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38화
이준이 남은 적룡을 모조리 해치웠다.
우두머리가 없으니.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는 상황.
적룡은 이미 사기가 꺾였다.
놈들은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단 한번의 진각에 의해 적룡의 몸이 터졌다.
상황 종료.
적룡왕을 놓친 게 분했는지.
이준은 애꿎게 땅을 발로 재차 찍었다.
“다음에는 국물도 없어.”
화를 낸 그가 일행들에게로 돌아갔다.
다가오는 이준을 본 엘루르가 처음 꺼낸 말은.
“괴물.”
이란 단어였다.
엘루르는 이준을 한껏 경계했다.
드래곤을 너무도 쉽게 죽인 인간.
너무 강한 나머지 거리를 두려 하고 있었다.
엘루르의 행동에 박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같은 심정.
괴물 같은 이준을 매일 보지만.
도저히 저 무력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놀라고 또 놀라도 매번 새로웠다.
두 사람의 반응이 어떻든.
이준은 대장로 사티아에게 갔다.
“끝냈어요. 이제 나무의 돌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실까요?”
“그러지요.”
“대장로님!”
엘루르가 빽 소리쳤다.
“네 우려가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믿어도 되겠구나.”
“위험한 자들이에요.”
“동시에 엘프의 혈맹이기도 하지.”
“네? 혈맹이라니요?”
“그 옛날. 우리에게 지금보다 더 큰 위기가 있었다. 그때 엘프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아이덴 루블리스였단다.”
“에엑!?”
사티아는 적룡왕과 싸우는 이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는 꼭 엘프의 은인과 닮아 있었으니까.
적룡의 앞을 가로막은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을 땐 얼마나 놀랐나.
아이덴 루블리스가 한 번에 떠올랐다.
잔혹한 손속을 펼쳤을 때는 확신했다.
아이덴 루블리스가 다시 돌아왔다고.
“종족의 위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그때의 일을 아는 엘프는 나 말고 모두 죽었단다.”
“아.”
두 엘프의 이야기를 듣던 이준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자신의 전생을 모르는 건가요? 신에 필적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전생의 기억은 떠올렸을 터인데.”
“전 전생 각성을 못 했어요.”
사이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혁진도 똑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준이는 우리처럼 전생 각성을 안 하네.”
“이 정도의 강함으로는 전생 각성이 불가능하다는 소리 아닐까. 우리 준이는 매력이 넘친단 말이야.”
이 와중에 박정연은 이준을 칭찬했다.
한지유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일리 있는 말이에요. 현재의 지구는 1, 2년과 다르게 전생 각성자가 우후죽순 생겨 났고 있어요. 그런데 이준만 아무런 소식이 없단 말이죠.”
어느 순간 설득력이 생겼다.
전생 각성은 강함의 척도였다.
정신, 신체, 기운.
이 세 가지 모두가 잠재력의 끝에 도달해야만 4차 각성을 하는 것.
이준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미친놈. 얼마나 기준이 높으면 전생 각성을 못 하는 거야. 신이라도 되나.”
“그란투스 대륙 역사상 단 한 명. 신에 대적한 인간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이덴 루블리스에요.”
“에이. 그래도 얘가 그 사람은 아닐 거에요. 그란투스 대륙은 다른 차원이잖아. 그치?”
박혁진의 말에 박정연과 한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리에스는 세 사람과 생각이 달랐다.
“나도 아이덴 루블리스가 전생이라는 것에 한 표.”
그리에스는 돌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왜 전생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지?’
엘프의 대장로 사티아가 전생이란 단어를 꺼냈을 때 아차 싶었다.
이준이 파천혈신의 제자라는 사실만 생각했을 뿐.
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파천혈신의 제자니까 당연히 다른 능력도 뛰어나다고 여겼다.
흑룡왕 파르가의 마법이 까다롭다는 건 까맣게 잊고 말이다.
“하. 됐다. 말을 말자. 나무의 돌이나 회수하고 다음 목적지로 갈란다.”
자신을 두고 하는 말에 지쳤다.
그리에스를 만나고부터 들은 오해.
그란투스 대륙으로 오니 저마다 자신을 암흑대공으로 착각했다.
‘아무 전생이라도 각성하면 나도 소원이 없겠다.’
전생 각성은커녕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전생이 없는 건가.
