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57화 (56/450)

9화. 거룡 (14)

조영옥은 아쉬워했지만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거절한 상대에게 다시 권유하는 것은 모양 빠지는 짓이리라.

“좋아요. 그럼 다른 제안을 하죠. 강 무사가 철권긍룡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지 않았다면, 금전을 대가로 그의 신병을 넘겨받고 싶어요.”

“자세히 말해보시오.”

“강 무사가 철권긍룡을 잡았다면서요. 그럼 그의 생사여탈권은 강 무사가 쥔 셈이죠.”

“그 생사여탈권을 사고 싶다?”

“그래요.”

“이유가 뭐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조영옥이 검지와 중지를 폈다.

“첫 번째는 증언이죠. 거룡방주는 죽고, 다른 빈객들은 죽거나 도망쳤어요. 현재로선 철권긍룡이 거룡방과 구양세가의 관계를 증언할 유일한 증인이에요.”

물론 운이 좋다면 거룡방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증인과 증거를 고루 갖추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두 번째는 몸값을 요구하기 위해서예요.”

“구양세가가 거부한다면?”

“물밑에서 소문을 퍼뜨리겠지요. 이걸로 구양세가의 명예를 더럽히진 못해도 구설수는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철권긍룡 역시 실망할 테니 잘 구슬리면 회유할 수 있고요.”

“얼마나 요구하려고?”

“오만 냥이죠. 관례적으로 봤을 때 그게 맞거든요.”

문파끼리의 전쟁이 끝나고 서로 포로를 교환할 때, 교환할 포로가 없으면 몸값으로 대신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오만 냥이라.”

“처음엔 두 배인 십만 냥을 불렀다가 협상을 통해 차츰 줄여나가겠죠. 하지만 오만 냥 밑으로 받을 생각은 없어요.”

“그럼 내게 떨어지는 돈은?”

“오만 냥을 드리겠어요.”

“그럽시다.”

밀고 당기면 조금 더 땡길 수도 있겠지만, 심신 양면으로 지쳤기 때문에 오늘은 더 이상 심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성도전장의 전표 오만 냥으로 값을 치른 조영옥이 조영빈을 불러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철권긍룡의 생사여탈권은 강엽의 손을 떠나 조영옥의 손에 떨어진 셈이었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 기겠지.’

* * *

“으....”

조천방주가 침음했다.

풍도마장은 맥을 짚고 조천방주의 용태를 알아보더니, 추궁과혈(推宮過穴)로 흐트러진 기의 운행을 바로잡은 것이다.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이 깜짝 놀랐다.

“방주님!”

“사부님!”

골이 지끈거리는지 조천방주가 이마를 잡고 눈살을 찌푸리자 풍도마장이 호통을 쳤다.

“어허, 번잡하다! 썩들 물러가지 못할까!”

상대가 상대인지라 서만동 등 제자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드시오, 방주?”

“여, 여긴....”

“아직 전장이오.”

“전쟁은... 방도들은 무사하오?”

숨 죽이며 듣고 있던 사람들은 깨어나자마자 방파부터 챙기는 조천방주의 말에 울컥했다.

“걱정하지 마시구려. 전쟁은 이겼으니까. 방주의 제자들도 모두 무사하외다.”

그 순간 조천방주가 길게 내쉬는 한숨에 안도감이 깃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고맙소....”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자신을 구해준 풍도마장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승리에 이바지한 모든 이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를 향한 말이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소속을 떠나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차마 대놓고 통곡하지는 못하고 뜨거운 눈물만 흘리는 사내들 사이에서 강엽은 조용히 빠져나왔다.

상상만큼 극적이진 않았지만 봐둔 보람은 있었다.

초감각까지 써가면서 추궁과혈을 하는 법을 관찰했던 것이다.

‘당장 따라하진 못하지만 나중에 할 일이 생기면 참고는 되겠지.’

그때 하후진이 다가왔다.

“벌써 가냐?”

“전쟁은 끝났으니까.”

“배 타고 함께 가지 그래?”

“그냥 지금 출발하는 게 나아.”

곧 있으면 동이 터오를 터.

일단은 태양을 피해 숨으면서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중경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뭐 그러든지. 나도 중경에 돌아갈 거니까 나중에 보자고.”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천방은 당분간 전후처리로 눈 돌아갈 만큼 바쁘겠지만, 그건 강엽의 일이 아니다.

그렇게 떠나려고 할 때였다.

“잠시 서보거라.”

풍도마장이 뒤에서 불렀다.

“제게 볼일이 남았습니까?”

걸음을 멈춘 강엽이 노인을 돌아보았다

비록 첫 만남이 우호적이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으로 만난 것도 아닌데 유치한 감정싸움으로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을 터.

