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61화
신선계 신선경.
인계를 내려다보던 주경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가. 정연이가 기사회생했어요.”
그녀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보였다.
주경아바라기인 설극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의 눈엔 여전히 주경아는 꽃다운 소녀였다.
“가가!”
“아, 불렀어?”
“어디다가 정신을 놓고 있는 거예요.”
“경아의 미소에 그만…”
설극의 대답에 주경아의 입에 걸린 미소가 사라졌다.
“아아.”
설극이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을 했다.
“주책 좀 부리지 마세요. 신선제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주경아가 설극을 나무랐다.
설극이 가득 쌓인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무안해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연아린이 피식 웃었다.
‘어르신이 마선께는 꼼짝도 못 하시네.’
신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파천혈신이 주경아에게만큼은 쩔쩔맸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신선제의 새로운 모습을 몰랐을 터.
연아린을 포함한 신선들은 매번 신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선님.”
“응?”
연아린이 주경아만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준의 아내로 박정연이란 아이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준이가 좋아하는 아이면 그걸로 만족한단다.”
이준이 주경아의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 환생이라는 걸 연아린만 아는 상황.
모든 신선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면 신선계가 떠들썩할 테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설극이 한마디 했다.
“난 경아의 의견에 따르겠어.”
영락없이 철없는 남편의 말투였다.
주경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선제의 자리에 올랐으면 체통을 지켜야 할 텐데.
너무도 가벼운 모습이었다.
“정연이란 아이가 뇌령의 힘과 물의 돌을 가졌으니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엄청난 기재가 태어날 수도 있겠어.”
“그건 지유란 아이도 똑같지 않나요? 얼음의 돌을 지녔는데.”
“그렇긴 하지만 재능으로 볼 때는 정연이가 더 앞서는 것 같구나.”
인계에서 여자 중 박정연이 가장 강했다.
한지유가 그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으나.
재능으로 보면 박정연이 한 수 위였다.
이준의 재능에 박정연의 재능을 이어받은 아이가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사부님을 뛰어넘는 아이가 태어날 수도….”
설극이 말하면서도 긴장이 됐다.
천극자.
그가 무척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부였다.
인류 역사상.
아니, 신계를 통틀어서도 압도적인 강함을 가진 게 바로 천극자였다.
그와 맞먹는, 아니면 더 뛰어난 아이가 탄생한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었다.
“어르신의 사부님은 어떤 분이세요?”
연아린은 전대 신선제를 보지 못했다.
그녀가 신선계로 올라왔을 때는 신선제의 자리가 공석이었으니까.
그 무서운 파천혈신이 어렵게 입에 담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게 뛰어나신 분이셨지.”
설극이 천극자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웠다.
보고 싶기도 했다.
신선계에서 같이 살고 싶었으나.
자신이 저지른 벌을 대신하여 사라지셨다.
천계의 가주들이 인계로 강림했음에도 개입하지 못한 이유였다.
이준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염라대왕의 경고가 있었으니까.
“그만 청승 떠시고 일이나 하세요.”
설극이 분위기를 한껏 잡으며 눈물 흘릴 각을 보이자.
주경아가 그의 등을 찰싹 때리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오랜만에 사부님을 그리워하는데.”
“가가가 청승 떠시는 걸 그분께서 좋아하시겠어요? 그러니 잔말 말고 일이나 마저 해요.”
“좀 쉬어도….”
주경아가 설극을 또렷하게 보았다.
설극은 자라목이 되어 다시 서류에 파묻혔다.
“우린 인계를 관찰하자꾸나.”
“이준이 피의 길을 걸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나와 가가의 업보가 저 아이에게로 갔으니 어찌하겠느냐. 미안한 말이지만 스스로 이겨내야지.”
이준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않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그녀였다.
* * *
미카엘은 보초를 서고 있는 백호를 비꼬았다.
“사신수가 인간의 개가 되어 있다니. 인계가 엉망이 됐어.”
“크앙!”
모욕적인 말에 백호가 짖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엘은 오직 아지랑이로 만들어진 감옥을 빠져나갈 생각뿐이었다.
쿵.
“빌어먹을! 꼼짝도 안 합니다.”
