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58화 (57/450)

10화. 처단 (1)

“어서 오세요, 구양가 여러분.”

귓가에 꽂히는 낭랑한 미성에 구양세가의 사절로 찾아온 이들은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본래 주인이었던 그들이 객의 입장이 됐으니 열불이 터질밖에.

흑적색의 궁장을 예쁘게 차려입은 조영옥이 보란 듯이 대청의 태사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자 조영빈과 풍도마장, 그리고 그녀를 보필하는 태화문의 고수들이 좌우로 늘어선 채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허리춤의 병장기를 살살 어루만지는 것이,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출수할 것만 같은 기세.

그것은 태사의에 앉은 그들의 공녀에게 합당한 예를 갖출 것을 강요하는 협박이었다.

“...태화문의 이공녀를 뵙습니다. 소생은 구양가의 총관인 구양경신입니다. 이쪽은 본가의 화양검대(華陽劍隊)를 이끌고 있는 구양직 대주입니다.”

“팔로화천검(八路火天劍)의 명성은 익히 들었어요. 광살괴(狂殺怪)를 벤 일화는 본문이 있는 달주(達州)에서도 널리 회자되었죠.”

“과찬이시오.”

겸양하는 말이었으나 조영옥의 미소는 한결 짙어졌다.

“화양검대주의 근심이 크시겠군요. 최근에 꽤 친하게 지낸 분을 잃으셨다지요?”

“...금시초문이오만.”

말은 그렇게 해도 끓어오르는 울화를 누르지 못한 잇새 사이로 위험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총관이 진정하라는 듯 다급히 어깨를 잡았다.

“공녀께서 본가의 사정에 관심이 많으신 줄 몰랐군요. 하지만 잘못된 소문을 접하신 듯합니다.”

“이런. 그런가요? 제가 착각한 모양이네요. 화양검대주께 사과드립니다.”

“...아니외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볼까요?”

“그전에 감히 여쭙겠습니다. 태화문이 어찌하여 거룡방을 점거하신 것인지요?”

“감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태화문의 고수들이 살기를 내뿜자 구양세가의 무인들도 검파로 손을 가져가며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에서 조영옥이 일성을 내질렀다.

“그만!”

목소리에 담긴 내공에 양측의 고수들이 통나무처럼 빳빳해지고, 깊게 골이 패인 화양검대주의 미간에 불쾌감과 긴장감이 드리웠다.

그녀가 총관을 지그시 응시하며 경고했다.

“총관께서는 언행을 주의하실 필요가 있겠군요. 누가 들으면 본문이 거룡방을 힘으로 겁박한 줄 알겠어요.”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강호 동도들이 본다면 오해할 소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귀 가문에 그걸 설명할 의무는 없군요.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강호 동도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본문은 거룡방의 요청을 받고 왔습니다. 거룡방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지요.”

“누구로부터의 안전 말씀입니까?”

“글쎄요. 거룡방주가 생전에 쌓은 업보가 워낙 많아야죠. 이를 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거룡방주가 언급되자 총관이 입을 다물었다.

조영옥은 여세를 몰았다.

“참, 거룡방주가 구양가의 빈객이었지요? 제가 거룡방에 와서 조사를 해보니 그가 생전에 저지른 짓이 꽤나 화려하던데, 말릴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

“...거룡방주가 한때 본가의 빈객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오래전에 본가를 나간 사람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본가의 책임은 아니지요.”

총관이 속으로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현재 의창을 중심으로 호광땅에 거룡방주가 생전에 저지른 짓들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거룡방주가 구양세가의 빈객이었다는 공공연한 사실이 널리 퍼지면서 구양세가는 거룡방주와의 관계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거룡방이 아니라 거룡방주에 대한 소문만 나고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리 되도록 사주했다.’

그게 누군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조영옥이 배후에 있으리라.

“심지어 거룡방주는 구양가에 몸담은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다른 빈객들도 불러냈다지요?”

“...애석한 일이지요. 가주님께서 말리셨지만 거룡방주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면서 나갔습니다.”

“네. 한데 철권긍룡은 살아서 잡혔지요. 운이 좋게도 지금은 제가 보호하고 있는데, 원하신다면 넘겨드릴 의향이 있답니다.”

