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7화 (36/450)
  • 8화. 항쟁 (2)

    문자경이 돌아간 뒤에도 강엽은 접객실을 떠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찻물은 식어버려 차향도 죽었지만, 차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조영옥이 아직 중경에 남아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지만 문자경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왠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경은 태화문의 권역이지. 태화문 입장에선 구양세가가 중경에 진출하는 게 달가울 리 없어.’

    비록 태화문이 중경에 둔 것은 운화장 하나뿐이지만, 모든 문파와 방파가 태화문의 눈치를 본다.

    조영옥이 개최한 연회만 봐도 그랬다.

    문주도 아닌 이공녀가 초대장을 돌리니 백도, 흑도 가릴 것 없이 전부 모이지 않았나.

    하지만 거룡방,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구양세가가 중경에 진출해서 두 대방파가 중경이라는 노른자위의 땅을 두고 다투게 된다면?

    지금이야 태화문의 위세가 드높지만, 구양세가가 중경에 진출하면 이전만 못할 것이다.

    과연 태화문이 그렇게 되는 걸 지켜만 보겠는가?

    “그럴 리가.”

    태화문이 후계자 경쟁으로 바쁘다지만, 바로 그렇기에 외부의 위협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외부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분쇄하는 것이야말로 문주의 권좌에 가까워지는 길일 테니까.

    몇 가지 비약이 따르긴 하지만, 조영옥이 조천방의 일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집단전 훈련을 중경에서 벌인다....’

    본선 참가자들뿐 아니라, 예선에서 떨어진 자들 중 싹수가 있는 자들을 발탁해서 휘하에 들였다.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태화문 본단에 있는 정예들을 불러서 집단전 훈련까지 하고 있다던가.

    조영옥이 어디까지 내다보고 판을 짰는지는 몰라도, 거룡방과 구양세가가 본격적으로 난장을 피운다면 참견할 수도 있었다.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다.

    ‘무서운 여자야.’

    제 한 몸 건사하는 것도 급급한 강엽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장기적인 계획이다.

    그러나 그걸 알았다고 발을 뺄 생각은 없었다.

    “괜찮겠냐? 너무 쉽게 수락한 것 같은데.”

    문자경을 아래층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올라온 장경이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쉽게 수락한 건 아니지.”

    “큭큭, 하긴. 무리한 조건을 좀 붙이긴 했지. 남의 명령 듣지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겠다니.”

    낮에 싸울 수 없는 강엽의 체질상 다소 억지를 부리더라도 관철해야 할 조건이었다.

    그리고 기왕 요구할 거면 낮엔 싸우지 않겠다고 애매하게 말하기보단 남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고 하는 게 더 직관적이고 운신 범위도 넓었다.

    “조천방에서 말도 안 된다면서 깔 수도 있지만... 뭐, 아쉬운 건 그쪽이니까.”

    일거리가 조천방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쪽이 거절하면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면 그만이다.

    문득 강엽이 물었다.

    “낭인들이 많이 모일까?”

    거룡방의 뒤엔 구양세가가 있다.

    아직 소문이 퍼진 건 아닌 모양이지만, 사태를 면밀하게 주시한 자들은 알고 있을 공산이 컸다.

    “낸들 알겠냐. 근데 강호는 넓고 미친놈은 많으니까 의외로 꽤 모일지도 모르지. 돈에 환장했든 싸움에 환장했든 낭인전엔 지가 만족하면 불리한 싸움도 마다치 않을 놈들 천지야.”

    “....”

    그럼 나도 미친놈인가?

    강엽의 표정이 묘하게 떨떠름해졌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보면 자신 역시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가타부타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사나흘쯤 중경을 떠날 거야. 그동안 거룡방이나 구양세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모아줘.”

    “엥? 또 어디 가게?”

    “노주.”

    “...숙정방?”

    숙정방의 소방주가 강엽에게 죽었다는 것은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당시 강엽을 쫓던 세력들에 의해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던 것이다.

    “하긴 그것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네. 안 그래도 숙정방주가 이를 간다고 하던데.”

    물론 원인을 제공한 것은 숙정방이지만, 그들에게 그걸 헤아릴 만한 염치가 있었다면 애초에 남의 물건을 빼앗을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장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호의 은원이란 게 그래. 누가 먼저 잘못했느냐는 건 중요치 않더라고. 가족이나 친인이 죽으면 복수하겠다는 게 무림인들의 심리야.”

