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56화 (55/450)
  • 9화. 거룡 (13)

    강엽이 돌아왔을 땐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그제야 긴장감을 내려놓은 강엽은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더러워진 장삼 쪼가리를 벗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왜 혼자서 궁상 떨고 지랄이냐.”

    그 옆에 철푸덕 앉은 하후진이 대 자로 누워버렸다.

    “크어, 꿀잠 자고 싶다.”

    “자라. 안 말린다.”

    “그럴 수야 있나.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다 아는데.”

    “...그렇긴 하지.”

    조천방주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수적들 문제도 남아 있었다.

    사상자도 수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일이 아니야. 낭인으로서 할 일은 끝났어.”

    “그건 인정.”

    약간의 의혹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걸 풀려고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달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숨쉬기 운동이나 해야지. 후, 합, 후, 합, 후합.”

    “...그냥 꺼져.”

    하지만 계속 쉴 수만은 없었다.

    조천방주의 대제자 서만동이 간부들과 함께 찾아와서 포권지례를 올렸던 것이다.

    “끝까지 함께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험험, 뭐 우리도 돈 받고 하는 거니까.”

    하후진이 겸연쩍어하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강엽이 물었다.

    “방주님은 어떠시오?”

    “아직 깨시진 못했습니다. 침이 워낙 깊이 박혀서... 대관절 언제 정신을 차리실지.”

    무턱대고 건드리면 죽거나 장애가 남을 수 있는 만큼 침도 함부로 뽑지 못했다.

    “제 탓입니다. 제가 방주님을 제대로 보필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을.”

    “조천방주께서 사정을 아시면 오히려 기뻐하시면서 치하하실 것이오. 서 당주가 빨리 결단해준 덕에 이길 수 있었으니까.”

    빈말이 아니다. 만약 그때 서만동이 우물쭈물했다면 승패의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시오.”

    “여러분 덕분입니다.”

    서만동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뒤에 있던 간부들도 함께 예를 갖추었다.

    하후진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우린 공치사 필요 없수. 돈으로 주시구랴.”

    참 분위기 깨지만 강엽은 뭐라고 하지 않았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거든.’

    하후진의 말처럼 낭인에겐 공치사가 필요 없다. 돈과 명성이야말로 낭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였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서만동이 알아서 잘 챙겨주겠지만,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법.

    “무, 물론이지요.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두 분 편히 쉬십시오.”

    하지만 서만동의 시련은 끝나지 않으려는지 저편에서 조천방도 몇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다, 당주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거룡방이 다시 쳐들어왔나?”

    “아뇨. 그게 아니라....”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태화문이 왔습니다!”

    “태화문의 누구 말이냐?”

    “그 뭐시냐. 이공녀라는 웬 미인인데, 뒤에 주렁주렁 잔뜩 달고 왔는데요?”

    “이런. 하필 이런 때에....”

    서만동은 조천방주가 조영옥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도 말이다.

    “설마 이제 와서....”

    “아마 그러진 않을 것이오.”

    강엽이 말을 보태자 서만동이 얼른 돌아봤다.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고견까지야. 그냥 감이오. 조영옥이 이런 일로 어깃장을 놓진 않을 거란 감.”

    물론 사람 마음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조영옥은 감정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반대로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위해 감정을 꾹꾹 숨기고 음모를 꾸민다면 모를까.

    서만동이 조금 고민하다 주저하며 물었다.

    “혹시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까지 말이오?”

    “예, 두 분이 함께 가주시면 든든할 것 같습니다. 성가신 부탁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뭐, 그 정도라면야....”

    귀찮긴 해도 병풍처럼 서 있는 정도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조영옥이 왜 왔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축하 인사만 하러 오진 않았을 텐데.’

    * * *

    “조천방의 승리를 축하드려요.”

    “가, 감사합니다.”

    “아직 경황이 없으신 줄 압니다. 하지만 본문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실례를 무릅썼어요.”

    “...도움이라니요?”

    서만동을 비롯한 조천방의 인사들이 의아해하는 반응을 보이자 조영옥이 생긋 웃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마치 꽃이 활짝 피어난 것처럼 눈부신 미소였다.

    “크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전쟁은 끝났습니다. 태화문이 나설 일은 없을 텐데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넋을 잃었던 서만동은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하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다시 평정심을 잃을 뻔했다.

