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산적 (5)
“으랏챠!”
호쾌한 기합과 함께 양날도끼가 떨어졌다.
쩌억!
한 번의 도끼질에 지붕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전에 지붕에서 벗어나며 안전하게 땅에 착지한 흑수양은 도끼날의 무식한 위력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강하다고는 들었지만....’
팽수현에도 무림 방파는 있었다.
인원이라고는 쉰 명 남짓밖에 안 되는 군소방파였지만, 문주는 제법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도적 무리는 무찌를 수 있을 만큼 강했다.
하지만 문주를 포함한 주요 제자들이 눈앞의 비웅채주(飛熊寨主)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흑수양 역시 낭인업계에서 인정받는 은지패의 낭인이었음에도 쉽사리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비웅채주 역시 마찬가지.
흑수양은 그가 혼신을 다해 휘두른 도끼의 궤적을 미리 예측한 것처럼 능란하게 대처했다.
흑풍사우의 둘째이자 채주와 마찬가지로 쌍도끼를 쓰는 호종산과 수없이 대련해본 경험 덕이었다.
두 사람의 무공도, 도끼의 크기도 다르지만 똑같은 쌍도끼다 보니 비슷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못 막을 일격은 깔끔하게 피하면서 때론 과감하게 급소를 노리자 비웅채주가 짜증을 냈다.
“이런 씨부럴 쥐새끼 같은 놈이...!”
급한 대로 도끼날로 튕겨보려 했지만, 내공이 듬뿍 담긴 칼날은 비웅채주의 도끼날을 비스듬히 타고 올라와서 목을 노렸다.
비웅채주로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비웅채주가 히죽거리는 순간, 흑수양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칼의 방향을 바꿨다.
따앙!
어둠 속에서 쏘아진 비침이 도면에 막혔다.
그 틈에 비웅채주가 쌍도끼를 휘두르자 흑수양은 급히 좌장을 뻗어 장풍으로 견제하며 쭉 밀려났다.
비웅채주가 놀라워했다.
“대단한걸! 어떻게 안 거지?”
“...경험이지.”
사실 반쯤은 운이었다.
비웅채주의 눈동자가 슬쩍 오른쪽으로 향했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만약 비웅채주가 좀 더 고단수였다면, 혹은 비침이 막기 어려운 곳을 노렸다면 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불리한 건 여전하군....’
만만치 않은 비웅채주를 상대하면서 어둠 속에 숨은 암습자를 신경써야 하니까.
강엽이라면 암신을 써서 암습자부터 죽이고 비웅채주를 상대했겠지만, 흑수양에겐 강엽처럼 사람의 감각을 농락하는 재주가 없었다.
만약 그가 암습자부터 처리하려고 든다면 비웅채주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비웅채주부터 공격하자니 언제 다시 비침이 날아올지 모른다.
이번엔 운 좋게 막았어도 다음엔 어떨까?
‘그렇다고 도움을 청하기엔....’
흑풍사우의 삼인방처럼 흑수양도 몇 명의 낭인들을 이끌고 산채를 들쑤시고 있었다.
하나 그들은 비웅채주의 처소를 지키는 산적 두 명한테 발목이 묶여 있었다.
마치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생긴 쌍둥이였는데, 훨씬 많은 낭인들에게 둘러싸였는데도 오히려 한 몸처럼 연수하며 그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흑수양이 굳은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자 비웅채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어떠냐. 이젠 아무것도 못하겠지? 그러게 왜 주제도 모르고 덤비냐고, 이 새끼야!”
노호성을 토한 비웅채주가 몸을 날렸다.
양손에 든 양날도끼가 신들린 듯이 춤을 추며 흑수양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흑수양은 비침이 날아온 방향을 염두에 두며 비웅채주의 공세를 피해 이리저리 위치를 바꿨다.
어둠 속의 암습자가 함부로 비침을 쏘지 못하도록.
“대형!”
문경우가 낭인들과 함께 달려왔다.
흑수양이 비웅채주와 싸우는 것을 보고 돕기 위해 온 것이다.
흑수양이 대경해서 외쳤다.
“조심해라! 살수가 있다!”
“...!”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낭인 한 명이 윽 하고 목을 잡았다.
바늘처럼 가느다란 비침이었기에 처음엔 따끔한 정도였다. 하지만 급속도로 안면이 굳어가더니 달리다 말고 맥없이 고꾸라졌다.
게거품을 문 낭인의 모습에 문경우가 신음처럼 목구멍을 쥐어짰다.
“독...!”
사색이 된 낭인들이 흩어졌다.
비침을 막을 수 있는 기둥과 건물 뒤에 숨었다.