건조하면서도 차분한 대꾸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눈가에 흥미가 어리기 시작했다.

“한천최심장을 익혔더구나.”

“이공녀가 말했나 보군요.”

“그렇다.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눈여겨보진 못했다만... 웬 서생놈이랑 싸울 때 쓰던 것 같던데.”

노인의 눈에 어린 의구심에 강엽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풍도마장에 대한 풍문을 떠올렸다.

정말 사람들이 말한 대로 태화문의 모든 장법을 섭렵했다면 한천최심장 역시 알고 있을 터.

“비급에 달린 주석이 노선배의 작품이었습니까?”

“작품은 무슨. 그저 무공 구결을 해석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재밌구나.”

“뭐가 말입니까.”

“노부가 주석을 달았기에 안다. 한천최심장은 주석만 본다고 쉬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니라. 한데 네 녀석은 한술 더 떠서 며칠 만에 익혔다지?”

“어쩌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

“끌끌, 재밌구나. 고작 낭인에 불과한 녀석의 오성이 본문의 기재들보다 낫다는 뜻이렷다.”

“....”

“나중에 본문에 찾아오거라. 네 장법과 노부의 손이 닿은 아이들의 장법. 누구의 장법이 더 뛰어날지 지켜보는 것도 보는 맛이 있겠다.”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석을 직접 달 정도로 한천최심장을 심도 깊게 통찰했던 풍도마장이라면, 얼마나 뛰어난 오성을 지녀야 비급만 보고 무공을 익힐 수 있는지 헤아릴 수 있을 터.

그게 과연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현재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태화문주의 측근이라면, 이번 전쟁의 경과를 보고할 때 강엽의 이름도 언급하리라.

‘태화문주가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풍도마장이 풍성한 수염을 쓸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만나서 즐거웠네, 젊은이. 다음에 보세나.”

“다음에 만났을 땐.”

강엽이 포권을 쥐면서 덧붙였다.

“오늘처럼 쉽진 않을 겁니다.”

“흘흘, 젊은 패기가 부럽구먼.”

둥글게 휘어지는 노고수의 눈매를 보면서 강엽은 굳이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삼켰다.

‘다음에 만나면 당신 낯짝이 패배감으로 구겨지는 걸 즐겁게 감상해주겠소.’

감정은 털어냈지만, 승부욕마저 꺼진 것은 아니었다.

* * *

조천방은 사상자들을 수습한 뒤 중경에 돌아왔다.

이후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는 장례식을 치른 뒤,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양평을 비롯한 낭인들도 연회에 초대받았다.

강엽과 하후진은 참석하지 않았다.

강엽은 그런 자리가 번잡했고, 하후진은 양평이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자.”

닷새 가량 조천방에서 머물며 두둑한 수고비를 챙긴 끝에야 양평은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완수금을 못 받은 게 아쉽습니다, 형님.”

문득 뒤를 따르는 낭인이 입맛을 다시면서 하는 말에 양평이 코웃음을 쳤다.

“왜 못 받는다고 생각하나?”

“예? 하지만....”

“우린 할 만큼 했다. 거룡방이 약해서 진 걸 우릴 탓하면 안 되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걱정 마라. 접선책을 알고 있으니까. 그놈을 찾아가서 돈 내놓으라고 할 거다.”

거룡방이 승리하면 접선책을 통해서 완수금을 받기로 했다. 거룡방은 졌지만 양평은 자기 공로를 내세워서 뜯어낼 심산이었다.

“그게 얼마인데. 포기할 순 없지.”

양평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신창양가의 혈손이지만, 적통들과 비교하면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배우는 무공부터 수련 환경까지 격이 달랐다.

가문의 원로들에게 벌모세수를 받고, 영약을 밥처럼 먹으면서 상승 무공을 전수받는 적통들.

반면 방계 혈족으로 태어난 양평은 가문의 일원으로서 적당한 무공을 배운 게 전부였다.

바깥에서 볼 땐 그것도 충분히 좋은 환경이었지만, 양평은 만족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적통이었으면, 하다 못해 직계와 가까운 방계 혈족이었다면.’

그랬다면 적통들의 콧대를 눌러주었을 텐데.

‘가문엔 내 자리가 없다.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곳에서 나만의 성을 쌓자.’

그래서 군문에 들어갔다.

먼 근무지에서 그는 제왕으로 군림했다. 뛰어난 무공과 출신 덕분에 상관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비단길을 지나는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마적들과 붙어먹고, 반반한 계집들을 납치해서 마음대로 갖고 놀고, 거슬리는 놈들은 누명을 씌워 죽여버리고....

