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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39화 (38/450)
  • 8화. 항쟁 (4)

    중경에 돌아온 건 다음날 저녁이었다.

    갈 때는 경공을 써서 험한 산세와 드문드문 이어진 관도를 넘었지만, 올 때는 단목정이 구해준 배편을 통해 편하게 왔다.

    사실 단목정은 강엽이 더 머물러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다만 강엽으로선 조천방의 의뢰가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노주에서 중경까지 굽이굽이 이어진 장강의 물줄기는 육로보다 훨씬 길지언정 물살을 탄 덕에 결과적으로는 더 빨랐다.

    물살만 받쳐주면 하루에 백 리도 갈 수 있는 게 뱃길의 힘이었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에 출발한 배가 어두컴컴해졌을 무렵 중경의 포구에 도착했다.

    물론, 약간의 햇볕도 받고 싶지 않은 강엽은 선실에 처박혀서 가져온 물건들을 살펴봤다.

    숙정방주의 금고가 너무 컸기 때문에 안에 있는 재보들을 모두 가져오진 못하고, 부피에 비해 가치가 크고 처분하기 쉬운 고액전표와 금괴들 위주로 가져왔다.

    고액전표만 해도 삼만 냥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금괴나 미처 가져오지 못한 보석들, 은원보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지 모른다.

    ‘좋아. 영약 몇 개는 더 살 수 있겠어.’

    내공을 쌓는 데는 자잘한 영약 여러 개보다는 비싼 영약 하나가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약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몸이 잘 받는 영약이 있는가 하면, 독 같은 영약도 있는 법.

    자기 몸에 잘 맞는 영약을 찾아야지, 무조건 비싼 영약을 먹는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강엽은 최대한 다양한 영약들을 사둘 작정이었다.

    만약 시중에 영약이 없다면 돈은 묵혀둘 것이다. 지금은 못 구해도 나중엔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마침 선체가 돌기 시작했다.

    포구로 향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침상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맬 때였다.

    “들어가시오!”

    “지금 내리면 안 되오!”

    경기가 들린 선원들의 외침에 뱃전에 모인 선객들 사이에 술렁임이 번졌다.

    “음?”

    눈살을 찌푸린 강엽이 문을 열었다.

    봇짐장수가 역정을 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보시오! 바로 앞에 뭍을 두고 내리지 말라니 무슨 소릴 하는 게요!?”

    “...싸움이 났소.”

    그 말에 술렁임이 더 커졌다.

    “싸움이라니?”

    “우리도 잘 모르겠소. 다만 무림인들이 포구 뒤쪽에서 칼부림을 하고 있으니 내리면 안 되오! 포구 분위기가 하도 이상해서 먼저 살폈다가 부리나케 돌아온 거요!”

    선원들이 포구와 연결된 밧줄을 풀려고 했다.

    흥분한 무림인들이 배로 달려와서 해코지를 할까 싶어 그전에 포구를 떠날 생각이었다.

    “아, 아니! 우린 어쩌라고...!”

    “에잇, 죽는 것보단 낫잖소! 기회 봐서 다시 내려줄 테니 좀만 기다리시...!”

    그때 어딘가를 보던 선원의 눈이 커졌다.

    강엽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사람?’

    무림인들의 싸움 탓인지 객잔과 주루의 등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그렇기에 포구는 칠흑처럼 어두웠는데, 그곳에서 웬 남자가 나타나더니 배를 향해 뛰어왔다.

    “사, 살려주시오!”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예리한 빛살이 쏘아지며 남자의 어깻죽지를 뚫었다.

    “끄아아아악!”

    자빠진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실로 필사적이었다.

    “끄윽, 제발...!”

    “선주님, 어찌해야 할지....”

    선원들이 백발의 건장한 노인을 돌아봤다.

    노인이 일갈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무림인들의 싸움에 끼어들면 피를 보는 법.

    선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그들이 화를 자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원들 역시 알고 있었기에 동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주워섬기지 않았다.

    “싸움이 예까지 번질 모양이다. 밧줄 풀어라!”

    그때 어둠 속에서 젊은 청년이 등장했다.

    포구에 정박한 배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더니 쓰러진 남자의 어깨에 박힌 비수를 거칠게 빼냈다.

    “아악!”

    “그거 가지고 엄살은. 그나저나 저거... 설마 조천방의 배인가?”

    장강을 가르는 배들이 모두 조운방회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운방회에 속한 배들은 돛이나 선수 등에 표식을 해두었다.

