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산적 (6)
수십의 산적들을 죄다 쳐죽이고 온 강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들의 피와 살점으로 칠갑을 한 강엽이 장내를 둘러보다 한 곳에 시선을 주었다.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진 머리.
다만 튀어나온 안구나 머리카락 등으로 그게 사람의 머리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강엽은 요살마녀의 당혜에 묻은 핏물로 대강의 사정을 짐작했다.
하나 그녀나 비웅채주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대신 다른 상대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낭인들에게 합공당하고 있는 쌍둥이였다.
월등히 많은 낭인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그들은 끈끈한 협력으로 버텨냈다.
형이 위험해지면 아우가, 아우가 위험해지면 형이 돕는다.
비웅채주와 요살마녀가 흑풍사우를 상대하는 동안 떨거지들을 막는 게 본인들의 임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흑풍사우를 쳐죽이면 이놈들을 죽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쌍둥이에게도 있었다.
휘릭!
강엽이 난입하자 비등했던 국면에 균열이 일어났다.
‘위험하다!’
오싹함을 느낀 쌍둥이는 다른 낭인들을 무시하고 기습부터 막았다.
쌍둥이 중 형이 강엽의 일권을 하박으로 막았다.
그가 강엽의 얼굴을 확인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멍청한 놈!”
쌍둥이는 외공의 고수였다.
근육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위처럼 단단해지며, 일격의 위력이 무거워진다.
이토록 많은 낭인들한테 둘러싸이고도 여태껏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엇?”
자세가 무너졌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일권에 실린 경력이 단단한 피부를 뚫고 근육을 터뜨리자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형님!”
쌍둥이 중 아우가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강엽을 향해 뒷꿈치를 후려갈겼다.
부채꼴을 그린 회축이 안면부를 노리고 짓쳐들자 강엽은 살짝 무릎을 굽혀 무게중심을 낮춘 뒤, 양팔을 교차시켜 막아냈다.
둔중한 충격이 팔목을 강타한다.
그러나 놀란 것은 쌍둥이였다.
콰앙!
제자리에서 버틴 강엽이 금나수로 발목을 으스러뜨리고는, 백이십 근은 족히 넘는 그의 몸을 그대로 내던진 것이다.
“동생아!”
이번엔 형이 아우를 부르짖었다.
“이 자식!”
쌍둥이가 주춤한 틈을 타서 강엽이 낭인들에게 말했다.
“한 놈은 팔이 망가졌고, 다른 놈은 다리 병신이 됐다. 이만하면 이길 수 있겠지?”
팔다리에 장애가 생겼으니 실력이 이전만 못할 터.
이만하면 자신이 전부 처리하지 않아도 낭인들 선에서 무난하게 정리될 거라고 판단했다.
“어, 그, 그래... 고맙다.”
낭인들도 경황이 없었다.
자신들과 같은 동패급인 강엽의 말에 누구도 반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동안 강엽이 쭉 보여주었던 모습들이 그리 만든 것이다.
* * *
강엽이 쌍둥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쯤엔 이미 네 사람의 싸움이 재개된 뒤였다.
강엽이 문경우를 구해주었기에 흑수양과 막도희는 거칠 것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호종산을 잃은 슬픔과 분노가 그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지 않게 만들었다.
‘설사 내가 죽더라도 너만큼은 반드시 죽이겠다!’
들불같은 기세였다.
흑수양과 대등하게 싸웠던 비웅채주는 물론, 막도희보다 고수인 요살마녀도 당혹스러워했다.
상대가 죽자고 달려드니 기세에서 밀렸다.
‘이럴 때 저놈까지 합류하면...!’
그들은 강엽을 염두에 두었다.
갑자기 나타난 강엽이 암습자를 죽였을 땐 얼마나 경악했던가?
만약 강엽이 그들부터 노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불길한 상상이 그들로 하여금 아껴두고 있던 최후의 힘을 꺼내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아!”
비웅채주가 괴성을 토했다.
거침없이 밀어붙였던 흑수양은 비웅채주의 기세가 변하자 당혹감을 드러냈다.
비웅채주의 기파가 강렬해졌다.