그래서 4차 각성을 하지 않는 건가.
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은 괜히 신경 쓰였다.
이준이 한숨을 쉬자.
사티아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우리의 고향에 가면 알게 될 거예요.”
“그냥 나무의 돌이나 빨리 주세요.”
“그럴게요.”
사티아는 이준 일행을 이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 * *
“와 신기하다.”
박혁진은 숲을 지나 지하 굴로 들어오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지하 굴이면 머리 위에는 돌이나 흙으로 뒤덮여 있는 게 옳았다.
한데 고개를 들어보면 투명한 물이었다.
그것도 너무 깨끗한 물이 출렁이는 게 아닌가.
더 앞으로 가자.
사방이 물로 출렁이고 있었다.
“수족관 같다.”
박혁진의 감상은 정확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수족관은 물고기만 있지만.
“여긴 물 안이야.”
그들이 있는 곳은 사람도 같이 있었다.
“거짓말.”
박혁진은 물론 박정연과 한지유까지 못 믿는 눈치였다.
이준만이 어렴풋이 물 안에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에스가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터다.
“결계야?”
이준의 물음에 그리에스가 대답했다.
“중간계로 가는 물의 경계일걸?”
그녀가 사티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물의 경계는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 녀석. 드래곤이에요. 그것도 하이 드래곤.”
“용신족이란 말인가요.”
“소개가 늦었다. 난 빙룡족의 군주 그리에스야.”
사티아의 옆에 있던 엘루르가 화들짝 놀라 했다.
용신족은 죄다 흉포하고 오만한 존재라고 들었다.
화가 나면 세상을 지워버리는 걸로 유명했다.
그런 존재가 인간의 모습으로 곁에 있으니.
두려움이 이는 건 당연했다.
“보통 분이 아닐 거라 생각 했어요.”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벌써 물의 경계 끝에 도달했다.
“판타지 세계라 그런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박혁진은 눈앞의 거대한 나무를 보고 연신 감탄했다.
현대와는 완전히 다른 광경.
몬스터를 토벌하러 게이트에 많이 들어가 봤으나.
여기만큼 신기하진 않았다.
사티아가 나무에 손을 대었다.
“문이 생겼어!”
그러자 그들의 앞에 중간계로 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따라오세요.”
사티아와 엘루르가 입구로 들어갔다.
박혁진도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앞은 미지의 세계.
엘프가 태어난 곳은 어떨지.
이준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가자.”
모두가 문으로 사라졌다.
포탈처럼 하얀빛이 몸을 감쌀 줄 알았건만.
“여기가… 엘프의 시작이란 곳이야?”
바로 지혜의 숲이자 엘프의 시작에 도착했다.
박혁진은 숲을 보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메마른 나무와 숲.
쩍 갈라진 땅.
고온 다습한 온도.
푸르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밖이 더 엘프가 살기 적합했다.
“엘프뿐만 아니라 이곳이 사라지기 직전이네.”
이준의 적나라한 감상평이었다.
엘루르가 화를 내려 했으나 사티아가 막았다.
“맞는 말이다.”
“흥.”
엘루르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밖으로 나갔던 대장로가 돌아오자.
흩어져 있던 엘프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장로님 다녀오셨습니까.”
“밖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드래곤들이 돌아간 겁니까?”
“적룡은 모두 죽었네. 걱정 말고 하던 일 하시게.”
“같이 온 인간들은….”
“내 손님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엘프들이 이준 일행을 힐끔거리곤 각자 흩어졌다.
사티아가 몸을 돌려 이준에게 물었다.
“바로 나무의 돌이 있는 곳으로 가시나요?”
“그러면 저야 좋죠.”
“알겠습니다.”
사티아가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은 뒤따르면서 주변을 살폈다.
바깥과 분위기는 다르나 구조가 비슷했다.
‘밖이 살기 더 좋을 텐데 여길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이준의 생각을 읽었는지 그리에스가 입을 열었다.
“이 숲의 특별한 점은 달빛 샘물이야. 그게 메말랐으니 숲의 단점만 보이는 거야.”
“달빛 샘물이 복원되면 변화가 큰가? 숲이 건강해지는 거 말고는 없지 않아?”
“엘프의 능력이 돌아와. 그리고 제일 큰 건 따로 있는데 그건 네가 직접 확인해.”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보지.”
