를 부리는 술법은 아마 그놈 작품일 테고.”

칠호가 지휘자라면 호종하는 살수들을 따로 데려왔을 것이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한 자릿수의 살수는 최소 두 명. 한데 네가 혼자 왔다는 건 따로 뺄 전력이 없거나, 혼자서도 홍가려를 죽일 자신이 있는 거겠지?”

잘난 척이나 하려고 이딴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칠호의 동공이나 표정을 통해서 자신의 추측이 어디까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함.

칠호 역시 그걸 알았는지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주는 대신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뭐, 어느 정도는 인정할게.”

“따로 뺄 전력이 없다는 거?”

“응. 요즘 우리 조직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거든. 근성 있는 애들이 드물단 말이지. 나 때는 죽기 살기로 까무러쳤는데 말이야.”

칠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너무 장난스러워서 진실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혼자 일하는 게 좋아. 그러니 후자도... 어느 정도는 맞는 셈이지!”

다음 순간, 칠호가 소매를 휘젓는 것과 동시에 작은 비침들이 복도를 가득 메꿀 기세로 쏟아졌다.

강엽은 즉시 장력을 퍼부었다.

꾸어엉!

폭발이 일어난 것마냥 둔중한 굉음.

그 너머를 바라본 강엽은 하늘하늘한 시비의 옷이 시야를 가리자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하긴 그 옷으로 싸우는 건 불편하겠지.”

칠호는 시비옷 안에 딱 달라붙는 야행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알몸으로 싸울 순 없잖아?”

허벅지 바깥쪽에 달린 검집에서 두 자루 협봉검을 꺼낸 칠호가 차가운 검광을 뿌렸다.

칼날의 길이만 한 자 반에 달하는 협봉검은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쌍검이라.’

검을 쓰는 자는 많아도 쌍검을 쓰는 자는 드물었다.

검을 두 자루 쓴다고 두 배 강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신경 쓸 게 많아져서 성가시기만 했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다루어야 하는 데다, 서로 다른 움직임을 가져가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

자칫하면 한 손만으로 싸우는 것만 못하기에 이도 저도 아닌 검술이 될 수 있지만....

‘이 여자는 능숙하게 쓰는군.’

카아앙!

좌검과 우검의 궤적이 다르다.

살수 비기로 펼치는 환검(幻劍)이었다.

난상으로 휘두르는 두 자루의 검세가 전후좌우에서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역수로 쥔 좌검이 허벅지를 노리고 짓쳐들어오면, 우검이 늑골 사이 장문혈을 찔러들어오는 식.

한 사람이 펼치고 있는데도 쌍검의 움직임이 겹치는 법이 없다. 마치 같은 검법을 익힌 동문의 사형제가 협공을 해오는 듯했다.

한 호흡에 대여섯 번의 검초를 펼치니 막고 피한 게 무색하게도 흑포가 검풍에 찢겨 너덜너덜해졌다.

‘빠르고 변칙적이다. 똑같은 검초가 거의 없어.’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미세하게 강약과 완급을 다르게 가져가서 적응할 틈새를 안 준다.

놀랍게도 칠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싸웠던 암검주 구양익에 비견할 만한 절정고수였다.

이런 자들이 최소 아홉 명이 있다면, 흑접의 저력은 웬만한 대방파에 버금간다고 봐야겠지.

반드시 오늘 이 자리에서 칠호와 또 다른 한 자릿수를 제압하여 흑접의 저력을 알아둬야 하리라.

쩌엉!

비스듬히 몸을 비틀며 쌍검의 타점을 후려치자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진다.

반동으로 잠시 경직된 칠호의 가슴팍을 향해 한천최심장의 장력을 격발했다.

퍼어어엉!

칠호의 몸이 속절없이 날아간다.

강엽은 그녀가 호신기로 충격을 상당 부분 상쇄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완전히 막지는 못했으나, 장풍에 몸을 싣고 날아가면서 충격을 흘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저 여자를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야 한다.’

홍가려가 있는 곳에서 싸우면 불리하다.

만약을 대비해서 보표들과 낭인들을 대기시켜뒀지만, 자칫하면 싸움의 여파에 휘말릴 수 있는 노릇.

강엽은 칠호가 날아간 거리만큼 따라붙으며 다시 한번 장력을 격발했다.

