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흑접 (2)
홍가려는 깜짝 놀랐다.
강엽이 머리가 산발이 된 여인을 꽁꽁 묶은 채 짐짝처럼 짊어지고 왔던 것이다.
그녀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까지 덩달아 놀랐지만, 강엽은 신경 쓰지 않고 칠호를 대충 내던졌다.
“그, 그 사람은 뭐예요?”
“당신을 죽이려고 한 살수.”
“아니, 그건 알겠는데요....”
홍가려가 요상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여인의 자세 때문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창대에 사지를 묶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장작불에 구운 돼지 통구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상대가 여인이라고 봐주지 않는 냉정한 처사였다.
“...다 좋은데 왜 그런 거예요?”
“갑자기 정신을 차릴지 몰라서. 팔도 부러뜨리고 혈도도 짚긴 했는데 안심을 못하겠더군.”
“그럼 죽이지 않는 건....”
“죽이길 바라나?”
강엽이 불쑥 묻자 홍가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흑접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흑접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단단히 꼬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정신을 잃고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을 죽이자고 하자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을 안 죽인 이유가 있어요?”
“심문할 거다.”
홍가려는 과연 칠호가 입을 열겠냐고 묻지 않았다.
칠호를 심문하는 과정이 온건하진 않으리란 건 강엽이 말해주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여자 혼자만 오진 않았을 거다. 바깥에도 다른 살수들이 있겠지. 하후진과 청수 도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놈들을 상대하고 있을 거고.”
“그 말씀은?”
“당신은 살아남았다.”
“아....”
홍가려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직 싸움이 끝난 건 아니지만 강엽이 그렇게 말해주니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영롱한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떨어진다. 고운 화장이 번졌지만, 홍가려는 개의치 않았다. 애써 씩씩한 척, 명랑한 척을 했어도 정말로 초연할 수는 없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연민을 느꼈는지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강엽이 쓰게 웃었다.
“울기는 이른데. 아직 끝난 것도 아니고.”
“저도 알거든요, 훌쩍!”
“아니, 그게 아니라... 흑접을 박살내야 진짜로 끝난다는 뜻에서 한 말인데.”
“...네?”
홍가려가 울다 말고 강엽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흐, 흑접을 박살낸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보표 한 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말 그대로다. 흑접을 일망타진하지 않으면 놈들은 홍가려를 죽이기 위해 계속 살수를 보낼 거다.”
“포기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믿나? 상대가 손해를 봤으니까 이쯤에서 손 털고 물러날 거라고?”
보표는 대답하지 못했다.
흑접이 이쯤에서 포기하는 것은 희망일 뿐, 실제로 그럴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내가 받은 의뢰는 홍가려를 지켜달라는 것뿐이다. 엄밀히 말해서 흑접까지 칠 의무는 없어. 그럼 사원루주가 새롭게 의뢰해야 하는데, 돈이 많이 들 거다. 사람 한 명 지키는 것과 흑접에 쳐들어가는 건 다른 문제니까.”
“으음, 루주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겠군요.”
“해주세요.”
홍가려의 말이었다.
눈물 자국이 완연한 그녀가 일어서서 강엽을 똑바로 응시했다.
“만약 루주님이 거절하신다면 제가 의뢰할 테니까요.”
“호, 홍 소저?”
“대신 조건을 걸겠어요. 누가 저를 죽이려고 했는지 알아봐주세요. 저는 그걸 알 권리가 있어요.”
정말로 경쟁하는 다른 기루에서 그녀를 죽이고자 의뢰를 넣었는지는 모른다.
오직 흑접만이 진실을 알고 있으리라.
* * *
흑립을 슬쩍 들어올린 팔호가 먼 하늘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늦는군....’
홍가려를 죽이면 신호탄을 쏘기로 했건만.
시간이 꽤 지났어도 칠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둘 중 하나겠지. 실패했거나, 아직 싸우고 있거나.’
고수들의 싸움은 한순간에 결정되기도 하지만, 때로 하염없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칠호가 아직 싸우고 있다면 지원을 가야 했다.
[십오호, 십육호. 너희 둘은 칠호에게 가라. 그년이 일처리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해.]
[예? 하지만....]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만약의 경우엔 어찌합니까?]
[현장 상황을 보고 판단해라. 너희도 그 정돈 할 수 있잖아?]
[명을 받듭니다.]
한 자릿수에 미치진 못해도 죽은 이십구호보다는 월등히 강한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이탈하면 이쪽 전력에 공백이 생기겠지만, 홍가려를 죽이는 게 더욱 중요했다.
앞서 백팔십이호로부터 칠호가 잠입한 전각의 위치를 들은 두 사람은 빠르게 멀어졌다.
“흐, 어지간히 우습게 보는구만. 두 놈이나 빼고 우릴 상대하려고?”
하후진이 칼등으로 어깨를 치며 킬킬거렸다.
“우릴 어지간히 우습게 봤나 보군요.”
청수도 검에 묻은 피를 털며 차갑게 뇌까렸다.