사티아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예요.”
이준이 고개를 돌렸다.
“여긴 우리가 지나왔던 경계의 위잖아?”
샘물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던 흔적이 보였다.
손등에 닿을 듯한 물의 높이.
샘물이 거의 메마른 상태였다.
“여기에 나무의 돌이 있어요?”
“네.”
“안 보이는데.”
이준이 기감을 펼쳐 나무의 힘을 찾았지만 소용없었다.
물의 돌을 느끼지 못했을 때처럼 기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달빛 샘물이 원상태로 돌아와야지만 나무의 돌을 꺼낼 수 있어요.”
“결국 달빛 샘물을 되살리라는 말이네.”
“부탁드릴게요.”
“어려운 일도 아니니 도와드리죠.”
“감사해요.”
대장로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정중한 인사.
정말 간절해 보였다.
이준은 물의 힘을 소환했다.
손바닥에서 휘몰아치는 물.
용이 몸을 꼬는 듯.
물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샘물이 반응은 하는데 미약해. 물의 힘을 몸 밖으로 완전히 꺼내야겠어.”
이준은 온 힘을 다해 물의 힘을 쥐어 짜냈다.
물이 한곳으로 뭉치더니 물의 돌이 만들어졌다.
‘여길 원래대로 돌려줘.’
이준의 의지에 따라 물의 돌이 달빛 샘물 중앙으로 날아갔다.
샘물에 닿을락말락 한 물의 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물의 돌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하늘로 치솟았다.
지혜의 숲을 가르는 물줄기.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아.”
사티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지혜의 숲이 예전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 * *
메마른 나무에 초록 잎사귀가 자랐다.
흙만 있던 곳도 어느새 잡초가 생겨났다.
이게 바로 원신의 힘이었다.
세상을 지탱해주는 속성.
생기를 잃은 곳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달빛 샘물을 채워주라면서요.”
이준이 두 팔을 벌렸다.
물의 돌이 뿜어대는 기운을 멈추고 달빛 샘물로 들어갔다.
이준의 오른손이 옆으로 움직이자.
콸콸콸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의 돌에서 폭포수가 흘러나왔다.
왼쪽 손도 옆으로 움직였다.
이번에도 둑이 터졌다.
물의 돌에서 나온 물줄기에 의해 달빛 샘물이 채워지고 있었다.
“다, 달빛 샘물이!?”
“무, 무슨 일이야!”
“이 비는 또 뭔데.”
엘프들이 하던 일을 멈췄다.
지혜의 숲에 찾아온 기적.
기력이 없던 엘프들이 비를 맞더니.
슬슬 힘을 되찾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저, 저기 좀 봐!”
한 엘프의 외침에 엘프들은 그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달이… 떴어.”
“잃어버린 달이 돌아왔다!”
“대장로님. 달이 돌아와 샘물을 비추고 있습니다!”
엘프들의 얼굴에 기쁨이 차올랐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기적으로 시작해서 대기적이 이뤄졌다.
샘물이 가득 차고 달이 뜨니.
지혜의 숲은 어느새 초록으로 가득했다.
물의 돌은 제 할 일을 다 한 모양인지.
이준의 품으로 돌아와 사라졌다.
“현기증 나는데.”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물의 힘은 사신기에 녹여져 있었다.
물의 돌은 사신기의 응집체.
이준은 엘프의 숲을 되살리기 위해 본인의 내공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사티아는 감격스러워했다.
달빛 샘물이 차오르다 못해 넘쳐흘렀다.
뿐인가.
달의 기운도 강렬했다.
달빛 덕분에 엘프의 힘이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나무의 돌로 갚아주세요.”
“은인께 뭐든 못 드릴까요.”
사티아가 나무 지팡이를 소환했다.
지팡이가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달빛 샘물 중앙에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마법진이 샘물을 비추더니.
물을 뚫고 나무가 모습을 보였다.
“이것도 숨겨져 있었네. 그러니까 내가 기운을 못 느끼지.”
달빛 샘물이 차 있어야 나무의 돌을 꺼낼 수 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달빛 샘물의 물을 빨아들이는 나무.
엄청난 흡입력이었다.
차고 넘치던 샘물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을 정도.
샘물을 다시 동낼 작정인 듯싶었을 때였다.
다 자라난 나무가 초록색 돌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