칠호는 급박한 순간에도 호신기를 둘러 막았지만, 강엽의 장력은 호신기에 부딪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감싸면서 더 멀리 날려버렸다.

칠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날 홍가려에게서 떨어트려 놓으시겠다?”

두 다리가 땅바닥에 떨어진 상태에서도 칠호는 유려하게 몸을 틀며 무게중심을 바꾸었다.

공중에서 한 발퀴를 돌며 바닥에 착지한 그녀는 일 장을 미끄러진 뒤에야 가까스로 멈춰섰다.

강엽은 장심을 내민 자세로 가만히 있을 뿐, 그녀를 따라올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니었다.

‘위험!’

온몸의 솜털이 주뼛 선다.

칠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리를 숙였다.

찰나의 판단이 그녀를 살렸다. 다섯 줄기의 섬광이 머리가 있던 곳을 할퀴고 지나갔던 것이다.

‘허상이구나!’

강엽이 중경에서 지내는 동안 목격자들의 입을 통해 암신에 대한 소문이 알음알음 알려졌다.

칠호는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소문보다 더한데!’

흑접의 한 자릿수인 그녀도 깜빡 속을 정도로 정교한 허상이었다.

방금 전에도 본능적으로 피했을 뿐, 정말로 옆에 강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다.

허리를 숙이는 척 앞으로 몸을 날린 그녀가 손목을 까딱거리자, 손목에 숨겨져 있던 암기가 강엽과 그녀 사이의 공간을 가로막는다.

그녀가 자세를 잡기 전에 따라가려고 했던 강엽이 따끔함을 느끼고 급히 멈추었다.

“...실?”

거의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느다란 은사(銀絲).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은사가 벽 사이의 공간을 거미줄처럼 관통하고 있었던 것.

놀랍게도 칼날처럼 날카로운 은사는 강엽이 쳐둔 호신강기를 얇게나마 베어버리고 상처를 냈다.

그나마 다리를 거뒀기에 생채기에 그쳤을 뿐, 계속 다리를 내뻗었다면 잘려나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부지불식간에 강엽과 위치가 뒤바뀐 칠호가 좌검을 휘둘러 강엽의 목을 쳤다.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숙인 강엽은 똑똑이 볼 수 있었다. 손목의 움직임을 따라 발출되는 은사를. 손목에 찬 팔찌에서 은사가 나오고 있었다.

직후 일도양단의 기세로 떨어진 검격이 몸통 한가운데를 노렸지만, 이번엔 강엽이 한 박자 빨랐다.

벼락처럼 허리를 퉁겨 올리는 것과 동시에 쏘아진 강렬한 발경 권파.

콰아앙!

비스듬히 칠호의 머리를 스친 경파가 천장을 흔들고 나무 파편을 뿌린다.

하지만 칠호가 쏜 은사는 천장과 바닥을 연결된 뒤.

촤악! 촤악! 촤아악!

환검이 난무하면서 은사가 복도를 틀어막는다.

수십 가닥의 은사가 복도를 가득 메꿀 기세로 펼쳐지자 강엽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굳이 이 시점에 밑천을 꺼내든 것은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뀐 틈을 타서 자신의 운신 범위를 좁히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겠다는 뜻이겠지.

강엽은 몰랐지만, 흑접의 한 자릿수들은 각자 다른 살수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절기를 익혔다.

팔호가 벌레들을 다루는 시충술을 절기로 삼았다면, 그녀는 이 은사를 절기로 삼았다.

-은혼사(銀魂絲).

귀하디 귀한 천잠사(天蠶絲)를 특수한 방식으로 가공하여 만든, 가히 신병이기에 준하는 무기.

애초에 그녀가 다른 살수들과 협공하지 않은 것은 전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방심해서도 아니다.

깜냥도 되지 않은 하급 살수들은 은혼사를 펼치는 데 방해만 된다.

한꺼번에 여럿을 상대하는 능력은 팔호가 그녀보다 앞서지만, 강력한 고수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그녀가 훨씬 뛰어났기에 칠호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도 자를 수는 있군.’

강한 저항감이 느껴지지만, 자르고자 하면 못 자를 것도 없긴 했다.

문제는 자르는 속도보다 은혼사를 펼치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르다는 것이다.

게다가 칠호가 펼치는 환검 역시 굉장히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은혼사만 신경 쓸 순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범위가 좁혀진다. 호신기가 뚫리고 상처가 늘어간다.