    “귀방의 방주님이 깨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본방에도 의원은 있습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이런 일엔 의원보다는 경혈에 해박한 고수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서만동은 강엽과 하후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침만 뽑는다고 되는 건 아닐 거다. 마혈인 천주혈을 찔렀는데 기절한 건 충격으로 기의 운행이 흐트러진 탓일 테고... 그걸 바로잡으려면 아마 특수한 공부가 필요하겠지.’

    강엽도 여러 비급들과 의서를 읽고 경혈에 대해 공부했지만, 조천방주처럼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조영옥이 조천방주를 살려낼 수 있다면... 한번 봐둬야겠군. 나중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서만동은 쉬이 결정하지 못했다.

    조영옥의 의도는 둘째 치고 그녀가 조천방주를 일깨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미리 말씀드리면 도움을 주실 분은 제가 아니에요. 저와 함께 오신 분이시죠.”

    “예? 그럼 누구십니까?”

    “노부다.”

    서만동이 어디 가서 반말을 들을 나이와 지위는 아니지만, 조영옥과 함께 온 노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만동 역시 감히 무례를 따지지 못했다.

    여태 드러나지 않았던 노인이 앞으로 나서자 가히 태산과 같은 기세가 장내에 드리웠던 것.

    “큭, 저건 또 뭔 괴물이야...!”

    하후진도 식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다들 숨통이 조이는 압박감에 뭐라고 말도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힘든 싸움을 치르느라 심신이 약해진 사람들은 무릎이 후들거리다 못해 쓰러질 지경.

    하지만 그때 강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노인장, 객 주제에 무례하군.”

    혈공진기를 일으켜 저항하기 시작하자 노인의 눈이 번뜩였다.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 향한 기세가 강엽에게 집중되었다. 종전의 몇 배나 되는 기세가 몰려들자 강엽의 어금니가 악다물렸다.

    ‘암검주는 상대도 안 되는 고수다!’

    모산혈조나 빙궁의 장로인 빙오선을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기파였다. 한계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지만 꾹 참고 버텼다.

    “...이걸로는 못 미쳐.”

    모산혈조도, 빙오선도, 그리고 눈앞의 노인도.

    강엽에게 힘을 준 진조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흐읍!”

    힘겨운 한 걸음.

    눈에 핏발이 선 강엽이 기어이 한 발을 내딛으면서 노인의 기세를 밀어낸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흩어지는 기세.

    노인이 놀란 얼굴로 경탄했다.

    “싸우는 걸 보고 알았다만... 역시 예삿놈이 아니구나.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을꼬?”

    강엽이 다가오자 위기감을 느낀 태화문의 무사들이 병장기를 잡고 노인의 앞을 막아섰다.

    “다가오지 마시오. 더 이상 다가온다면....”

    “갈-!”

    노인의 외침에 태화문의 무사들이 흔들렸다.

    “어딜 감히 끼어드는 것이냐!”

    “하오나...!”

    “비켜서지 못할까!”

    태화문의 무사들은 물러나는 대신 조영옥을 향해 말려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조영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싸우러 온 게 아니에요, 노사. 기세를 거두세요.”

    “쩝, 한창 재밌어지려고 했는데....”

    노인은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시면서도 조영옥의 째릿한 눈빛을 받자 얼른 기세를 거두었다.

    온몸을 옥죄인 압박감이 사라지자 강엽이 몸을 비틀거리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입 안에 쇳맛이 감돌았다. 단지 노인의 기세에 항거한 것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빌어먹을 늙은이가... 진작 그만둘 것이지.’

    다행히 내상은 눈 깜짝할 새에 아물었다. 앞머리를 쓸며 몸을 일으킨 강엽이 노인을 노려봤다.

    “장난이 지나치시군, 노인장. 객이 주인을 협박하는 게 태화문의 법도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노사께서 선을 넘으셨습니다.”

    조영옥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이야 기세 싸움을 했다고 쳐도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명백히 도를 넘었다. 불과 열을 세지도 못할 짧은 시간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조천방의 방도들께도 사과드립니다. 노사께서 간만에 전장에 오셨더니 들뜨신 모양입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기분이 좋진 않아도 상대는 대방파의 공녀다. 먼저 사과를 하니 따지고 들 명분이 없었다.

    “노사.”

    “으음, 실례했소이다.”

    전혀 실례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노인도 자기가 과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순순히 사과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여기 계신 풍도마장(風濤魔掌) 노사께서 조천방주님을 봐주실 겁니다.”

    “뭐, 뭣!?”

    “풍도마장이라니...!”