    장강의 수적들 때문이다.

    표국들이 녹림과 상극이면서도 나름 공존하는 것처럼 조운방회 또한 수적들과 죽자고 싸우진 않는다.

    그러나 보호세를 받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배 전체를 약탈하려는 수적들이 있는데, 그런 놈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표식을 새긴 것이다.

    우릴 건드리면 조운방회 전체가 나서 응징할 거라는 경고.

    하지만 이 경우엔 그게 독으로 작용했다.

    “이런. 이거 뜻밖의 월척인데....”

    비수에 묻은 피를 핥은 청년이 히죽거렸다.

    다음 순간 그가 배를 향해 달려가서 밧줄을 푸는 선원들을 향해 비수를 던졌다.

    “조심해!”

    위쪽에서 터진 경고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선원의 눈동자에 점점 커지는 비수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푸학!

    허공에 핏물이 튀었다.

    “찢어죽일 놈!”

    치를 떤 선원들이 손도끼나 분수자(分水刺) 등을 꼬나쥐었다.

    그들도 싸움엔 이골이 났다. 때론 말이 안 통하는 수적들과 싸우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수를 던진 청년은 이미 양손에 가느다란 협봉검(狹鋒劍)을 쥐고 있는 상황.

    미끄러지듯 선원들 사이를 빠져나온 그가 번갯불 같은 검격을 쏟아내자 비명과 선혈이 뿌려졌다.

    “커허...!”

    “흥.”

    그때 선주의 노성이 울렸다.

    “밧줄 끊어라!”

    선객들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배와 땅을 잇는 나무판자도 회수한 지 오래.

    마음 같아선 자식같은 선원들을 죽인 놈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죽이고 싶었지만....

    “어딜 도망가!? 조천방 배는 도망 못 가!”

    코웃음을 친 청년이 위로 불쑥 솟구친다.

    뱃전에 모인 선객들이 파리해져서 떨었다.

    부채꼴로 청년을 포위한 선원들이 죽창을 찔렀지만, 청년은 경쾌한 보신경으로 위아래로 몸을 뒤집으며 양손의 협봉검을 휘둘렀다.

    수십 줄기의 검광이 죽창 끄트머리를 난상으로 잘라버리자 선원들이 아연실색했다.

    “고수...!”

    “이제 아셨어?”

    죽음을 직감한 선원들이 이를 악물었다.

    퍼억!

    “어?”

    선원들이 눈을 껌뻑였다.

    “무, 무슨...?”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았다.

    오히려 저승사자처럼 행세했던 청년이 이마 한가운데 도끼날이 박힌 채 죽어 있는 게 아닌가?

    모두가 당황해서 어안이 벙벙해지는데 흑색장포를 입은 공자가 손도끼를 거칠게 회수했다. 누군가 뱃전에 흘린 것을 주운 것이다.

    “손맛 좋은데.”

    “당신은...!”

    선주가 침음했다.

    누군가 했더니 숙정방에서 신경 써달라고 부탁했던 선객이었다.

    시골 농꾼보다도 말라서 무림과 상관 없는 인물인 줄 알았건만, 설마 고수를 단숨에 죽일 줄이야.

    “당신, 아니, 공자는 대체....”

    “아까 죽은 놈이 조천방의 배라고 한 걸 언뜻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배에 타자마자 선실에 처박힌 탓에 몰랐다.

    선주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만.”

    “그럼 거룡방이군요.”

    거룡방이라는 말에 선객들 사이에서 아까 전과는 다른 술렁임이 일었다.

    이번엔 선주도 눈을 부릅떴다.

    “지금 거룡방이라고 했소?”

    “조천방과 거룡방 사이가 험악하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어찌 선객들이 탄 배를...!”

    “죽은 놈 생각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으니 그러려니 해야지요.”

    물론 선객이 탄 배를 습격한 건 아무리 두 방파가 전쟁을 한다는 걸 감안해도 선을 넘었다. 강호에 알려지면 지탄을 받고도 남을 만행.

    ‘저기서 싸우는 건 조천방과 거룡방이겠지.’

    문득 강엽은 이 싸움에 구양세가의 고수들이 끼어들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잠잠해질 때까진 더 떨어지시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조천방의 사람을 보면 알려드리죠.”

    “설마 가실 참이오?”

    “예. 그럼.”

    묵직한 바랑을 멘 강엽이 뱃전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 손에 청년의 골통을 깨부순 손도끼를 든 채로.

