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2화 (21/450)

5화. 산적 (4)

스무 명의 낭인들이 도둑놈마냥 슬금슬금 마을에 들어왔다.

그 사이 강엽은 근처에 산적들이 있나 살펴봤다.

만약 산적들이 어슬렁거린다면 발각당하기 전에 먼저 해치울 심산이었다.

‘지금쯤이면 다들 자고 있을 테니 거의 없겠지만....’

목옥 안이나 뒤져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독 냄새나는 곳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나온 장한이 기지개를 쭉 켜는 게 아닌가.

그러다 뒤늦게 강엽을 발견하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엉?”

“하필이면 변소였나?”

어쩐지 냄새가 지독하더라니.

쓴웃음을 흘린 강엽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그의 신형이 장한의 전면으로 들이닥쳤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장한이 주먹을 들어올린 찰나, 둔중한 충격이 장한의 머리통을 휩쓸었다.

대뜸 전면으로 뛰어든 강엽이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가 꺾인 장한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직후 강엽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장한의 고개가 쑥 내려가더니 강하게 올려친 무릎팍과 부딪쳤다.

빠각!

그걸로 끝이었다.

단 두 방으로 숨통을 끊어버린 강엽이 시체를 내려놨다.

그때 몇 명의 낭인들이 달려왔다.

공교롭게도 막도희가 낭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강엽의 얼굴을 보자마자 움찔한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놈은 뭐야?”

“우연히 마주쳤다. 소리치기 전에 죽였지.”

“...산적은 맞겠지? 대형께선 마을 주민들이 산적들과 섞여있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 조심해야 해.”

“명심하지.”

그러나 마을 사람이라면 감시하는 인원이 따라붙었으리라.

기실 강엽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아도 막도희 역시 죽은 시체가 마을 주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대충 봐도 얼굴에 흉터가 많은 게 산적같이 생겨먹었으니까.

“일단 우리는 같이 움직일 건데... 너는?”

아까 전이었다면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에 진입하면 은패급인 흑풍사우가 각각 낭인들을 이끌고 산채를 들쑤시기로 합의했으니까.

하지만 강엽에게 명령을 내리자니 과연 그가 자신의 뜻대로 따라줄지 걱정되었다.

“난 혼자 움직이겠다.”

강엽 역시 다른 낭인들과 같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혼자 싸우는 것을 선호했다.

막도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대로 해.”

그녀는 낭인들을 이끌고 다른 목옥에 들어갔다.

자는 와중에 소란을 듣고 깨어난 산적이 무어라 외쳤지만 낭인들은 대비할 틈새를 주지 않았다.

“이런 시팔! 네놈들은 뭐...컥!”

“닥치고 뒈져, 개새끼야.”

막도희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산적이 누워있는 침상 옆에 알몸의 여자가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능욕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있는 여자는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온몸이 피멍투성이였다.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여인과 노인, 아이들은 폭력에 저항할 최소한의 힘조차 갖지 못한 약자였다.

산적들의 수중에 떨어진 마을 주민들의 운명이 어찌되었을지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예상보다 더한 참상을 보니 산적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산적이 죽고 나서도 몇 번이나 단검을 찌른 막도희의 모습에 낭인들까지 혀를 내둘렀다.

“이미 죽었다, 막도희.”

“그쯤 해두라고. 죽일 놈들은 많으니까.”

막도희가 한숨을 내며 떨어졌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여인이다 보니 죽은 여인에게 감정이 몰입되어 평소보다 손속이 잔혹해졌다.

비참하게 죽은 여인의 시신을 피 묻은 이불보로 감싼 막도희가 일어서며 말했다.

“다른 놈들 죽이러 가자.”

낭인들의 말마따나 죽일 놈들은 많다.

하지만 다른 목옥으로 쳐들어간 그들은 이미 죽어나자빠진 산적들을 보고 아연해졌다.

머리나 심장 등이 함몰되거나 날카로운 칼날로 그어버린 것처럼 목이 잘려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뻔했다.

“하... 다른 곳으로 가라니까 그 새끼가....”

