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8화
패천삼공 천살.
무극자 사부와 싸울 때 마지막으로 봤던 무공이다.
패천삼공을 얻었으나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는 지금과 같이 탈진이 나기 때문.
세 단전을 전부 열어야 했고, 사용하더라도 내공이 전부 소진된다.
한동안 그로기 상태가 되니.
적을 상대로는 쓸모가 없었다.
물론 약한 적은 괜찮겠지만 만약 패천삼공을 막는 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거다.
이렇게 적이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만 쓰는 게 가능했다.
“꼼짝할 힘도 허억… 없어…”
[패천삼공으로는 운의 결계를 깨지 못할 터인데!]
“제 몸속에… 뇌령석의 힘이 잠들어 있는 걸… 모르세요…?”
[알지. 하지만 그 힘은 완전한 게 아니지 않느냐. 무엇보다 그 힘을 꺼내려면 자연경 끝자락은 되어야 해.]
[…흐흐. 저 마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구나! 천살성에 마신지체!]
무극자의 역천마신지체와는 달리 이준은 고유의 마신지체를 타고났다.
거기다가 천살성까지 있으니.
무공의 격이 달라진 것.
사람들이 마신지체를 타고난 이를 두려워하는 이유기도 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
[기운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고 있어 네가 마신지체와 천살성을 얻었다는 걸 깜빡했구나…]
무극자 사부가 똥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제자를 놀리는 재미로 살았다.
옆에서 훈수와 꼰대질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놀릴 궁리만 했는데 웬 걸.
제자가 운의 결계를 깨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해놨던 말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후우우. 그 표정 보기 좋네요.”
[이놈이!]
무극자 사부가 버럭 소리친 순간.
운의 결계 밑에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강력한 뇌기였다.
박혁진이나 박정연이 사용한 뇌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뇌기.
피부가 아려왔다.
[허락하지 않은 손님이 왔군.]
지저에서 들려오는 저음의 목소리였다.
인간의 공포를 끌어올리는 음성이기도 했다.
이준에게는 영향이 없는지.
그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네가 청룡이지?”
[오만한 인간이군. 운의 결계를 깰 정도이니 당연한 건가?]
“밑으로 내려가도 되지?”
[내 허락없이도 내려올 생각 아닌가?]
“맞아.”
이준은 곧바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운의 결계가 아직 다 걷히지 않았으나.
무작정 밑으로 내려갔다.
뇌기의 안개에 둘러싸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청룡이 결계를 거둔 것이다.
“엄청깊네. 이러다 뼈부러지는 거 아니야?”
[흥. 자연경인 네놈이 말이냐? 일 없다.]
자신의 농담에 무극자 사부가 투명하게 말했다.
사부 뜻대로 안되서 심사가 꼬인 모양이다.
“저라도 그냥 떨어지면 골로 간다고요.”
장포자락이 미친 듯 펄럭였다.
내공으로 속도를 줄이고 있지만 낙하하는 속도는 그 이상이었다.
[그러면 다른 제자를 구하면 되겠구나.]
‘와, 단단히 삐치셨네.’
한 번 놀리지 못했다고 저렇게 토라질 일일까.
이럴 때면 꼭 어린아이 같았다.
내려가는 동안 사부의 투덜거림을 들어야 했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스킬을 시전.
그동안 사부에게 단련되어 온 덕분인지.
사부의 투덜거림이 들리지 않았다.
***
한참을 내려와서야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후.”
어떤 방해도 없이 땅을 밟았다.
이준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청룡이 허락한 것.
아니었으면 꽤나 고생했으리라.
“안개가 지독하게도 껴있네.”
자연경에 있지만 안개로 인해 시야가 어두웠다.
일반적인 안개가 아니었다.
청룡의 힘이 담긴 안개.
무극자 사부 말대로 자연경 끝자락이 아니면 온전한 사신수의 힘을 감당하기란 버거울 것 같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가니.
짙었던 안개가 사라졌다.
그리고 보이는 거대한 몬스터.
청룡이 푸른 눈을 빛내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신수와는 달리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이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었다.
[이 사부는 말이다. 온전한 힘을 가진 사신수를 전부 겪었느니라. 그런데도 사부의 기에 눌렸지. 끌끌.]