팔호는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지만, 두 놈이 어디로 가는지는 방향만 봐도 뻔했다.
“왜, 생각대로 잘 안 돼? 그러니 니들만 오지 말았어야지. 흑접주랑 그 한 자릿수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전부 왔다면 해볼 만했을 텐데.”
“에이, 어떻게 그럽니까? 이분들에게도 위신이라는 게 있는데요. 천하의 흑접이 힘없는 여인 죽이려고 자기네 전력을 몽땅 끌고 오면 뭐가 됩니까?”
“되긴 뭐가 돼. 천하에 다시 없는 상병신이 되는 거지. 어휴, 살문 망신은 저치들이 다 시키겠네.”
“하후 도우, 무심코 던지는 사실 적시가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됩니다.”
“인정. 근데 두 번이나 시도했는데... 힘없는 여자 한 명 못 죽인 시점에서 이미 병신 아닐까?”
“어허, 맞는 말이라도 자중해야 한다니까요?”
“.......”
흑접의 살수들을 앞두고 만담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팔호의 입매가 굳어졌다.
지금껏 숱한 무림인들과 싸웠지만 이토록 깊은 빡침을 선사하는 놈들은 본 적이 없었다.
하후진이 밉살맞게 웃었다.
“꼴받냐? 꼴받으면 죽여보든가, 병신아!”
“다 죽어가는 놈들 주제에....”
팔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몰골도 정상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살수들을 죽였지만, 둘이 등을 맞댄 채 가까스로 버티는 형국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백팔십이호를 제외하면, 팔호가 데려온 살수들은 모두 두 자릿수였다.
무공으로는 절정고수에 비할 수 없지만 어디 살수가 무공만으로 싸우던가.
독이 묻은 날붙이를 휘두르고, 암기를 던지고, 은신술로 기척을 감췄다가 기습하고....
게다가 팔호가 간간이 그림자를 길게 뻗어 두 사람의 다리를 붙들었는데, 술법을 뿌리칠 때마다 두 사람은 내공을 크게 써야만 했다.
그러고도 여섯 명의 살수들을 잃은 끝에야 마침내 두 사람에게 상처다운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하후진이 가래침을 퉤 뱉으며 이죽거렸다.
“떼거지로 덤비지 않으면 싸우지도 못할 것들이 입만 살았구만.”
“오냐, 인정하마. 나 혼자 왔다면 네놈들을 죽이지 못했을 거다. 도리어 내가 당했겠지.”
두 사람에게 시충술은 통하지 않았다.
청수가 태극의 기파로 벌레들을 한데 모으면 하후진이 죄다 불태워 없애버렸으니까.
어쩌다 일어난 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연못에 막혔기에 하후진도 마음껏 창염을 뿌렸다.
하지만 팔호의 말처럼 두 사람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하후진은 허벅지를, 청수는 팔뚝을 다쳤는데 상처를 통해 독기가 스며들어왔던 것이다.
지금까진 공력으로 억누른 덕에 독기가 전신으로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남은 놈들은 얼추 열둘인가... 어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
[지금까지처럼 싸운다면 한 식경이 한계입니다.]
[혹시 꿍쳐둔 초식 없어? 구명절초 같은 거 말이야.]
[그러는 하후 도우는요?]
[하나쯤 있긴 한데....]
[저도 하나쯤 있습니다.]
[근데 내가 이걸 쓰면 아마 탈진할 거야.]
[다행이군요. 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좋아. 보아하니 그 자식도 자기 일을 끝낸 것 같은데 우리도 이기자고. 저놈들한테 지면 개망신이잖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후진이 말한 그 자식이 누군지는 뻔했다.
청수는 그처럼 호승심을 불태우진 않았다. 하지만 한 사람 몫도 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청정도량 도문의 제자가 품을 마음은 아니지만 그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나한테서 떨어져라. 다친다.]
지금까진 배후의 기습을 염려하여 등을 맞대고 싸웠던 두 사람이었다.
그 덕에 팔호의 술법에 다리가 붙들리는 상황에서도 부상을 최소화하며 여섯 명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의 싸움 양상은 판이해질 것이다.
하후진이 튀어나가면서 단전의 내공을 폭발시켰다.
그가 계승한 염왕신공은 늘 폭주의 위협을 달고 다니는 위험한 무공이었다.
공력의 기질 자체가 매우 흉포한 패공(覇功).
사마외도의 마공은 아니나, 백도 정파의 신공들과도 결이 다르다.
그걸 폭발시킨 시점에서 하후진은 화끈한 열기가 전신 혈도를 태우는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크으...! 왜 사부가 어지간하면 쓰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네!’
아직 벽을 깨지 못한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힘. 그 힘을 억지로 끌어 썼으니 대가 또한 혹독할밖에.
하후진은 억지로 고통을 삼키며 공력을 밖으로 발산시켰다.
화아아악!
사지백해를 타고 푸른 불꽃이 내달린다.
얼핏 보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착각할 만한 광경.
그러나 창염을 휘감은 하후진은 보는 살수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흉흉한 눈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팔호는 아연실색했다.