감옥을 발로 찼으나 흔들림도 없었다.
얼마나 튼튼한지 도리어 충격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포기하게.”
“미카엘 님은 분하지 않습니까.”
“마력이나 신성력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네. 그리고 난 두 다리가 잘렸고 자네는 팔이 뜯겼어. 우리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게야.”
“전 여기서 나가 그 버러지에게 복수해야겠습니다.”
쿵.
쿵쿵.
우리엘이 포기하지 않고 발로 감옥을 두드리고 있는데 미카엘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포기했다고 말하던가?”
“그럼 아닙니까?”
“게이트에서 나오면 알아서 우릴 풀어줄 것이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게이트를 열어 사라질 때도 저희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기세였습니다.”
“내가 미리 장치를 해뒀어.”
“그놈이 분개했던 이유 말입니까?”
“그렇다네. 게이트에서 나오면 내게 무릎을 꿇고 빌게야. 그 신체는 어떤 힘으로도 고칠 수가 없거든. 특히 남자도 아닌 여자가 태양절맥을 앓은 건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었네.”
“여유가 넘치시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힘 빼지 말고 여기서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세.”
“처음부터 말해주시지 그랬습니까.”
“후후.”
미카엘이 사람 좋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4대 성지의 금역이 열리며 이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미카엘이 그를 향해 말했다.
“잘 해결 안 된 모양인가?”
“잘 안 됐으면 널 진작에 죽였겠지.”
인상을 찌푸린 미카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게이트가 열리면 곧장 잘못을 빌 거라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여전히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말했다.
“설마… 태양지체의 태양절맥을 고친 거냐?”
“고쳤다면?”
“말도 안 돼! 남자도 아닌 여자를, 인간인 네가 어떻게 고친다는 말이냐. 염라대왕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다!”
미카엘이 버럭 소리쳤다.
“그런 병을, 감히 너 따위가 정연 누나한테 걸었어?”
이준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아지랑이로 된 감옥이 사라졌다.
푸확-
우리엘의 가슴에 박힌 파멸겁을 뽑아버렸다.
“커헉!”
그리곤 미카엘의 옆구리에 파멸겁을 박아넣었다.
“억!”
몸에 박힌 파멸겁을 비틀어 미카엘에게 고통을 더했다.
“너 같은 버러지를 살려두면 해악이겠지만. 네가 절망에 빠진 걸 꼭 봐야겠다.”
이준이 살기 어린 눈을 번들거렸다.
“크으… 감… 히이….”
그가 손으로 미카엘의 입을 틀어쥐었다.
“감히는 너같이 약해빠진 쓰레기가 함부로 지껄이는 단어가 아니다.”
이준의 말에 미카엘이 모멸감을 느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잡혔다.
지근거리에서 모욕적인 언사에 당하니.
수치심이 올라왔다.
이준이 미카엘의 얼굴을 아무렇게나 치워버렸다.
몸을 돌려 우리엘에게로 갔다.
팔을 뻗으니 우리엘의 몸이 붕 떠서 이준의 손아귀에 목이 잡혔다.
“네 수하와 약속한 게 있어 죽이진 않을게. 대신 인간의 심정이 어떤지 느껴봐라.”
“무, 무슨 짓을 하려… 고?”
우리엘이 이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것도 아주 급속도로.
[특성 ‘무공천재’가 발동했습니다.]
[사신기가 흡성공을 사용했습니다.]
[빛의 돌을 흡수합니다.]
“노, 놔라!”
이준은 무심한 눈으로 우리엘을 바라볼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안… 돼애애애!”
우리엘은 그 어느 때보다 절규했다.
전성기로 돌려준 힘은 물론 신성력과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인내의 신(불) 우리엘의 신성력을 흡수했습니다.]
[인내의 신(불) 우리엘의 마력을 흡수했습니다.]
‘사신기라 그런가. 신의 힘을 흡수해도 포화 되는 느낌은 없어.’
천극자의 경고와는 달리 사신기는 너무도 안정적이었다.
무극자 사부가 왜 사신기를 못 배웠나 의문스러울 지경.
미친 듯한 안정감과 파멸적인 강함을 지닌 천외의 무공이었다.