단지 분위기만 변한 게 아니라 탁한 핏빛을 띠는 음산한 기운이 쌍날도끼를 감싸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는 기운.
흑수양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마공...!”
상리에 어긋난 무공.
인륜을 저버리는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해야 비로소 연마할 수 있는 무공을 마공이라 부른다.
강호인들은 마공을 수련한 자들을 사마외도라 멸칭하며 두려워했다.
경파로 흑수양을 날려버린 비웅채주가 짓씹듯 이를 갈았다.
“쓰벌, 교의 신공을 이딴 놈들에게 써야 한다니....”
산적질을 하다 보면 토벌대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랐다.
무엇보다 협행에 미친 백도 정파도 아니고 돈벌레 같은 낭인들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낭인들이 궁핍한 산골 마을에서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네놈들 때문에 애써 만든 기반이 다 날아갔다. 그 죄는 목숨으로 갚아라!”
최대한 빨리 흑수양을 죽이고 강엽을 상대할 작정.
전력을 발휘한 비웅채주는 이제까지 밀린 게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흑수양을 압박했다.
당황한 흑수양이 수세에 몰렸다.
곡예를 하듯 흘리고 피했으나 상황은 그에게 불리했다.
비웅채주의 기운이 너무나도 패도적이어서 도끼날이 춤출 때마다 일진광풍이 불었다.
‘셋째는... 나보다 더 심각하군.’
안 그래도 근접전에 약한 막도희였다.
화살을 던지거나 활대를 휘둘러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부상을 피하진 못했다.
무공의 고하도 고하지만 상성이 최악이었다.
아예 먼 거리에서 화살을 겨눈다면 몰라도, 애매한 거리에선 요살마녀가 윗줄이었다.
그래도 처음엔 어느 정도 몰아붙이는가 싶었는데 요살마녀가 침착하게 대응하자 막도희는 속절없이 밀렸다.
강엽이 합류한 건 그때였다.
“헛!”
비웅채주가 헛바람을 삼켰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다섯 줄기의 칼바람이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욕설이 터졌다.
“이익...! 교위(敎尉), 겨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막아!?”
요살마녀였다.
비웅채주가 무작정 피하는 바람에 한껏 치켜올린 그녀의 채찍이 찢겨나가고 말았다.
위기에서 벗어난 막도희가 싸움에 합류한 강엽을 향해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다.
이미 그에 대한 반발심은 사라졌다.
강엽이 말했다.
“흑풍도를 도와줘라.”
“혼자서 요살마녀를 상대할 셈이야?”
“상성상 그게 맞아.”
강엽의 손톱은 요살마녀의 천적이다.
막도희 역시 그걸 모르진 않았지만, 호종산의 원수를 앞에 두고 물러나는 게 내키지 않았다.
강엽이 뒷말을 덧붙였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주지. 됐나?”
“...그래. 부탁해.”
한숨을 내쉰 막도희가 흑수양을 돕기 위해 빠지자 강엽이 자연스레 그녀의 자치를 대신했다.
요살마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강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심신을 옥죄였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이깟 애송이는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거늘...!’
“호호홋!”
요살마녀는 기어이 웃음을 흘렸다.
염기가 배어나오는 간드러지는 미소였다.
그녀가 익힌 환희요오공(歡喜妖娛功)은 주안술이자 사내의 정기를 갈취하는 사공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성을 현혹하는 미혼술이었다.
소위 정공을 익혔다고 알려진 명문의 제자들도 그녀의 환희요오공에 당하면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데 강엽은 달랐다.
“미쳤나?”
“뭣이?”
“왜 싸우다 말고 처웃고 지랄이야.”
“...!”
요살마녀와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강엽의 눈빛은 요지부동이었다.
당황한 요살마녀가 기운을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요살마녀의 기운은 그의 정신을 침범하지 못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혈공진기가 외부의 기운이 강엽의 뇌로 침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살마녀의 기운을 몰아내며 역으로 그녀의 기운을 헤집고 타격을 입히는 게 아닌가?
“아악!”
요살마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진한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강엽이 벼락처럼 덮쳤다.
요살마녀가 심령에 타격을 입은 지금이야말로 그녀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였다.
“오, 오지 마!”