흑룡교의 술법을 계승한 흑접은 흑룡교의 역사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연원부터 시작해서 강호 무림을 침공했던 과정, 그리고 흑룡교가 멸문한 최후의 날까지.
교도들에게 신인으로 추앙받았던 흑룡교주는 세 명의 절대고수에게 합공당해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염왕은 지옥의 불꽃으로 갑옷을 만들었다고 했다. 과장되었다고 생각했거늘.’
하지만 온몸에 창염을 두른 하후진의 모습을 보니 기록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에 적힌 그 갑옷의 이름은 바로....
-창룡갑(蒼龍鉀).
물론 흑룡교주를 죽인 염왕과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했다. 하후진은 상반신과 허벅지 일부만 휘감았지만, 염왕은 전신에 겁화를 두른 지옥의 화신이었으니.
일수에 산천초목을 불태우고 강물을 증발시키는 절대고수와 어찌 비견하겠나.
하지만 흑접의 살수들에게는 지금 하후진이 두른 창룡갑도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죽어어어엇!”
하후진이 냅다 뛰어들어 도격을 휘둘렀다.
“...!”
섬전 같은 속도에 흑접의 살수도 반응하지 못하고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쪼개졌다.
콰아아아앙!
불꽃이 춤추고 폭풍이 휘몰아친다.
살수를 양단하고도 기세가 죽지 않은 창염은 연못까지 질주해서 막대한 수증기를 일으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상식 밖의 위력에 팔호와 흑접의 살수들은 물론 한편인 청수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하후진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는지 대번에 이해될 지경.
멀리 떨어졌는데도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통째로 익는 것 같아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강엽과는 종류가 다르긴 하나, 하후진 역시 상식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괴물이었다.
“이놈...!”
흑접의 살수가 호신기를 두른 채 달려들었지만, 하후진은 팽이처럼 몸을 돌면서 단숨에 살수를 찢어발겼다.
팔호의 눈빛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이십호가 이토록 허망하게...!’
마치 벽을 깨고 그 위의 경지로 도약한 것 같은 신위가 아닌가?
하지만 흑접의 한 자릿수는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맞닥뜨리고도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놈에게서 떨어져라! 저 신위가 오래갈 리 없다!”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폐부가 익어버릴 것 같았지만 전음으로 일일이 지시할 상황이 아니다.
팔호의 외침에 흑접의 살수들이 죄다 하후진에게서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하후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길어봤자 반의 반 각이 한계야.’
창룡갑은 본디 공방일체의 호신강기.
하지만 억지로 끌어쓴 힘을 제어하지 못했기에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한계를 넘으면 이 힘이 주인의 몸마저 불태울 테니, 그전에 살수들을 죄다 죽여야 한다.
팔호는 그 점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거리를 벌렸지만, 그들의 적은 하후진만이 아니었다.
“이거 섭섭한데요. 저는 깜빡하신 겁니까?”
청수, 그가 빈틈이 드러난 살수들을 뒤에서 기습하며 쏠쏠한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큭, 이놈들이...!”
이를 갈며 팔호가 수인을 맺었다.
일단 하후진의 발목을 묶고, 부하들로 하여금 청수를 제압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술법이 안 먹혀?’
하후진이 태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술법으로 길게 늘어뜨린 그림자가 창룡갑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스러졌다.
세 명의 살수들을 쓰러트린 하후진이 팔호를 향해 달려들어 도격을 내쳤다.
어찌나 빠른지 팔호는 도망치지도 못했다.
“죽기 싫으면 항복해라, 이 새끼야!”
“큭...!”
강엽은 한 자릿수를 살려두라고 말했지만 하후진은 이 상태에서 힘조절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청수에게 맡기자니, 그는 다른 살수들을 붙잡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역할을 바꾸면 흑접의 살수들은 정면대결을 피할 테니, 그가 팔호를 붙잡는 동안 청수가 살수들을 쓰러트리고 합류할 수밖에 없으리라.
“괴물 자식!”
팔호는 감히 정면으로 맞설 엄두를 못 내고 죽을힘을 다해 도격을 피해야만 했다.
* * *
“저건 또 뭔지.”
강엽은 포말처럼 치솟은 불꽃을 보고 어이가 없어 웃었다.
보나마나 하후진이 한 짓이리라.
“흠, 설마 생포고 뭐고 몰살시킨 건 아니겠지?”
“끄륵...!”
그의 말을 들은 자는 피 섞인 게거품만 뱉었다.
팔호가 십오 호라고 부른 살수가 가슴이 꿰뚫린 채 허공에 들려 있었다.
십육 호는 이미 시체가 되어서 내동댕이쳐진 지 오래였다.
칠호를 생포했으니 떨거지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
십오 호를 내던진 강엽은 놈의 목뼈를 밟아 숨통을 끊어버린 뒤, 칠호가 매달린 창대를 짊어지고 불꽃이 터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 여자가 있으니 저쪽 놈은 죽어도 뭐....’
생포하면 좋겠지만, 죽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엽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