막도희가 어이없어하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 * *

‘살수를 했어도 먹고 살 만했을지도.’

강엽은 자신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둠에 녹아드는 암신의 공능이 암살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효과적일 줄이야.

어쩌면 낭인이 아니라 살수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 정도였다.

강엽이 쓰게 웃었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낭인 역시 그리 깨끗한 업은 아니나 살수는 숫제 돈을 벌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까지 해치는 자들.

비록 피를 마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호에 몸을 담긴 했지만 마음속에 그어놓은 선을 넘고 싶진 않았다.

이 선을 넘어버리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괴물이 될 것 같아서.

푸학!

잠든 산적의 목에 손톱을 박는다.

손톱에 집중된 혈공진기가 경동맥을 자르자 산적은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삼도천을 건넜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신선한 피를 손바닥에 담아 입에 가져가면서 강엽은 결심을 되새겼다.

피를 마시는 건 어디까지나 적으로 만난 무림인이나 이미 죽은 시신에 한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마음속에 그어놓은 최소한의 선이니까.

낭인이 되었을 때 세운 결의를 새삼 다시 한번 되짚은 강엽은 다음 목옥으로 향했다.

그렇게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쾅!

문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

산산조각난 파편 사이로 튀어나온 큼직한 막대가 강엽을 쫓아왔다.

난생 처음 보는 무기였다.

하지만 그 형태는 동패무고의 비급에서 봤다.

무림에서 사용되는 기문병기 중의 하나.

뒤로 물러난 강엽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편곤(鞭棍)?”

길쭉한 장대 위에 곤봉을 매달아놓은 무기였다.

“바깥이 시끄러워서 뭔 일인가 싶었는데... 쥐새끼들이 들어왔구나.”

장대를 꼬나쥔 텁석부리 사내가 살기를 뿜었다.

원심을 그리며 돌아가는 곤봉을 당장이라도 강엽의 머리를 향해 내던질 듯한 사내가 문득 물었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낭인전.”

“뭣이?”

사내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낭인전이 이런 궁벽한 촌구석에 뭐하러 왔단 말이냐?”

“뭐하러 왔긴. 의뢰를 받았으니까 온 거지.”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그럼에도 낭인전에서 왔다는 말을 한 것은 사내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일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다는 방증.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크흐, 어떤 놈팽이가 의뢰했는지는 몰라도 낭인전의 낭인들이 왔단 말이지...?”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가 편곤을 찔렀다.

사내가 움직이는 것을 미리 포착한 강엽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여 편곤을 비껴냈다.

그리고 곧장 사내의 안면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손톱을 찔러갔다.

“건방진 새끼!”

그 순간 뒤로 삼보 물러난 사내가 능숙한 자세로 편곤의 아랫부분을 내렸다가 다시 퍼올렸다.

무턱대고 손을 찌른다면 장대가 팔목 아래로 파고드는 절묘한 한 수였다.

장대가 닿기 직전, 강엽은 손을 활짝 펴서 장대를 막는 한편 사내의 옆구리를 향해 우각을 날렸다.

그러자 사내 역시 위치를 바꾸면서 강엽의 다리를 쳐내고, 장대를 끌어당기는 동시에 팔꿈치로 강엽의 늑골을 겨냥했다.

지근거리에서 한방 먹여줄 생각이었다.

강엽은 장대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팔꿈치를 쳐내면서 장대를 뒤로 밀어냈다.

퍼버버버버벅!

붙은 상태에서 펼치는 초근접 박투술이었다.

장대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팔다리가 끝도 없이 부딪쳤다.

예상보다 강한 반탄력에 묵직한 통증을 느낀 사내는 입술을 짓씹고 강엽을 노려봤다.

강엽이 편곤을 놔주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박투로 붙긴 했지만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또 다른 산적이 강엽의 뒤를 노렸다.

“죽엇!”

소란을 듣고 온 것이다.

역수로 잡은 칼을 강엽의 등짝에 찌른다.