    강호의 은원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한번 묶이면 푸는 게 쉽지 않다. 잘라버리는 게 가장 쉽다.

    피로 피를 씻는 복수가 끊이지 않는 이유였다.

    * * *

    중경에서 노주까지는 사백 리 거리였다.

    이틀밤에 걸쳐 노주까지 온 강엽은 적당한 객잔을 잡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숙정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강엽이 문상을 하러 왔다고 여긴 객잔 주인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 것이다.

    숙정방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자 정자와 기암괴석이 딸린 작은 연못이 나왔다.

    강엽은 연못 위에 좌우로 지(之) 자로 나 있는 돌다리를 지나서 괴석 뒤에 몸을 숨겼다. 정확히 한 호흡 뒤에 칼을 찬 숙정방의 칼잡이들이 지나갔다.

    안 그래도 험상궂은 표정이 잔뜩 굳어진 것이 당장 칼부림을 할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강엽이 숨소리도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듣는 귀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입을 놀렸다.

    “내일 떠난다면서?”

    “그렇다더라. 하, 근데 씁....”

    “뭔데 그래, 새꺄.”

    “아니, 씨발. 겨우 한 놈 조지는 데 쉰 명이나 나서는 게 말이 되냐?”

    “어쩌겠냐. 그 한 놈이 소방주랑 부방주까지 죄다 죽였는데. 그 새끼한테 이십 명이 넘게 죽었다며.”

    “썅! 믿을 걸 믿으라고 해야지. 그놈 혼자서 이십 명을 죽였겠어? 다른 놈들이 도와줬겠지.”

    “그놈이 무당파 제자도 이겼다던데?”

    “지랄. 그렇다고 칼 안 들어가냐? 뒤에서 칼침 한 방 빡! 놔주면 말이야. 어? 제깟 놈이 뭘 한 건데?”

    진짜 고수를 접한 적이 없는 숙정방의 방도들은 그들 같은 칼잡이들 수십 명이 뭉쳐 있어도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강엽은 그들의 대화로 숙정방이 내일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올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 그나저나 떠나기 전에 홍하루 앵년이 궁둥이라도 좀 두들겨주고 가야... 엇?”

    말을 하던 칼잡이가 눈을 크게 떴다.

    돌덩이에서 뭔가가 불쑥 나오더니 동료의 뒷목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퍽 소리와 함께 쓰러진 동료의 모습에 칼잡이가 놀라서 고함을 치려고 했다.

    “침입...!”

    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우악스런 힘에 멱살이 잡혔고, 위아래가 뒤집힌 자세로 괴석과 부딪쳤다.

    등이 작살나는 고통에 입이 떡 벌어진 칼잡이의 귀에 차가운 목소리가 꽂혔다.

    “방주 거처가 어디냐?”

    장원이 넓었기에 그냥 봐선 방주의 거처를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칼잡이가 오기를 부렸다.

    “다, 닥쳐! 이 새끼야!”

    “조용히.”

    칼잡이의 볼따구니를 강하게 움켜쥔 채 나직이 경고한다.

    턱뼈가 바스라질 것 같은 고통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진 칼잡이가 읍읍거리며 바동거렸지만, 그럴수록 볼따구니를 틀어쥔 강엽의 악력만 더 강해질 뿐이다.

    “방주가 어딨는지 말하면 살려준다.”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흑도의 칼잡이들과 때론 같은 편으로, 때론 적으로 만나면서 그들의 독기와 깡을 온몸으로 느꼈기에 이들을 어설프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고문을 해본 적은 없지만, 해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는다.

    독기 어린 눈빛을 뿌리는 칼잡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린다.

    “으으읍...!”

    그렇게 다섯 손가락을 부러뜨리자 칼잡이가 바동거리면서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 짓 하면 알지?”

    살짝 손을 내려놓자 헉헉 숨을 몰아쉰 칼잡이가 진저리를 쳤다.

    “크읍. 내, 냇가 따라서... 흐읍, 쭉 가면 내원이 나와. 거길 지나면....”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지만 다행히 알아들을 순 있었다.

    “오냐, 알려줘서 고맙다.”

    강엽이 미련없이 몸을 돌리자 칼잡이의 눈빛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불과 한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등과 허리춤의 칼을 번갈아본 칼잡이가 이를 꽉 물었다.