    * * *

    청년의 손에 어깻죽지가 뚫린 남자는 강엽이 갈 때까지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 다, 당신은...!”

    “날 아나?”

    “...나, 낭인전에서....”

    남자는 말을 다하지 못했다.

    아마 낭인전에서 봤다는 말이었겠지. 그도 낭인이었던 것이다.

    “저쪽에서 날뛰는 거, 거룡방인가?”

    “그래. 놈들이...!”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혼절했다.

    강엽은 그를 치료해주진 않았다. 시간이 없기도 하거니와, 수중에 금창약 하나 없었다.

    재생력이 있으니 금창약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쓴웃음을 지은 강엽은 배 쪽에 손짓하며 남자를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앞서 내뱉었던 말과 상반되지만, 저들에게 염치가 있다면 이 정도는 해주겠지.

    선원들이 선주에게 의견을 구하자 선주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엽에게 고맙기도 했고, 저만한 강자의 부탁을 거절하면 무슨 꼴을 당할지 두려웠다.

    약과 붕대를 챙긴 선원들이 내려오는 것을 일별한 강엽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아직 계약이 성사된 건 아니지만.’

    조천방의 의뢰를 받긴 했지만, 까다로운 조건을 걸었다. 숙정방의 일로 조천방의 답신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수락했는지 거절했는지 모른다.

    다만 거절했더라도 싸울 가치는 있었다.

    ‘강한 고수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숙정방에 있었을 때, 방도들 몰래 숙정방주의 피를 마시긴 했지만 조금, 아니... 많이 부족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악다구니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강엽은 죽립을 벗었다. 낭인전에 속한 자라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네놈은 또 뭐냐!?”

    강엽이 나타나자 고슴도치러럼 삐죽한 수염을 기른 거한이 콧김을 뿜으며 달려들었다.

    찰나, 강엽의 손에서 빛살이 번뜩였다.

    콰직!

    미간에 손도끼가 박힌 거한이 눈을 까뒤집더니, 대 자로 철푸덕 쓰러졌다.

    강엽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지나가던 선량한 행인이다.”

    “....”

    “뭐, 뭣?”

    죽은 거한의 뒤에 있는 자들이 당황했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이런. 농담인데 모르나?”

    “개새끼야, 그걸 어떻게 알아!?”

    “농담의 미학을 모르는 너희들이 불쌍하다.”

    짐짓 한숨을 내쉰 강엽이 손톱을 뽑았다. 혈공진기에 휘감긴 검은색 용린투에 붉은 기운이 떠올랐다.

    “모르면 죽으셔야지.”

    그리고 피바람이 불었다.

    * * *

    강엽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숙정방과 싸울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땐 혼자 싸웠고, 다수와의 싸움에서 상대가 죽지 않을 정도만 타격을 입혀 제압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이 싸움엔 그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다. 조천방의 무인들과 낭인전의 낭인들.

    자신이 살려준 적이 다시 일어나서 같은 편을 죽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리되면 아군에게 원망을 들을 테니 그때와 같은 선택을 고를 순 없었다.

    “적이다!”

    “어디서 튀어나온, 억!”

    빛살이 밤을 가르고, 조풍이 휘몰아친다.

    숙정방의 칼잡이들이 그랬듯 거룡방의 방도들도 등 뒤를 노리거나 여럿이 포위했다.

    하지만 강엽이 태극의 심상을 담은 보신경으로 부드럽게 휘어버리자 하나도 닿지 않았다.

    팔괘의 이치를 따르는 보법에 태극의 심상이 담기자 흐름이 면면부절 이어졌다.

    전신을 활용한 박투술도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부드럽게 흐른다.

    하나 투로는 부드럽게 이어질지언정 초식을 수발하는 속도는 섬전처럼 빠르다.

    사지백해로 뻗어나간 혈공진기의 경력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부여했다.

    쿠웅!

    진각을 밟자 땅이 흔들리고,

    콰직!

    훑듯이 때린 손등이 뼈를 부수며,

    “아악!”

    손날로 베자 잘려나간 복부에서 내장 조각들이 후두둑 흘러나와 흙바닥을 더럽힌다.

    “켁, 저건 완전 괴물이잖아?”

    혀를 내두르며 그 말을 한 사람은 적이 아니었다.

    조천방의 편에서 칼을 휘두르는 낭인.

    “괜히 비무대회에서 우승한 게 아니구만.”

    그의 이름은 하후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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