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37화
자선의 신이자 어둠을 관장한 천계의 신.
가브리엘이 그란투스 대륙에 강림했다.
신계의 율법상.
천계왕과 최고위 천사들.
즉 7대 가주는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됐다.
레미엘이 인계에 강림했어도 천계는 어떠한 벌도 받지 않았었다.
자중하고 있으면 유야무야 넘어갈 일이었지만.
천계왕 미카엘과 더불어.
가장 강한 가브리엘까지 그란투스 대륙에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신의 강림.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들이 가브리엘에게 압도됐다.
“그 어둠을 내게 다오.”
가브리엘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상처로 가득한 용병 남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가브리엘을 향해 다가가더니.
무릎을 꿇은 채 공손히 어둠의 돌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가브리엘이 어둠의 돌을 집었다.
용군주의 강함만큼은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않은 힘이 이 작은 구슬에 담겨있었다.
어둠의 돌을 보던 가브리엘이 중얼거렸다.
“음흉한 놈들. 이런 힘이 그란투스에 있다는 걸 알고 그동안 감췄던 모습을 드러냈구나. 괘씸한.”
만약 용신족이 원신의 돌을 흡수한다면 천계와 용계의 입장이 달라졌을 터다.
어쩌면 천계는 더 이상 4대 신계에 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원신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고작 작은 돌멩이에 얼마나 힘이 담겼을까 생각했는데.
용신족이 탐할 만했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네놈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가브리엘이 어둠의 돌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돌이 손바닥을 떠나 공중에 떴다.
검은 구슬에서 기류의 회오리가 쳤다.
“오오. 신께서 우릴 구원하신다.”
“신이시어!”
“광명을 내려주소서.”
광기 가득한 인간들이 몸을 숙이며 기도를 했다.
어둠에서 흘러나온 기류가 몸을 상하게 하는데도 신을 찾는 모습.
꼭 광신도와 같았다.
피게로의 영주도 최대한 몸을 낮췄다.
신이 직접 강림하니.
없던 신앙심도 생겼다.
어둠의 돌에서 나온 기운이 피게로 전 지역을 감쌌다.
주변 가득 내려앉은 어둠.
온통 새까만 광경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 빛이 나는 건 오직 가브리엘뿐.
어둠의 기운은 서서히 가브리엘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힘이 돌아온다!”
가브리엘은 기뻤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이 자그마한 돌멩이가 예전의 강렬함을 되찾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내 품에 안기거라. 너희의 뜻을 내가 이루어주겠다.”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들릴수록.
어둠은 빠르게 흡수되어 갔다.
가브리엘이 눈을 감았다.
어둠을 온전히 느꼈다.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었으나.
익숙하기도 했다.
그의 심장에 어둠의 돌이 자리 잡은 순간!
가브리엘이 눈을 번쩍 떴다.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소름 끼치는 기운이 주변으로 일제히 뿜어졌다.
“원신의 힘이 이 정도였다니….”
가브리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어둠의 돌을 대할 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반응.
드디어 잃어버린 힘을 되찾았다.
그것도 완전히.
굳이 용신족의 힘을 뺏지 않아도 됐다.
아니, 어쩌면 그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이제 신선계 놈들에게 굽히지 않아도 된다.”
뿌득.
가브리엘이 이를 갈았다.
그동안 얼마나 치욕스러웠나.
마계에 치이고 신선계에 치이고 지옥계에 치여 살았다.
이제는 하찮은 대우를 청산할 때가 왔다.
“특히 파천혈신. 네놈만은 내 손으로 죽여주지.”
가브리엘의 입매가 비틀렸다.
가장 죽이고 싶은 자를 뽑으라면 파천혈신을 꼽았다.
지금은 신선제가 된 설극이 천계에 어떻게 행동했나.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었다.
천계의 물건을 그냥 강탈해갔다.
맡겨놓은 물건인 양.
뻔뻔하게 요구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전에 네놈의 제자부터 가지고 놀아주마. 크크.”
그 복수로 신선제의 제자인 파천제부터 처리할 생각이었다.
파천제는 신선제의 역린.
파천제가 당하면 아주 즐거운 광경을 볼듯 했다.
“피게로 영주.”
“네… 어둠의 주인이신 가브리엘이시어.”
“널 내 사도로 임명하겠다.”
“하찮은 절 말이십니까?”
“네 욕망만큼 어둠의 신도를 만들어 보거라.”