구태여 죽으라고 소리친 것은 자신이 뒤를 칠 테니 강엽을 꽉 붙잡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이미 배후의 적을 눈치챈 강엽은 당황하지 않았다.

몸을 틀어 등짝을 노리는 칼날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단단히 꽉 조인다.

그리곤 장대를 놓고 팔꿈치를 크게 휘둘러 산적의 관자놀이를 찍었다.

눈이 게게 풀린 산적이 풀썩 쓰러진다.

동시에 자유를 되찾은 사내가 편곤을 회수하면서 강엽의 머리를 때렸다.

강엽 역시 예상했기에 몸을 비튼 상태에서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뒤로 뉘였다.

장대 끝에 연결된 곤봉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편곤을 회수한 사내가 이번엔 다른 각도로 그의 사각(死角)을 노린다는 것을.

놈이 원하는 것은 공간을 제압하고 마음껏 무공을 휘두르는 것.

그걸 깨달은 강엽은 스스로 균형을 무너뜨리고 한 팔로 땅을 짚으면서 몸을 반전시켰다.

몸을 반전시키는 그 찰나에 편곤이 그가 서 있던 땅을 휩쓸듯 지나갔다.

그러나 세 번 연속은 없었다.

사내가 편곤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 강엽은 장대가 한 바퀴를 돌기 전에 땅을 박찬 것이다.

혈공진기를 머금은 일권이 상대의 명치를 향해 쇄도하자 사내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다리를 쭉 뻗었다.

“하압!”

거산중권과 열화장 이후 간만에 싸워보는 고수였다.

지금까진 허무하리만치 쉽게 죽어나간 산적들보다 월등히 강하다.

열화장과 싸웠을 당시의 자신이었다면 초감각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암신까지 써야 했을 터.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부앙!

“엇?”

사내가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보여준 몸놀림은 속임수였다는 것처럼 강엽이 한번 더 가속한 것이다.

타격 직전에 팔괘 중 태괘(兌卦)의 방위를 밟으며 몸을 급격하게 틀고.

그로써 상대의 역습을 무위로 돌리면서 훤히 드러난 빈틈을 향해 일권을 꽂는다.

다리를 지지대로 삼아, 대퇴의 족척건에서부터 끌어올린 힘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권.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사내 역시 이를 꽉 물고 타격점인 복부에 내공을 집중했다.

피할 수 없다면 버틸 수밖....

터어엉!

“커억...!”

발경(發勁) 권력(拳力).

단순히 내공을 때려박는 게 아니라 세심하게 통제하면서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수법.

강엽은 거산중권이나 열화장 등의 고수들과 싸우면서 경력을 체감했고, 그날의 싸움을 몇 번이고 곱씹은 결과 어떻게 해야 경력을 다룰 수 있는지 감을 잡았다.

뿐만 아니라 투사들의 싸움을 견식하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경력을 다루는지도 공부했다.

그 결과 경력의 이치를 깨우쳤다.

‘그 다음부턴 쉬웠지.’

혼자서 이것저것 시험해보며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선 안 되는 일을 구분했다.

이전엔 그저 혈공진기를 팔다리 등에 무식하게 때려박아 휘둘렀다면, 이젠 같은 양의 힘으로도 훨씬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었다.

굳이 발경을 쓰지 않아도 고수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강엽이었다.

그런 그가 이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 그 위력은 가히 발군이었다.

정타를 허용한 사내는 목옥의 벽을 부수고 반대편까지 튀어나왔다.

‘이제는 적들도 알았겠지.’

곳곳에서 소란과 비명이 일고 있었다.

무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외곽의 목옥들은 그저 그런 산적들이 차지하고, 안쪽은 제법 강한 산적들이 차지했던 것이다.

아마 채주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리라.

입가에 피를 게워내는 사내의 뒷목을 밟아서 확실히 끝장내버린 강엽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카아앙...!

소란 속에서도 귓가를 또렷이 파고드는 파찰음.

“대장전(大將戰)인가?”

마침내 흑풍사우의 대형인 흑수양과 산적들의 채주가 무기를 맞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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