자신의 행동에 사부가 언제 삐졌냐는 듯.
자기 자랑하기 바빴다.
[내때는 말이다…]
다시 라떼가 시작되었다.
이를 듣고 있으려면 며칠이 지나도 모자랐다.
무시가 답이었다.
청룡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하려던 찰나.
되려 청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지옥계에서 죄인이 탈출했어.”
[지옥계라면 구천옥?]
“어. 구주가 인간의 몸에 빙의해서 제일 먼저 노리는 게 바로 너희 사신수야.”
[우리가 사라져야지만 몸을 완전히 숨길 수가 있으니…]
“그때문에 널 찾아왔어.”
[해결할 방법이 없을 텐데?]
“나한테 유일한 해결책이 있어.”
[무어냐.]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면 돼.”
[말도 안되는 소리! 내가 인간에게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지만 인간의 밑으로 들어갈 순 없다.]
청룡의 목소리가 커졌다.
녀석의 몸이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하나 이준은 청룡이 분노하든 말든 개의치 않아했다.
“왜 말이 안 돼? 주작이랑 현무는 이미 내 밑에 있는데.”
[현무가 말이냐!?]
청룡이 놀라했다.
주작은 애초에 인간 친화적인 존재였다.
아니, 파천혈신이라는 인간에 한해서 친화적이었다.
그런데 현무는 달랐다.
사신수 중에 가장 인간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존재.
그게 바로 북쪽의 수호자 현무였다.
현무가 인간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사신수가 생겨나고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날 능멸하지 마라. 현무는 인간 밑으로 들어갈 놈이 아니다.]
“안 믿네.”
[당연하지 않나. 현무를 본 시간은 인간인 너보다 내가 훨씬 오랜 세월을 보았다.]
‘안 믿겠지. 내가 강제로 현무를 앉혀 놓으려해도 거절했을 거야. 사부가 옆에서 협박해준 덕분에 현무가 마음을 돌린 건데.’
무극자 사부가 인간이었을 때면 몰라도.
신선제가 된 지금은 사신수라도 사부의 영혼을 볼 수 없었다.
사부가 일부러 모습을 보인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니 청룡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닐까.
‘사부님.’
[일 없다.]
무극자 사부를 불러봤지만 아직 삐진게 안 풀렸는지.
바로 거절 신호를 보내왔다.
마치 자신이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다친 현무 때처럼 쉽게 설득은 안 될 것이니라 끌끌.]
‘이거 사부가 싼 똥인데요?’
[……]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을.
‘헉. x됐다.’
이준은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인지했다.
곧 있으면 일갈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인간일 때도 호통을 치면 골이 울렸는데 이제는 신선제가 되었다.
신계의 사대왕 중 한 명.
잘못하다가는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과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됐는데 사부의 일갈로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까.
별의별 이상한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아아아알!]
“아악!”
이준이 머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창백해진 얼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내상이었다.
EX급 초입, 무림의 경지로 자연경 완숙의 경지에 있는 그가.
고작 호통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망나니같은 놈을 보았나! 사부가 실수를 했으면 응당 그 제자가 수습을 해야하는 게 도리인 것을! 뭐? 또오옹을싸? 내 오늘 다시 네놈의 버리장머리를 뜯고 고쳐 주겠느니라!]
무극자 사부가 하얀 소매를 걷었다.
너죽고 나죽자는 모습.
그 어느때부터 사부의 분노가 컸다.
그러던 그때였다.
[파천혈신!?]
청룡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준 옆에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영혼의 모습으로 파천혈신이 나타난게 아닌가.
애초부터 곁에 있었다면 파천혈신의 기척을 못 느꼈을 리 없다 여겼다.
“사, 사부님 그게 아니라.”
[닥쳐라! 감히 사부를 뭘로 보고.]
“설마 손찌검을 하는 건 아니죠? 에이. 영혼인데 가능할 리가…”
[흥. 가능하지 못할게 있나. 내가 바로 신선제이니라.]
무극자가 눈을 부라리자 이준은 청룡에게 도움을 청했다.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청룡은 가차없이 외면해 버렸다.
의리없는 놈.
제 목숨 살려주겠다고 손수 찾아왔는데 자신을 버린 거다.
배신감이 들었다.
“사, 사부 아악!”