급소는 피한 덕에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혈인(血人)이나 다름없는 몰골로 전락했다.

만약 초감각으로 칠호의 몸놀림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면 진작 사지가 잘려나갔으리라.

물러나면 피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 저쪽은 곧장 홍가려를 노리겠지.’

이 순간 지리적 이점은 칠호가 취했다.

하지만 강엽도 아직 모든 밑천을 꺼낸 게 아니었다.

-휘이이익!

“으윽...!”

칠호가 검격을 날리다 말고 비틀거렸다.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

앞서 살행을 나섰던 살수들의 고막을 파괴한 음공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게 휘파람인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마음속으로 대비하고 있었던 만큼 대응도 빨랐다.

귓구멍 옆의 이문혈에 공력을 집중하여 청각을 보호, 태세를 정비하여 공세를 이어간다.

아니, 이어가려고 했다.

“엇?”

콰앙! 콰앙!

강엽이 과격하게 대응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은혼사를 직접 자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 은혼사가 연결된 벽과 천장 등을 무너뜨린다.

죄다 무너뜨릴 것처럼 사방팔방 경파를 터뜨리자 은혼사는 박살난 파편과 함께 떨어졌다.

“대단하긴 한데 약점도 명확해.”

“쳇!”

강엽은 곧장 칠호의 앞에 뛰어들었다.

혀를 찬 칠호는 물러나는 척 몸을 낮게 회전시켜 강엽의 복부를 노렸다. 선명한 궤적을 그린 검격이 단전이 있는 하복부를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암신의 허상이었다.

“또 이따위 수작을!”

기감은 눈앞의 허상이 진짜라고 속삭이는데, 실제로는 아니니 미치로 팔짝 뛸 지경이었다.

그때 강엽이 사각에서 나타나서 일격을 날렸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칠호는 이런 식으로 기습받는 것에 익숙했다.

이번에야말로 실체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쌍검을 역수로 잡아 겨드랑이 사이로 찔렀다.

하지만 그 역시 허상에 불과할 따름.

투아앙!

“컥...!”

두 검을 역수로 찔렀기에 측면에서의 기습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강엽이 부순 벽을 통과해서 맞은편의 벽까지 날아간 칠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호신기를 둘렀는데도 불구하고 강렬한 통증이 뼈를 관통하고 전신을 내달린다.

‘...오른팔이 부러졌어.’

뿐만 아니라 적중 부위를 중심으로 얼음장 같은 한기가 침투하고 있었다.

찢겨진 야행복 사이로 시커멓게 물든 멍을 본 칠호는 쓴웃음을 삼키면서 입술을 훔쳤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손등에 묻어나왔다.

“하... 이십구호가 당할 만하네.”

“너도 꽤 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완벽한 역습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칠호는 우검을 암기처럼 던졌다.

이 한 수엔 강엽도 의표를 찔리고 말았다. 설마 그 순간에 병장기를 버리면서 반격할 줄이야.

불리한 순간에도 어떻게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살수다운 한 수였다.

촤악!

어깻죽지에 박힌 검을 뺀 강엽은 억눌렀던 재생력을 발휘해서 지금까지 입은 상처들을 치유했다.

상리를 거부하는 광경을 본 칠호는 얼이 빠졌다.

흑접에서 해괴한 술법들을 수없이 접한 그녀에게도 흡혈귀의 재생력은 괴력난신이었다.

“씨발...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항복하면 죽이진 않겠다.”

칠호는 살아서 흑접에 대해 말해줘야 한다.

멍하니 있던 그녀가 뒤늦게 강엽의 말을 알아듣고 허탈하게 웃었다.

“하... 이제 와서 자비를 베풀어주겠다고? 항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고통이 길어지겠지.”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구나. 하지만... 둘 다 거절하겠어.”

금제가 걸린 이상 배신은 불가능하다. 죽는 것은 두렵지만, 금제가 발동되어 죽는 것은 그보다 훨씬 두려웠다.

‘이 괴물은 못 이겨.’

한 팔이 부러졌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도 여의치 않다.

죽을 때까지 싸우든가, 독단을 깨물어 죽든가.

가까스로 독단을 깨물 결심을 했을 때였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

이번에도 또 속았다.

뒷목을 강타하는 충격을 느낀 칠호는 속으로 쌍욕을 삼키며 정신을 잃었다.

‘썅, 저 빌어먹을 허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