    아까 전 동료 칼잡이와 주고받은 것처럼 뒤에서 찔러버리면 제깟 놈이 어쩔 거냐는 낙관.

    조심스럽게 칼자루를 잡고 뽑기 시작한다.

    하지만 칼날이 절반 가량 뽑혀나올 때쯤, 창백한 빛살이 목을 긋고 지나갔다.

    “...어?”

    몸이 갸우뚱 기울어진다.

    등을 돌렸던 침입자는 어느 샌가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을 자신을 향해 내밀고 있었다.

    손톱 끝에 맺힌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 기억을 마지막으로, 칼잡이의 의식이 나락에 떨어졌다.

    몸과 작별한 머리가 땅바닥을 굴러 연못에 풍덩 떨어졌다.

    * * *

    강엽은 쥐새끼처럼 숨지 않았다.

    “이 새끼 뭐야!?”

    “막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칼을 뽑는 숙정방의 칼잡이들을 향해 들고 있는 것을 내던졌다.

    수레바퀴처럼 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나무 현판을 본 칼잡이들이 기겁했다.

    길이만 다섯 자가 넘는 데다, 자단목 못지않게 단단한 화리목으로 만든 현판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게 아닌가?

    “피...!”

    콰아아앙!

    현판은 담장과 부딪쳐 우지끈 부서졌다.

    강엽은 안색이 허옇게 굳어진 칼잡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원으로 향하는 원형의 문을 통과해서, 온갖 병장기를 꼬나쥔 적들을 향해 돌진할 뿐.

    이미 강엽이 적이라고 확신한 그들은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칼을 내치고 둔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엇...!”

    “노, 놈이 사라졌다!”

    그들이 공격한 것은 잔상이었으니까.

    영문을 깨닫지 못한 그들의 사이에서 강엽이 홀연히 나타났다.

    가장 먼저 깨달은 자는 장타를 맞고 턱이 돌아갔다. 그 다음에 깨달은 자는 손날로 어깨를 맞고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강엽의 손목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한정된 공간에서 태극의 심상을 따라 곡선의 움직임을 그리며 칼잡이들의 뺨을 후려치고, 발목을 걷어차면서 공간을 넓혀갔다.

    가끔 등으로 상대를 후려치거나 밀착한 상태에서 허벅지로 암경을 뿌리는 등 전신을 무기로 썼다.

    칼잡이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경악으로 굳어진 자들을 향해 강엽이 말했다.

    “도망쳐라.”

    “뭐, 뭐!?”

    순간 다들 무슨 소릴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강엽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도망치면 뒤쫓지 않겠다. 하지만 덤비면 죽일 거다.”

    실제로 자신의 등을 치려고 했던 놈 말고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물론 쓰러진 놈들은 중상을 입은 만큼 내버려두면 숨이 끊길지도 모르지만, 의원에게 데려가면 최악은 피할 수 있었다.

    “이 새끼! 네놈이 누군지 몰라도...!”

    “귀영.”

    “뭐?”

    “나 죽이러 오겠다면서? 그래서 내가 먼저 왔는데.”

    “이런 미친!”

    내일 아침 방을 떠나서 강엽을 죽일 생각을 품었으면서도 설마 강엽이 먼저 공격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숙정방의 칼잡이들이었다.

    “놈을 에워싸라!”

    숙정방의 간부가 외쳤다.

    강엽에게 많이 당하기는 했어도 아직은 칼잡이들의 숫자가 많았다.

    쪽수를 살려 강엽을 포위한 다음 차륜전으로 말려죽일 작정이었다.

    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이 많은 수를 전부 당해내진 못할 테니까.

    놈도 그걸 알고 있기에 도망치는 놈은 쫓지 않겠다고 연막을 친 것 아니겠는가?

    “씨발, 미친 새끼가 뒤지려고! 네놈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말이 유언이 되었다.

    멀리서 날아온 조풍이 그의 머리를 하관 위로 절반쯤 날려버린 것이다.

    “긴말 안 한다.”

    강엽이 한 걸음을 내딛자 반원으로 에워싼 칼잡이들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이 시체가 선이다.”

    “.......”

    칼잡이들은 식은땀을 흘리거나, 마른침을 삼키거나, 괜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들의 면면을 훑어본 강엽이 등을 보여도, 누구 하나 뒤를 칠 엄두를 못 낸다.

    강엽은 그렇게 방주의 거처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