“....”

“아, 물론 맨입으로는 곤란해요. 저도 철권긍룡을 살리느라 돈을 좀 써서. 십만 냥이나 지출한 덕에 곤란한데, 구양가의 가주님께서 철권긍룡을 아끼셨다면 그 정도 돈은 충분히 내주실 수 있겠지요?”

“철권긍룡 역시 이미 본가를 떠난 사람이지요. 이제는 남남이니 본가가 그를 위해 몸값을 지불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흠, 철권긍룡이 들으면 섭섭해하겠는데요. 지난날의 의리를 봐주었으면 했을 텐데.”

“가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어도 같은 말을 하셨을 겁니다. 철권긍룡은 이미 외인입니다.”

“철권긍룡은 좀 다른 말을 하던데요.”

“예?”

“뭐라더라. 거룡방의 배후에 구양가가 있다나. 아무리 그래도 백도의 명문인 구양가가 그런 짓을 하겠냐고 추궁했더니 자기 말이 맞다면서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

“당혹스러우시겠죠. 비천한 떠돌이를 빈객으로 받아줬는데 뒤통수를 맞았으니까요.”

“아, 아닙니다. 저희는...!”

“예. 아무리 그래도 저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그자를 모용세가에 넘길까 고민 중이랍니다.”

“...어찌하여 모용세가에?”

“그야 모용세가는 팔가의 일원이니까요. 무림맹의 맹방이자 기둥인 만큼 공명정대하게 진실을 밝혀 철권긍룡을 일벌백계하지 않겠어요? 감히 구양가를 모함한 죄를 물어야지요.”

총관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모용세가는 장사(長沙) 남쪽에 자리한 대가문.

그들 역시 장강에 막대한 이권을 갖고 있는 만큼 구양세가의 수작을 곱게 보진 않았다. 다만 같은 무림맹의 맹방이니 일단 잠자코 지켜봤을 뿐.

철권긍룡의 신병이 모용세가에 넘어가면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얼마나 대가를 줘야 할까?

아니, 조영옥이 모용세가에 철권긍룡을 넘기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줘야 할까?

‘그러게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대가문이라고 치켜세워주니 말이야. 어딜 주제도 모르고 깝쳐, 깝치기를.’

아예 뼛속까지 싹 다 벗겨먹어주마. 감히 태화문의 영역에 깃발을 꽂으려고 했던 것을 죽도록 후회하도록.

조영옥이 독심을 숨기면서 입가를 올렸다.

“마침 제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마, 말씀해주십시오.”

총관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거룡방을 무단으로 점거한 책임을 물으려고 했는데 명분과 힘 모두 조영옥이 가지고 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거룡방주의 악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어요. 구양가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위로금 명목으로 이십만 냥쯤 내놓는다면, 낭설이 나돈다고 해도 강호 동도들은 믿지 않을 겁니다.”

“.......”

악마다. 이 여자는 악마다!

좀 전 몸값의 두 배는 되는 액수를 들은 총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화양검대주도 아연해져서 턱을 다물지 못했다.

조영옥이 환하게 웃었다.

“자, 어쩌시겠어요?”

* * *

강엽과 하후진은 조천방으로 향했다.

중경에서 삼백 리쯤 떨어진 장수현은 말을 타고 달리면 이틀은 걸린다.

하지만 뱃길을 타면 하루면 충분했다.

“두 분이서 여긴 어떻게....”

소식을 듣고 나온 정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오. 혹시 배 좀 빌릴 수 있소? 장수현까지 가려는데.”

강엽은 양평에 대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아직 양평이 이중의뢰를 받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까.

하후진이 덧붙였다.

“어쩌면 댁네 방주를 암습한 놈을 찾을지도 모르우.”

“예에?”

조천방도 방주를 암습한 자를 찾으려고 해봤다.

하나 전장이 혼란했기 때문에 찾진 못했다. 구양세가의 암검이 그런 짓을 했다고만 의심할 따름.

하후진이 말실수를 하기 전에 강엽이 나섰다.