무극자 사부의 손짓은 정말로 아팠다.
어디를 때려야 고통이 극대화되는지 정말 잘 알았다.
“죄송해요!”
[일 없다 이놈아!]
여태껏 일갈로만 교육을 받았는데 이제는 구타였다.
신선제가 된 사부가 이토록 싫은 적은 없었다.
차라리 인간일 때는 호통만으로 끝났는데 신선제가 되고 나니 손과 발을 쓰는 게 아닌가.
서러웠다.
일방적으로 맞는 게 이렇게 아팠다니.
자신에게 맞은 가주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다음부터는 조금 살살 다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부의 교육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끝났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느냐.]
“넵! 제가 잠시 정신을 놨습니다!”
이준의 행동에 각이 잡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조금 부은 느낌이랄까.
아무튼 군기가 바짝 들었다.
[아둔한 제자가 잠시 이성을 잃은 건 이해하겠느니라.]
무극자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영락없이 신선의 모습.
모든 걸 초탈한 듯 보였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이준의 바뀐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이를 청룡이었다.
파천혈신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상한데 인간을 마구 구타하는 게 아닌가.
영혼임에도 인간은 아파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네 볼일 보거라.]
“네!”
이준은 큰 목소리로 대답한 후 청룡에게 몸을 돌렸다.
“주작이랑 현무가 내 밑에 있는 건 맞으니까 너도 네 밑으로…”
[자, 잠깐! 저 영혼은 뭐냐?]
“응? 내 사부님?”
[그, 그래. 파천혈신은 네 손으로 죽이지 않았나!]
“아팠던 기억을 왜 떠올리게 하냐.”
[내, 내 질문에 먼저 대답을…]
“아, 넌 사부님이 신선제에 오르셨다는 걸 모르겠구나.”
[신선제!? 비어있던 신선계의 왕 말이냐?]
사신수는 인계의 일만 알았다.
신계의 상황은 간간히 전해 듣는 게 다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무극자가 신선제가 된지 전혀 몰랐다.
“응. 그러니까 영혼 상태에서도 이렇듯 인계에 영향력을 끼치시는 게 아닐까?”
[파천혈신이 신선제라니!]
청룡은 충격이 큰지 몸을 휘청였다.
공중에 떠 있던 녀석이 바닥에 앉았다.
“사부님이 신선제가 된 게 충격적인가봐요.”
[홀홀. 이 사부의 영향력이 이 정도이니라.]
“역시 고금제일인이자 신선계의 1인자 이십니다.”
이준은 연신 무극자에게 아부를 했다.
더 강해지지 않은 이상 사부에게 깝친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그 전까진 최대한 사부의 비위를 맞추는 게 이로웠다.
[끌끌끌. 참된 제자의 자세인지고.]
무극자는 굉장히 만족해하는 얼굴이었다.
제자의 모습이 마음에 드니 인자한 미소까지 띄웠다.
이준은 무극자 사부에게 아부하고 다시 청룡을 보며 말했다.
“궁금증은 풀렸지?”
[…믿기지 않는다.]
“네가 안 믿으면 뭐해. 사부님은 이미 신선제가 되셨는데.”
[정말이냐? 내게 거짓말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니까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어. 중립 입장에 있는 사신수 맞아? 인간한테 불신있는 것 같네.”
[하고 많은 신선 중에 파천혈신이 신선계의 왕이 됐는데 너같으면 믿겠느냐.]
“사부님이 신선보다 강한데 신선제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이준은 청룡의 혼란스러움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말을 걸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똑같은 반응이었다.
왜?
어떻게?
이 반응이 다였다.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해도 똑같은 말을 반복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내 밑으로 들어올 거야 말거야?”
[들어가겠다.]
“엥?”
이준의 눈이 커졌다.
기대 안 했던 대답이었다.
청룡이 바로 수락할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왜?”
[뭘 물어보느냐. 이 사부때문이지. 홀홀.]
[신선제가 네 옆에 붙어있는데 거절할 수 있겠나.]
청룡은 오로지 사부 때문에 자신의 제안을 수락한 거다.
정확히는 사부가 자신을 구타한 모습을 보고 제안을 받았다.
청룡이 생각하는 파천혈신은 신선제가 되고도 행동이 바뀔 자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