“저따위를 믿어주시다니.”
“내 권능을 네게도 내려주겠다.”
“감사합니다!”
피로 얼룩진 피게로 영주가 황홀한 얼굴을 했다.
신의 사도.
한 지역의 영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귀한 존재였다.
대신관을 넘어 대주교보다 높은.
신을 모시는 자 중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게 바로 사도였다.
신이 직접 임명한 사도였기에 피게로 영주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네 사명을 잊지 말라.”
“어떻게든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곧 신탁을 내리마.”
번쩍.
가브리엘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어둠의 돌을 흡수하고 천계로 복귀한 것이다.
몸을 숙이고 있던 피게로 영주가 허리를 폈다.
“신께서 내게 사명을 내리셨다. 너희들도 신의 사명을 따르겠느냐.”
“영혼도 바치겠습니다.”
“좋다. 가브리엘께 입은 은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도록 하자.”
피게로 영주의 말에 모두가 가브리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 *
천계의 대도서관.
네일 레미엘이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
네일은 밥을 일체 안 먹었는지.
피골이 상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벌컥!
대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계속 도서관에 박혀있을 거냐.”
“….”
제넷 사리엘이었다.
네일 레미엘의 절친.
제넷은 답답한 표정으로 네일을 내려다봤다.
“이제 레미엘 가주님은 안 계셔. 네가 이러고 있으면 레미엘 가는 끝장이야.”
제넷의 말에도 네일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사락-
그저 책장만 넘겼다.
그 모습이 거슬렸을까.
제넷이 성큼성큼 다가가 네일의 멱살을 잡으며 일으켰다.
“정신 안 차려?”
“….”
“이 새끼…어?”
네일의 눈동자를 본 제넷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에 파묻혀 있어서 흐리멍덩할 줄 알았던 눈동자가.
굉장히 강렬했다.
“뭐야 너.”
제넷이 네일의 멱살을 놓았다.
네일은 곧장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펴며 말했다.
“…암흑대공에 관한 내용을 샅샅이 읽어보고 있었어.”
“그, 그런 거냐. 난 네가 폐인이 된 줄 알았다. 진작 말하지.”
제넷이 무안해했다.
괜히 네일에게 윽박지른 것 같았다.
그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치우고는 네일의 옆에 앉았다.
“암흑대공… 이자, 뭔가 이상해.”
“어떤 점이?”
“그란투스 대륙을 강타할 정도의 명성이면 영혼서가 있어야 하는데 대도서관 어디에도 암흑대공으로 보이는 영혼서는 없어.”
“그게 말이 돼? 여긴 그란투스 대륙의 모든 영혼이 모여있는 곳이잖아.”
천계의 대도서관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
바로 이곳이 지옥계의 사자서각과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환생을 시키는 건 다른 곳에서 하나.
영혼의 보관은 대도서관에서 맡았다.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암흑대공과 관련된 자료에는 내용이 하나씩 빠져있어.”
“어디 봐봐.”
제넷이 네일이 가진 책을 뺏어 읽었다.
네일보다는 지식이 얕지만.
그 또한 사리엘 가문의 후계자.
엘리트 중에 엘리트에 속했다.
그가 책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하루가 지났을까.
제넷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 말대로야.”
암흑대공에 대한 책은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완벽한 내용을 가진 책은 없었다.
일부의 내용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게 보였다.
“아이덴 루블리스. 검의 무덤에서 영원히 사라지다. 원래 이 대목은 검의 무덤에서 잠들다 아니야?”
“맞아. 구멍이 뚫린 내용의 공통점은 바로 저 ‘사라지다’란 문구야.”
“암흑대공의 영혼서가 없는 건 우연이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하필 파천혈신의 제자가 그 암흑대공의 힘을 이었고?”
“어때?”
“냄새가 나. 네가 다른 것도 제쳐둔 채 이곳에 짱 박혀있는 이유가 있었네.”
“이걸 봐봐.”
네일은 옆에 뒀던 책을 펼쳐서 제넷에게 건넸다.
“아이덴 루블리스는 그란투스 대륙 출신이 아니다? 루블리스는 제로니아 왕국의 명가잖아. 왕가와 거의 맞먹는 전통을 자랑하는 곳으로 아는데.”
“심지어 적통인 자야.”
