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8화 (37/450)

8화. 항쟁 (3)

안쪽에도 적은 있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죽엇!”

강엽은 멈추지 않았다.

칼날을 슬쩍 피하면서, 복도를 장식한 화병의 주둥이를 잡고 호쾌하게 후려갈긴다.

“느려.”

쨍그랑!

“커윽!?”

턱주가리가 깨진 칼잡이가 자빠졌다.

강엽은 손에 남아있는 잔해를 역수로 바꿔잡고, 엉거주춤 서 있는 다른 칼잡이를 향해 던졌다.

칼잡이는 고개를 틀어 잔해를 피했지만 이미 그 앞엔 주먹을 들어올린 강엽이 있었다.

안면을 맞은 칼잡이가 눈이 게게 풀리는 것과 동시에 복도 양옆의 벽지가 찢어지면서 칼날들이 불쑥 나온다.

우검을 피하면 좌검이 옆구리를 파고들고, 좌검을 피하면 우검이 목을 훑을 판!

그러나 초감각을 쓰고 있던 강엽이 한 걸음을 물러나니 좌우의 쌍검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찰나 용린투를 낀 손날이 칼날을 깨뜨렸다.

“아니!?”

“괴물 새끼...!”

강엽이 실소했다.

“늬들이 약한 건 아니고?”

안면에 한 방씩 먹여줘서 기절시켰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처리하며 길을 여니 어느덧 가장 안쪽에 있는 회의실에 다다랐다.

화려한 장포를 입은 초로인이 상석에 앉아서 악귀처럼 일그러진 낯짝을 하고 있었다.

“부하들 다 쓰러졌는데 꼭꼭 숨어있나?”

“이놈, 귀영...!”

생면부지의 관계인데도 보자마자 알아보는 건 바깥의 소란을 들었기 때문일까?

강엽은 길쭉한 탁자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숙정방주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지. 무림에서 은원을 지면 잘잘못을 따져봤자 소용없다고 말이야.”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숙정방주가 붙같이 화를 냈지만 강엽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원인을 찾자면 당신 아들에게 있지. 내 영약을 빼앗겠다고 패거리를 잔뜩 끌고 왔거든. 그래서 죽였다. 다른 놈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려고.”

“감히!”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강엽의 눈빛에 살기가 흘렀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뭣이?”

“내가 여기 오는 동안 몇 명이나 죽였을까?”

“....”

“두 명이다. 중상을 입은 놈들 중에 몇 놈 더 죽었을 순 있긴 한데, 뭐 그것까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고....”

언제나 상대를 죽이는 싸움만 할 순 없다. 이번에 수련을 한다고 여기고 스스로에게 과제를 부여했다. 가능하면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하는 것.

“그런데 당신은 살려줄 수 없어.”

숙정방주는 적수가 아니다.

하지만 어디 꼭 무공으로만 상대를 죽이라는 법이 있던가?

“내가 당신을 살려줘도 당신은 자객을 고용하거나, 독살하려고 할 테니까.”

원독에 가득찬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강엽이 일어서며 말했다.

“칼을 뽑아라, 숙정방주. 우리 둘 중에 한 명은 이 방을 못 나갈 거다.”

“...오냐, 그러자꾸나.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내 아들의 무덤에 바칠 것이야!”

어금니를 악다문 숙정방주가 몸을 일으키며 톱날처럼 뾰족한 거치도(鋸齒刀)를 빼들었다.

서로를 노려본 두 사람이 몸을 날렸다.

쐐액!

길쭉한 탁자 위에 올라선 두 사람이 부딪치고....

“크억!”

묵직한 충돌음을 내며 날아간 숙정방주가 벽에 부딪치고 한 됫박이나 되는 피를 울컥 토했다.

탁자에서 내려온 강엽이 발치에 굴러다니는 거치도를 주워서 숙정방주의 턱밑에 들이댔다.

“남은 가족 있나?”

“...쿨럭! 그건 왜 묻는 거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흐흐! 내 아들을 죽이고, 날 죽이려는 놈이... 남은 가족들을 살려주겠다고?”

“믿을지 안 믿을지는 당신 자유지만,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대가가 있겠군.”

“당신 재산.”

“...좋다.”

평생을 흑도에 몸담은 숙정방주는 남은 가족들의 운명을 손금처럼 내다볼 수 있었다.

거리에 나앉거나 부하들의 노리개가 될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으리라.