그렇게 살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다. 어지간한 일은 뇌물로 무마시킬 수 있었다.

만약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뇌물이 먹히지도 않고 신창양가의 배경으로도 협박할 수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가지만 않았다면 출세가도를 달렸을 터.

‘네놈은 오늘부로 파면이다.’

그나마 가문의 후광 덕에 목숨만은 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망감에 허덕였겠지만, 양평은 꺾이지 않았다.

군문에서 출세할 수 없다면 강호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다 낭인전에 들어갔다.

낭인전은 과거를 일절 묻지 않았다.

분타주도 그가 예전에 무엇을 했는지 관심이 없었다.

양평은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은천패까지 올랐다.

‘난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낭인전을 기반으로 나만의 문파를 세우겠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대장원을 짓고, 문파를 꾸려나갈 돈이. 이중의뢰를 받는 것은 위험했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다. 은천패인 그도 수십 번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거액이었다.

“장수 분타로 돌아가자. 조천방의 의뢰비도 꽤 많으니 한동안은 놀고 먹어도 될 게야. 간만에 기루도 가서 질펀하게 놀자.”

“하하, 역시 형님밖에 없습니다!”

낭인들이 경박하게 낄낄거렸다.

그들은 양평에게 인생을 걸었다. 훗날 양평이 문파를 세우면 낭인전을 나와 들어가기로 했다.

양평의 그늘에서 떡고물을 받아먹으며 호사를 누린 그들은 양평이 이중의뢰를 받은 것을 알았어도 개의치 않았다. 증거는 없으니 들킬 염려도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 * *

강엽이 객잔 주렴을 헤치고 들어가자 장경과 전강이 굳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사람까지 보내서 오라고 한 거냐?”

“아, 강엽. 쉬고 있는데 불러서 미안하다.”

장경이 건넨 찻잔을 받은 강엽은 자리에 앉은 다른 사람을 힐끔거렸다. 하후진이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독한 화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이놈은 왜 청승 떨고 있는데?”

“일단 이것부터 봐봐.”

장경이 건넨 종이를 쭉 읽어본 강엽의 눈에 기광이 일렁거렸다.

“이거 진짜인가?”

“일단 그쪽 분타주 말로는 제보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히 구체적이야. 그래서 그때 같이 싸웠던 너랑 저 녀석에게 물어보는 거지.”

“...미심쩍은 기색은 좀 있었지.”

“있었다고?”

“그런데 증거가 없었어.”

“으음, 하지만 이게 사실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낭왕삼칙(浪王三則)’에 위배된다고.”

낭왕삼칙은 소속 낭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규율이었다.

一. 살인청부의뢰를 받지 마라.

二. 몰래 의뢰를 받지 마라.

三. 의뢰 결과를 속이지 마라.

첫 번째는 낭인전의 명예와 관련되었고, 두 번째는 낭인전의 이득과 관련되었으며, 세 번째는 낭인전의 신용과 관련되었다.

“이중의뢰는 두 번째 규율에 위배돼. 사안에 따라선 다른 규율들과도 엮이고.”

“어기면 낭인전 차원에서 척살령이 떨어지오.”

전강이 말을 보탰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낭인전에 한정해선 무림공적이나 다름없다고요.”

“그래도 자기들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머저리들이 분타마다 매년 한두 명 꼴로 나와.”

“증거부터 찾아야겠군. 암만 그래도 제보만 믿고 죄인 취급할 순 없으니....”

“증거는 개뿔! 그 개새끼 뒤로 호박씨 깠을 게 뻔하잖아!”

하후진이 술병을 쾅 소리나게 내려치자 식당에 있던 낭인들의 눈길이 잠시 모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 손짓한 장경이 한숨처럼 말했다.

“아, 우리도 이 녀석이 왜 이러나 들었어. 비호창 그 작자에게 예전부터 안 좋은 소문이 따라다니긴 했었지. 맡은 일은 잘해서 다들 쉬쉬했지만.”

낭인전의 맹점이자 조직의 한계였다. 과거를 묻지 않으니 온갖 쓰레기들이 들어오는 것.

“아직은 의혹만 있을 뿐이야. 의혹이 확신이 되려면 증거부터 찾아야지. 증거는 그쪽 분타주가 알아서 찾을 거고.”

“그럼 우릴 부른 이유가...?”

“만약의 경우엔 칼을 빌려달라더라. 그쪽 분타만으론 역부족인 모양인데, 천 냥을 불렀어.”

“완수하면 동천패로 오르겠군.”

“할 거냐?”

“난 한다.”

하후진이 일어서며 으르릉거렸다. 술기운 따위는 진작 날려버린 지 오래였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강엽이 선선히 끄덕였다.

“서둘러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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