“그런데 그란투스 대륙 출신이 아니라니. 말이 안 되잖아. 루블리스가 다른 출신을 데려와서 적자를 삼았다는 거야 뭐야. 제로니아 역사서에선 루블리스가 누구보다 혈통을 중시한다고 써 있었어.”
네일도 제넷과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아이덴 루블리스에 대해서 알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
책에선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암흑대공에 대한 건 전부 뒤져본 결과… 이걸 찾았어.”
네일은 책이 펼쳐진 채 뒤집어져 있는 걸 집어 제넷에게 줬다.
제넷은 이번에도 중얼거리면서 읽었다.
“환생도 회귀도 아닌 빙의자 아이덴 루블리스!?”
그가 큰 눈으로 네일을 보았다.
네일은 확신한다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허황된 이야긴 아니고?”
“절대.”
“어느 등급 책장에서 찾았어?”
“노멀.”
“노멀? 미쳤냐. 레전드 등급도 못 믿어줄 판국에 노멀 등급의 책장이라니.”
“넌 아이덴 루블리스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흑룡왕 파르가가 신뢰한 유일한 인간. 신조차 이루지 못한, 전 속성을 가진 괴물.”
“또?”
“이게 다야.”
네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제넷과 비슷하게 알고 있었다.
대도서관에서 암흑대공과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보기 전까진 말이다.
“아이덴 루블리스는 시한부였어.”
“시한부? 오래 살았잖아. 도중에 죽을병이 고쳐지기라도 했나.”
“마력 포화와 함께 폭주하는 병에 걸렸대.”
“어둠 마력의 저주는 고칠 수 없잖아?”
어둠 마력의 저주.
신선계 쪽에선 극마역천지체로 잘 알려진 병이었다.
마공을 사용하면 할수록 기혈이 역으로 빠르게 돌아 폭주하는 신체였다.
“아이덴 루블리스는 이 병을 고치고 그란투스 대륙에 우뚝 썼어.”
“그것만으로 빙의자라고 말하는 거야?”
“시한부였던 그가 달라지기 시작했을 때 신계에 유례없는 진동이 일어났어.”
“그게 어떻다는 거야.”
“아버지 말로는… 그 진원지가 지옥계의 염라전이라더라.”
“뭐!?”
제넷이 다시 한번 놀랐다.
신계가 뒤흔들릴 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신계 대전이 일어나거나 4대 왕이 권한을 사용했을 때였다.
이 시기에 진동의 진원지가 염라전이었다는 건.
“높은 확률로 염라대왕이 왕의 권한을 사용했다는 소리야.”
권능이 발휘됐다는 증거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아이덴 루블리스가 빙의자라는 게 얼추 맞아떨어진다.
물론 모든 게 추론.
정확한 증거는 없었다.
그래도 확신했다.
염라대왕이 누군가를 이용해 아이덴 루블리스에게 빙의하게 했다는 걸.
‘흑룡왕의 마법은 아무도 익힐 수 없어. 파천혈신 정도의 인간이 아니라면 불가능해. 그가 인정한 파천제라면 암흑대공의 힘도 다룰 수 있을 거야.’
과연 파천혈신이 천계로 쳐들어와 파르가의 서를 강탈해 간 게 우연일까.
네일은 절대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제넷도 네일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넌 이준이 암흑대공의 환생자라고 여기는 거냐?”
“어쩌면.”
“만약 사실이라면 네 복수는 어려울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책을 잡고있는 네일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걱정마, 친구. 내가 도와줄게. 안 그래도 네게 말해줄 게 있어.”
“뭐?”
“가주님들이 인계로의 강림을 선택하셨어.”
“신계의 율법을 어기고 파천제와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 인계에 퍼진 원신의 돌을 직접 회수하신대.”
“똑같은 말이잖아.”
“파천제가 방해한다면 부딪히겠지. 이참에 같이 싸워서 죽이면.”
“안 돼! 말려야 해.”
네일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잖아.”
“…설마?”
“염라대왕이 왕의 권한까지 사용해서 아이덴 루블리스의 몸에 빙의자를 집어넣은 이유부터 알아야 해! 아니면….”
목소리가 끝까지 안 나왔다.
불길한 소리였으니까.
7대 가주에게.
천계의 최상위 신에게 소멸된다는 말을 어떻게 할까.
기만행위였다.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
“늦었어. 이미 가브리엘 님이 그란투스 대륙에 강림하셨거든.”
“아.”
네일이 짧게 신음했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남은 수수께끼를 풀어야지만 모든 게 보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