    다들 당혹스러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영옥의 말대로라면 체신머리없이 행동한다고 욕먹었던 노인이 태화문주의 측근이라는 뜻이었으니까.

    비록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난 몸이지만, 풍도마장은 한때 태화문을 대표하는 고수 중 하나였다.

    태화문의 모든 장법을 섭렵하여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진 노고수.

    당금 무림에서 장법으로 유명한 고수들 열 명을 꼽으면 반드시 들어갈 기인이었다.

    “풍도마장 노사께서는 태화문에서 주인 없는 무공을 복원하시는 무학자(武學者)로도 활동하셨어요. 그만큼 경혈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시니, 조천방주님을 깨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대가가 있습니까?”

    “아뇨.”

    조영옥이 고개를 저었다.

    “사업적으로 논하고 싶은 건 있지만, 그건 조천방주님께서 깨어나시고 난 뒤의 일. 이건 위대한 승리를 거둔 귀방에 대한 경의입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일은 저와 태화문의 이름을 걸고 없을 거라고 말씀드리지요.”

    서만동이 주변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했다.

    비록 첫 인상은 좋진 않았지만, 풍도마장 같은 기인이라면 믿고 맡겨볼 만하지 않겠는가?

    * * *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조영옥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목함을 내밀었다.

    “무엇이오?”

    “본문의 요상약이에요. 노사의 기세를 감당하시느라 내상을 입으신 것 같은데.”

    “기왕 줄 거면 다른 걸 줬으면 좋겠는데.”

    “원하시는 게 있나요?”

    “솔직한 대답.”

    “무슨 말씀이신지....”

    “거룡방은 어찌할 참이오?”

    “흐음.”

    조영옥이 잠시 시간을 두고 입을 열었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는데, 조금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거룡방주는 죽었고, 귀백량도 죽었소. 귀백량은 은패급 낭인한테 죽었다는군.”

    “....”

    “거룡방주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면 거룡방은 무주공산 아니오?”

    “하지만 구양세가가 있어요.”

    “어디까지나 배후에 있을 뿐이지. 그들이 대놓고 거룡방의 일에 참견할 권리는 없소. 거룡방에 남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말이오.”

    “실제로 그런 건 아니죠.”

    “태화문이 비호해준다면?”

    “예?”

    “거룡방주 다음 실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구양세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거룡방주와 구양세가에 불만을 품고 있다면.”

    “.......”

    “물론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릴 것 같지 않은데.”

    성동격서.

    조천방을 노리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으면서 실제로는 거룡방을 꿀꺽 삼킨 것이다.

    “원래는 조천방을 집어삼키고 여세를 몰아 거룡방까지 굴복시킬 계획이었겠지.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목표를 바꾸었을 테고.”

    그렇다고 해도 조영옥이 손해를 본 것은 없었다.

    오히려 거룡방을 이용해 의창에 태화문의 깃발을 꽂고 구양세가의 턱밑에 칼을 겨눈 형국이 되리라.

    “조천방을 찾아온 이유도 반목하기보다는 협력이나 동맹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아니오?”

    대등한 입장이라면 조천방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이 거룡방과의 전쟁으로 세가 약해진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추측이 틀렸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맞아요.”

    “...솔직한 대답을 요구... 응?”

    “맞다고요. 짜증날 만큼 잘 아시네요.”

    조영옥이 허탈하게 웃었다.

    딱히 단서를 주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정답을 찾았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언제 아셨어요?”

    “조천방주와 만났을 때.”

    “뭐라고요?”

    “만날 이유가 없는 두 사람이 왜 만났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소. 어쩌면 두 사람이 이미 말을 맞춘 게 아닐까 하는.”

    “하... 그것만으로 알았다고요?”

    “다행히 오답을 짚지는 않은 것 같군.”

    “강 무사.”

    “왜 그러시오?”

    “저랑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요?”

    “갑자기 뭔 뜬금없는.”

    “호법 자리를 약속드리죠. 귀찮은 일은 없고 권력만 잔뜩 휘두를 수 있어요. 일인지하 만인지상. 사실상 이인자의 자리예요.”

    “거절하오.”

    “왜요?”

    “조직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낭인전도 조직이잖아요.”

    “싫으면 언제든 나올 수 있지.”

    “아, 그건 좀....”

    “내가 좀 자유로운 영혼이라.”

    “그럼 장기 고용은 어때요? 한 삼 년만 고용하죠. 삼십만 냥 드릴게요.”

    “일 없소.”

    강엽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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