“...침상 위에 산수화 그림이 있다. 그 뒤에 금고가....”

유언을 남긴 숙정방주의 숨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맥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확인한 강엽이 숙정방주의 시체를 탁자 위에 눕히고 밖에 나섰다.

그때까지 전각을 에워쌌던 칼잡이들은 강엽이 상처 하나 없이 나타나자 흠칫했다.

방주의 거치도를 바닥에 꽂은 강엽이 선언했다.

“방주는 죽었다.”

“......!”

“누가 가장 서열이 높지?”

“.......”

칼잡이들이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한쪽에 시선을 던졌다. 한쪽 눈에 안대를 낀 애꾸 사내가 긴 장탄식을 토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제가 서열 사위입니다.”

“삼위가 아니라?”

“아까 전에 죽이셔서....”

강엽을 포위하라고 했다가 조풍을 맞고 얼굴이 도려진 사내가 서열 삼위였다.

방주와 부방주에 이어 서열 삼위까지 죽었으니 애꾸 사내가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셈.

“네가 오늘부로 부방주다.”

애꾸 사내의 안색이 환해졌다.

강엽의 그 말로 그가 숙정방을 멸문시킬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복수도 급이 맞아야 하는 거지.’

하물며 죽음을 도외시하고 복수할 만큼 방주에게 충성한 것도 아니었다.

“방주의 가족들을 데려와라.”

그때까지만 해도 애꾸 사내와 칼잡이들은 강엽이 방주의 가족들을 다 죽일 거라 생각했다.

언젠가 그들이 복수를 부르짖기 전에 미리 후환을 없애두려는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살짝 굳어진 애꾸 사내는 부하들에게 시키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부하들과 함께 갔다.

* * *

방주의 첩들과 자식들이 포박되어 끌려왔다.

그들 역시 강엽이 일으킨 소란을 들은 만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색이 허옇게 질린 채 사시나무처럼 떠는 그들을 일별한 애꾸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분부하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누가 묶으라고 했나?”

“...예?”

“풀어줘라.”

애꾸 사내는 당황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애초에 팔만 묶은 만큼 푸는 것은 쉬웠다.

“오면서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숙정방주는 죽었다. 내가 죽였지.”

강엽은 그 말을 한 뒤에 숙정방주의 유족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관찰했다.

지아비와 아비가 죽었다는 말에 놀란 그들은 이어지는 말엔 숫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경악했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예상했다는 듯이 착잡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젊고 아리따운 묘령의 여인이었다.

“방주는 내게 자신의 재산을 바치는 대가로 당신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전후 관계가 뒤바뀐 말이었다.

그러나 강엽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저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난 고인의 유언을 들어줄 생각이다. 하지만 숙정방의 주인이 될 생각은 없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애꾸 사내와 칼잡이들이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가장 서열이 높은 애꾸 사내를 부방주로 임명했기 때문에 당연히 강엽이 방주가 될 줄 알았던 것이다.

강엽은 처음부터 눈여겨봤던 여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름이 뭐지?”

“...단목정이에요.”

“단목이 성씨지?”

“예.”

“당신이 오늘부로 방주다.”

“...네?”

단목정이 눈을 껌벅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다른 이들도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본인이 방주가 될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자기가 죽인 사람의 딸을 방주로 임명하다니?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만?”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기 싫으면 됐어. 당신 뒤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아무나 앉히면 돼.”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단목정을 고른 건 그나마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닥친 현실만 보고 전후사정을 알아볼 눈치라면, 적어도 복수하겠다고 자객을 보내는 짓 따위는 안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앉힌 인간이 딴마음을 먹으면 귀찮아진단 말이지.”

강엽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단목정은 말뜻을 알아듣고 창백하게 질려갔다.

행여나 복수를 꿈꾼다면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겠다는 엄포였다.

“제, 제가 방주가 되겠습니다!”

다른 가족들에게 방주 자리를 맡길 순 없었다.

그녀도 첩실 소생이지만 다른 첩실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들의 자식들은 아직 어렸다.

“부방주, 인사해라. 새로운 주군이다.”

졸지에 전대 방주의 서출을 신임 방주로 모셔야 하는 애꾸 사내의 안색이 거멓게 죽었다.

하지만 강엽이 발하는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단목정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 앞으로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단목정도 황당했다.

가족들을 포승줄로 묶은 작자를 부하로 받아들이다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긴 어차피 실권 없는 허수아비인데 아무렴 어떠랴?