“우리도 자세한 건 모르오. 증거가 없어서 자세히 말해줄 수도 없고. 다녀와서 알려주겠소.”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서만동은 전력으로 경공을 쓴 건지 반각도 안 돼서 진땀을 흘리며 돌아왔다.

“혹시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방주님께서 두 분을 보자고 하십니다.”

하후진과 눈빛을 나눈 강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럽시다.”

갈 길이 급하지만 시간을 못 낼 것은 없었다.

그렇게 서만동의 안내를 받아 내원에 따로 마련된 접객실로 들어가자 잠시 후에 황삼을 입은 조천방주가 제자들과 함께 들어왔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감돌았다.

“일전에 연회에 안 와서 좀 아쉬웠네. 가장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이 빠지지 않았나.”

“그 일은 저희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허허, 오해하지 말게. 탓하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얼굴 보니 좋구만. 한데 첫째 녀석한테 들었는데... 나한테 침을 놓은 녀석을 잡겠다고 했다면서?”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의심 가는 사람은 있을 것 아닌가?”

“혹시 방주님도 그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연회에서 유독 한 사람이 나와 눈을 마주치면 어설프게 웃더군. 제 딴엔 숨기려고 들었지만 그건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어. 당시엔 왜 그런지 몰랐는데, 자네들이 온 덕에 알게 됐네.”

“방주님과 제가 같은 사람을 떠올린 것 같군요.”

“장수현으로 간다고?”

“예. 배를 빌려주십사 부탁드리러 온 겁니다.”

“빌려주지. 놈들은 육로로 떠났으니 지금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먼저 도착할 걸세.”

“언제쯤 도착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초경(初更) 무렵엔 도착할 것 같군.”

초경이면 해가 떨어졌을 때니 싸우는 데 별 문제가 없으리라.

조천방주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놈에게 준 돈은 자네들이 나눠 갖게. 내게 돌려줄 필요는 없네.”

* * *

조운선이 장강의 물살을 가르는 동안 강엽은 선실에 처박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장경이 전갈을 보내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명상을 하며 지난날을 돌이켜봤다.

흡혈귀로서 새로운 능력을 얻기 전에 그동안 이룬 것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안 그럼 후회할지도 몰라.’

그건 일종의 예감이었다.

새로운 능력을 깨우치는 것은 이전의 경험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힘의 근원과 마주해야 한다.

어쩌면 이제껏 겪은 싸움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위험하리라.

과거 모산혈조에게 납치되어 흡혈귀가 되기 위한 의식을 치렀을 때만큼이나 말이다.

‘위험을 감수할 각오는 됐다. 문제는....’

고민이 깊어지는 그때였다.

“어이, 들어가도 되냐?”

바깥에서 하후진이 문을 두들겼다.

강엽이 가부좌를 풀고 들어오라고 말하자 삐그덕 열린 문 사이로 하후진이 약간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 내가 방해했냐?”

“무슨 일이지?”

“미리 말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놈이랑 싸우면 흥분할 것 같거든. 헛소리해도 이놈이 좀 미쳐서 그런갑다 해줬으면 좋겠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라.”

“어?”

“너 혼자 양평과 싸우고 싶은 거 아니냐?”

“...진짜 그래도 되겠냐?”

“감정에 치우쳐서 일만 망치지 않는다면.”

의뢰를 빌미로 케케묵은 원한을 갚는 것이 옳은지는 차치하고, 강엽은 동천패를 따기 위해 의뢰를 맡았을 뿐이라서 양평을 죽이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구양익의 피를 마신 덕에 막대한 선천지기를 얻어서 당분간은 흡혈을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헹, 걱정도 팔자구만. 아무렴 내가 머리에 피가 몰려도 그런 실수를 하겠냐?”

“꼭 너처럼 구는 놈들이 실수하던데.”

“딱 봐라, 엉? 내가 양평 그놈을 어떻게 조지는지! 어휴,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날까.”

“대신 실수하면 네 별호는 조두아(鳥頭兒)다. 앞으로 다른 사람들 만나면 ‘나는 조두아 하후진입니다’라고 소개해라.”

“조두...? 그게 뭔 뜻인데?”

“멍청한 새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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