요살마녀는 겁에 질렸다.
강엽의 안광이 뇌리를 헤집은 순간 거대한 괴물의 손아귀에 잡힌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즉시 줄행랑을 쳤다.
치맛자락을 펄럭이면서도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지붕 위로 오르며 바람처럼 내달렸다.
모름지기 강호의 공적이 살아남으려면 다른 무엇보다 도망치는 실력이 출중해야 하는 법.
그러나 강엽 역시 경공은 자신 있었다.
팽수현으로 오는 동안 암신과 경공을 같이 쓰는 법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어둠 속에 녹아든 강엽이 달리기 시작했다.
요살마녀의 경공이 바람처럼 표홀하다면 그의 경공은 유령처럼 은밀했다.
일절 기척을 내지 않고 따라붙자 요살마녀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봤고....
강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쉬악!
손가락을 휘두르자 다섯 줄기의 조풍(爪風)이 요살마녀의 등짝을 향해 날아갔다.
요살마녀가 구르다시피하며 피하자 조풍이 지붕 뒤에 있는 나무를 난상으로 잘라버렸다.
강엽이 아직 따라붙고 있음을 알아차린 요살마녀가 표독하게 외쳤다.
“이...!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 거야!?”
강엽은 대꾸하지 않았다.
요살마녀가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든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촤아악!
어둠 속에서 빛살이 번뜩였다.
요살마녀는 기겁하며 지붕 아래로 떨어졌다. 그 앞에 마을을 빙 두른 목책이 있었다.
그 뒤에 야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날 듯이 목책을 넘었다.
온갖 지형지물이 복잡하게 얽힌 숲속에 몸을 숨길 작정이었다.
밤의 어둠과 빽빽한 나무들이 그녀를 추격자로부터 숨겨주리라.
강엽이 요살마녀의 노림수를 모를 리 없었다.
‘헛짓거리를.’
흡혈귀의 기감은 어둠 속에서 극대화된다.
지금도 요살마녀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나름 강엽을 따돌리겠답시고 갈 지(之) 자로 복잡하게 숲속을 누비고 있었는데, 그래봤자 강엽의 기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몸에선 짙은 피냄새가 풍겼다.
강엽은 나무에서 나무로, 때론 바위를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지며 숲속 곳곳을 종횡무진 누볐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요살마녀의 등이 보였다.
위로 틀어올려 비녀를 꽂았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궁장 역시 찢겨지며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조풍에 베이면서 벌어진 상처는 지금도 피를 울컥 토해내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강엽에게는 요살마녀의 되도 않는 미혼술보다는 넋을 잃을 만큼 황홀한 피냄새가 더욱 치명적이었다.
거산중권이나 열화장보다 강한 선천지기가 그녀의 피에 깃들었다는 증거였다.
자칫 피냄새에 취해서 정신줄을 놓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강엽은 요살마녀에게 접근했다.
어둠에 녹아들었기 때문에 강엽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요살마녀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위로 솟구쳤다.
그러면서 일장을 내뻗었다.
지긋지긋한 추격전을 끝내고 싶었던 강엽은 장법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투학!
혈공진기가 응축된 권파가 장풍과 부딪쳤다.
서로 버티어 대항한 두 힘이 터지자 충격이 그와 요살마녀를 똑같이 밀어냈다.
“악!”
요살마녀가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충격에 휘말린 그녀는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그녀는 삶의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으윽...!”
“겨우 잡았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침을 꿀꺽 삼킨 요살마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재생력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강엽이 있었다.
흉하게 벌어진 상처가 시간을 되돌리듯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습에 요살마녀는 전율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상리를 벗어난 괴물임을 깨닫는다.
“무, 무슨....”
“넌 여기서 죽는다.”
무슨 짓을 해도 도망칠 수 없다고.
담담히 말하는 강엽의 모습에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요살마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닥쳐, 이 새끼야아아!”
찰나 그녀가 십이성의 공력을 담은 일장을 후려쳤다.
큼지막한 아름드리나무 세 그루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그러나 강엽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동시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배후에서 다가와 하얀 목덜미를 붙잡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요살마녀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자, 잠깐!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울고 불고 애원하였으나 흡혈귀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