‘저 남자를 뒷배로 삼는 수밖에....’

굳이 전대 방주의 딸을 신임 방주에 임명한 건 애꾸 사내랑 서로 견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애꾸 사내 역시 단목정이 방주로 있는 한, 그 뒤에 강엽이 있는 한 눈치를 봐야 했다.

“단목 방주.”

“네....”

일단 불러서 대답은 했는데 상대를 어찌 부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은공이라고 하자니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공자님이라고 부르자니 무례하게 느껴진다.

잠시 생각에 빠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하명하십시오... 주군.”

강엽이 속으로 씩 웃었다.

‘역시 이 여자를 고른 게 정답이었어.’

자신의 처지를 알고 강엽을 윗사람으로 대함으로써 상하 관계를 명시하는 한편,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숙정방이 여전히 강엽의 아래에 있음을 암시했다.

“강 무사라고 불러라. 주군은 영 낯간지러워.”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명령이다.”

“...예, 강 무사님.”

“난 전대 방주의 금고를 털 거다.”

“모시겠습니다.”

단목정이 의전을 책임졌다.

* * *

금고를 열자 금괴와 은원보를 비롯해서 귀중한 보석들, 집문서와 전답의 대장 등이 나왔다.

‘은전은 취급도 안 했구만?’

강엽 못지않게 놀란 단목정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전대 방주가 이렇게까지...!”

“음? 아버지라 안 부르나?”

“네. 적통과 서출은 달라야 한다면서 못 부르게 했습니다. 소방주도 길길이 날뛰었고요.”

목소리게 한기가 깃든 것을 보니 전대 방주나 소방주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사이가 좋았다면 아무리 가족의 목숨이 걸렸어도 그렇게 쉽게 제안을 받지 않았겠지.’

적통과 서출이 차별받는 건 비단 숙정방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집안마다 차이가 있긴 해도 둘이 대등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없었다.

그때 단목정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앗, 이건...!”

낡은 책자였다.

“전대 방주의 비급인 것 같습니다.”

“흐음.”

먼저 읽어본 강엽이 비급을 넘겨주었다.

숙정방의 가전심법이었다.

“이건 알아서 수련하고... 오.”

계속 금고를 뒤져본 강엽이 눈을 반짝였다.

비급이 있던 곳 뒤편에 목함이 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자 엄지손톱보다 약간 큰 거무튀튀한 단환 여섯 알이 들어 있었다.

“훗, 운이 좋군.”

“네?”

“분명 영약일 거다. 그러니 금고에 뒀겠지. 이름은 모르겠지만 전문가를 불러서 감정을 하면 무슨 약인지....”

“아, 저... 강 무사님?”

강엽의 말을 끊는 게 무서웠지만 계속 착각을 하도록 놔둘 수가 없기에 눈 질끈 감고 말했다.

“그거... 정력환입니다.”

“뭐?”

“첩실들이 떠든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대 방주가 그... 요즘 기가 허해서 정력환을 먹는다고요. 하, 하기 전에 금고에서 꺼낸다고....”

“....”

강엽은 순간 욕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뚜껑을 덮었다.

‘빌어먹을, 그걸 왜 금고에서 꺼내는데?’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심을 참느라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단목정의 얼굴도 터질 듯이 벌게졌다. 오해를 잡아주기 위해서라지만 외간남자 앞에서, 심지어 부친과 관련된 일로 정력 운운하니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방주가 해줘야 하는 일이 있어.”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한 말. 하지만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그녀도 간절했기 때문에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물론 목소리가 흔들리는 건 별수 없었다.

“마, 말씀하세요.”

“노주 근처에 마교도나 위험한 수배자가 있는지 찾아. 찾으면 청송객잔, 그러니까 낭인전 중경 분타에 연통하고. 소문이든 목격담이든 상관없으니까.”

“마교도... 아, 네. 알겠습니다.”

단목정은 사뭇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만약 그런 자들이 어슬렁거린다면 숙정방의 힘만으로는 당해낼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지만, 숙정방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거다. 사업이나 중대사는 부방주랑 상의해서 결정해.”

강엽은 딱히 숙정방을 수족으로 부릴 생각이 없었다.

다만 노주는 예로부터 사천과 귀주, 운남이 맞닿는 관문도시라서 상인들의 왕래가 잦은 편이었다. 마교나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들이 출몰한다면 소문을 빨리 접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대략의 일을 마무리한 뒤에 노주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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