[사신기가 빛의 돌을 전부 흡수했습니다. ]
[사신기에 빛 속성(인계)이 추가 되었습니다.]
[원신의 힘: 불의 돌, 철의 돌, 빛의 돌(NEW)]
[인내의 신(불) 우리엘의 신성력을 전부 흡수했습니다.]
[인내의 신(불) 우리엘의 마력을 전부 흡수했습니다.]
“으으…”
이준이 우리엘의 목을 놓아주었다.
우리엘은 그 전과 같은 위압감을 뿜어내지 못했다.
신이 인간으로 격하가 된 듯.
너무도 평범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신으로서 가장 겪고 싶지 않은 상황.
최악의 형벌이었다.
“다시 돌려…줘…”
모든 힘을 잃은 우리엘이 바닥을 기며 이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퍽-
이준이 우리엘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커허억!”
우리엘이 침과 피가 섞인 액체를 질질 흘리며 신음을 토했다.
내공도 담겨있지 않은 발을 맞았음에도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
특히 각성자가 아닌 인간은 한없이 약했다.
우리엘의 현재 상태가 딱 일반인이었다.
그를 본 미카엘의 눈동자가 거침없이 떨렸다.
전신으로 전해지는 떨림.
두려움과 공포가 순식간에 퍼졌다.
이준이 미카엘에게 몸을 돌렸다.
“이젠 네 차례다.”
“오, 오지 마!”
우리엘이 힘을 빼앗긴 걸 보자.
미카엘이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런데도 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카엘에게 걸어갔다.
“너희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바로 이거였어.”
힘을 잃는 것.
힘을 되찾으려고 인계에 내려왔다가 모든 걸 잃게 생겼다.
* * *
이준은 미카엘의 힘도 뺏었다.
[사신기가 뇌령을 전부 흡수했습니다.]
[사신기에 뇌 속성(인계)이 추가 되었습니다.]
[원신의 힘: 불의 돌, 철의 돌, 빛의 돌, 번개의 돌(반쪽)(NEW)]
박혁진에게 있던 힘은 수월하게 흡수했다.
미카엘의 신성력과 마력 또한 마찬가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천계왕의 힘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흡수하려면 신계에서 부여한 왕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천계왕이라 그런지 제약이 걸렸다.
“쯧.”
이준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운이 좋네.”
“허억… 허억….”
미카엘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탈신경에 들었던 그의 힘은 현저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천계의 하급 가주 정도.
비지땀을 흘린 그가 털썩 쓰러졌다.
막대한 힘이 빠져나가 쇼크가 온 것이다.
“그래봤자 네가 무기력한 건 똑같을 거야.”
이준이 미카엘을 내려보았으나.
거칠게 숨만 쉬고 반박하지 못했다.
“대화하는 사람이 없으니 재미가 없네. 지원군을 요청하러 간 놈은 언제 오는 거지?”
이준이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렵.
불의 군단장은 로에니아 제국의 대신전에서 가브리엘을 만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카엘과 네 주인인 우리엘이 파천제에게 패배했다?”
“그렇습니다.”
“너는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지원을 요청하러 온 거란 말이지.”
말을 듣고 있던 라구엘과 라파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해.”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미카엘님과 가주님을 구해야 합니다.”
불의 군단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하나 세 가주의 태도는 회의적이었다.
뜨뜻미지근하달까.
“미카엘이 졌다면 우리가 가도 똑같다.”
“가브리엘 님의 말이 맞습니다.”
“녀석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대책을 세우는 편이 현명하오.”
저들의 반응에 불의 군단장이 뜨악해했다.
“설마 두 분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말이 왜 그따위야. 저급한 표현을 쓰네. 우리가 그렇게 의리가 없어 보여?”
하늘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손가락에 끼워진 단검을 돌리며 말했다.
호리호리한 체형.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은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시, 실언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두 분을 구해야 합니다. 아니면 인간의 손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불의 군단장이 열변을 토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도 파천제란 녀석을 놔둘 생각은 없다. 지금 녀석에 대한 처벌이 신계에서 논의가 되고 있다.”
“어느 층계를 말하시는 건지…?”
“4대 신계의 정점.”
라구엘의 목소리에 군단장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던 그때였다.
대신전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