“빌어먹을! 어쩌지?”
“저놈부터 잡아야지. 비침이 날아온 방향을 보면 지붕 위에 숨어있을 거다. 내가 놈을 잡을 테니 너흰 대형을 도와드려.”
“저 망할 놈의 침은 어쩌려고?”
“누구 방패 가진 사람... 젠장, 우리 중엔 없지. 저기 부뚜막에서 솥뚜껑이라도 가져와 봐.”
낭인이 솥뚜껑을 가져오자 문경우는 긴 가죽끈으로 솥뚜껑과 팔을 여러번 묶어 고정시켰다.
경험 많은 은패급 낭인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는 임기응변에 익숙했다. 흑수양 등 여러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배운 지혜였다.
“발판 부탁한다.”
두 명의 낭인이 서로의 손을 교차해서 발판을 만들자 문경우는 지체없이 그 위로 뛰어올랐다.
비조처럼 허공에 솟구친 그가 지붕에 착지하자 암습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침을 쏘았다.
솥뚜껑으로 비침을 막은 문경우가 암막새 뒤에 쪼그려앉은 암습자를 발견하고 눈을 부라렸다.
입에 대롱을 대고 있는 암습자는 문경우가 솥뚜껑을 방패로 써먹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했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새꺄.”
그러나 암습자는 문경우를 정면에서 상대할 생각이 없는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어딜 도망가!?”
하지만 암습자의 발놀림이 더 빨랐다.
암기술과 경공만 죽어라 익혔는지 문경우가 전력으로 질주하는데도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그러다 문경우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주저없이 대롱을 불어 비침을 쏘고 있었다.
문경우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죽여버리겠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암습자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며 피식 웃었다. 마치 그 정도로는 자신을 쫓아오지 못한다는 듯이.
문경우가 발끈해서 재차 달리려는 그때.
갑자기 지붕 아래에서 솟구친 채찍이 그의 발목을 잡아채서 밑으로 잡아끌었다.
쿠웅!
“꺼어...!”
속절없이 끌려가서 내동댕이쳐진 문경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
전신을 내달리는 둔중한 통증에 입을 떡 벌린 그의 귓가에 여인의 교소가 들렸다.
“푸훗! 멍청한 놈이 덫인 것도 모르고 유인당했구나.”
산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행색의 여인이었다.
홍등가의 기녀처럼 어깨와 가슴골을 드러낸 여인이 쓰러진 문경우의 모습을 비웃었다.
그 앞에 내려선 암습자가 경박하게 손을 비볐다.
“헤헤, 감사합니다. 누님 덕분에 살았습니다요.”
“그래. 본녀가 아니었다면 죽었겠지. 보아하니 낭인전에서 온 모양인데... 은패놈들이 몇 놈 낀 것 같더구나. 아마 저놈도 은패일 게다.”
“엇, 그렇습니까?”
은패급의 낭인은 정도 차이는 있어도 일류 이상으로 취급되기에 얕볼 수 없었다.
문경우가 암습자에게만 집중하느라 주변 경계에 소홀해지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식의 기습은 먹히지 않았을 공산이 컸다.
“막내야!”
공교롭게도 문경우가 떨어진 위치는 흑수양이 비웅채주와 싸우고 있던 곳과 지척이었다.
막내가 만신창이로 당한 모습에 흑수양은 자연히 동요할 수밖에 없었고....
“이놈! 어딜 보는 것이냐?”
분노한 비웅채주가 쌍날도끼를 던졌다.
연속으로 회전하며 공기를 가른 도끼날이 섬찟한 파공성을 일으켰다.
흑수양이 급히 고개를 숙이자 쌍날도끼가 그대로 목옥의 외벽을 산산조각 박살내버렸다.
그 와중에도 구르다시피 파편 세례를 피한 흑수양은 새로 나타난 여인을 노려봤다.
여인은 한 손으로 채찍을, 다른 손으로는 누군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익숙한 사람의 머리였다.
“둘째!”
흑풍사우의 둘째인 호종산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악귀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머리가, 여인의 손에 데롱데롱 들려 있었던 것이다.
“둘째 형님...!”
중상을 입은 문경우도 호종산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의 반응을 즐긴 여인은 호종산의 머리를 떨어트린 뒤 발을 들어올렸다.
“아, 안 돼!”
“되고말고.”
콰직!
내공을 싣어 호종산의 머리를 짓밟았다.
깨진 수박처럼 으스러진 호종산의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줄줄이 흘러나와 당혜를 적신다.
아연실색한 흑풍사우의 두 사람을 번갈아본 그녀가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어머, 이거 어쩌지? 신발이 더러워졌네.”
“이 개 같은 년아아아아아!”
그렇게 외친 것은 흑수양도, 문경우도 아니었다.
지붕에서 떨어진 막도희가 화살을 역수로 쥔 채 여인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흥!”
여인이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일장으로 후려쳤다.
막도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장력을 흘린 그녀가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화살을 고쳐잡았다.
투창을 하듯 내쏜 화살이 여인의 뺨을 스쳐지나가자 비웅채주가 대경했다.
“요살!”
그 말에 흑수양의 안색까지 변했다.
“요살? 설마 요살마녀?”
* * *
요살마녀(妖殺魔女).
그녀는 채양보음술과 주안술을 익힌 요녀였다.
과거 귀주와 호남 일대에서 젊은 남자들을 꾀어 정기를 갈취하며 악명을 떨쳤다.
겉으로는 묘령으로 보이나 실제 나이는 육순을 넘긴 노파가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그녀에게 희생된 남자들은 마치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빼앗기듯 고목나무처럼 말라죽었다.
사실 그런 요녀들은 의외로 많은 편이었다.
천하가 얼마나 넓은데 남자를 홀려 정기를 갈취하는 요녀가 요살마녀 하나뿐이겠나.
그러나 요살마녀가 악명을 떨친 것은 그렇게 죽인 남자들 중에 명문의 제자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명문의 제자라 하나 아직은 젊고 미숙한 청년들.
어지간히 정신 수양이 깊지 않고서야 남자 꾀는 데 이골이 난 요살마녀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식으로 명문의 제자들을 사냥한 요살마녀는 젊고 아리따운 외모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구파의 주력 고수들에 육박하는 내공을 지녔다.
하지만 무림맹이 공적으로 선포한 뒤엔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몇 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한동안 소식이 안 들려서 객사했겠거니 했는데....’
흑수양은 긴장했다.
둘째 아우인 호종산이 당한 것도 당연했다.
설령 방심하지 않았더라도 상대가 요살마녀인 것을 알지 못했다면 허를 찔렸을 테니까.
막도희도 흑수양의 외침을 듣고 움찔 떨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이 감히 본녀의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뺨에서 피가 흘러내린 요살마녀의 눈이 광기로 희번뜩거렸다.
호종산의 죽음에 분노한 막도희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킬 만큼 지독한 살기였다.
그때 흑수양이 소리쳤다.
“셋째, 그는 어디에 있느냐!”
흑수양이 묻는 사람은 강엽이었다.
비웅채주와 비침을 쏘는 암습자에 요살마녀까지 있다.
문경우는 전력에서 이탈했고 그가 데려온 낭인들은 다른 낭인들과 함께 비웅채주의 쌍둥이 부하들과 싸우느라 손을 보탤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엽이 있어야 했다.
“그, 그게...!”
막도희도 당혹스러웠다.
강엽이 오지 않은 까닭은 간단했다.
편곤을 쓰는 고수를 쓰러트린 뒤에 수십이나 되는 산적들과 맞닥렸던 것이다.
본래는 그녀 역시 강엽을 도우려고 했으나, 도중 호중산의 시신을 발견한 뒤 낭인들의 허락을 받고 흉수의 흔적을 따라 이쪽으로 온 것이다.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크하하! 누가 또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놈이 오기 전에 네놈들은 전부 죽을 거다.”
비웅채주가 사납게 일갈했다.
“젖비린내나는 계집, 넌 특별히 산적들의 노리개로 만들어주마.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굴려주지.”
요살마녀가 조소를 터뜨렸다.
“어렵게 돌아갈 거 있습니까? 어이, 너희들. 움직이지 마라. 이놈 뒈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암습자가 문경우의 머리채를 들어올리고는 목에 비수를 들이댔다.
“큭! 대형! 누님...!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른 낭인들 같았으면 인질 따위 무시했을 테지만 우애가 깊은 흑풍사우는 그럴 수 없었다.
호종산이 죽은 마당에 문경우까지 잃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세 명이 나란히 죽을 판이었다.
아니, 요살마녀가 막도희는 살려주겠다고 했으니 그녀만은 죽진 않겠지만, 대신 죽는 것만도 못한 꼴을 당하리라.
그때였다.
서걱!
“어?”
암습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지?’
세상이 기울어진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더니 자신의 몸이 보인다.
암습자의 몸은 목이 잘려나간 단면에서 검붉은 피를 간헐천처럼 뿜고 있었다.
그렇게 숨을 거둔 암습자의 뒤편에서 나직한 발걸음과 함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등장했다.
가까스로 풀려난 문경우가 남자를 불렀다.
“강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