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7화
검제의 수련동.
철혈검가의 금지이자 뿌리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의 검제를 있게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
이준은 그런 게이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음.”
박춘식이 신음을 토했다.
철혈검가의 뿌리를 이준에게 내어 줘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수련동 게이트는 내게는 필요가 없지만 자손들에게는 큰 유산이 될 것인데….’
수련동 게이트가 좋은 이유는 다양한 등급의 몬스터가 나온다는 거다.
입구 근처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그린급.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각성자가 훈련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그린급을 지나면 블루급 몬스터가 포진해 있었다.
하급부터 최상급까지.
각자의 영역에서 잘 나오지 않았으며 어그로가 끌리는 경우도 없었다.
그 안엔 레드와 블랙급 몬스터도 있었으나.
게이트 안쪽까지 쭉 들어가야지만 보였다.
어느 게이트보다 안전한 곳.
철혈검가의 자제들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했다.
그래서 검제는 여길 수련동 게이트라 불렀다.
‘하지만 파천자와 싸워 보고도 싶다. 내 힘이 얼마나 통하는지.’
이준이 특별 거점 점령전을 수락한다면 자신들의 등급에 맞게 내공을 제한할 것이다.
과연 같은 등급의 내공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이전같이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보일지.
아니면 엇비슷할지 무척 궁금했다.
박춘식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소. 수련동을 드리겠소.”
“그 정도로 저와 싸우고 싶으세요? 수련동 게이트는 철혈검가의 심장일 텐데.”
“이 늙은이의 욕심이라오.”
“그럼 주신다니 사양하진 않을게요.”
이준은 수련동 게이트를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련동 게이트를 얻어야 했다.
이는 청룡이 머무는 곳.
수련동에 모습을 비추진 않지만 안쪽 깊은 곳에 청룡이 있었다.
“지금 당장 하시겠어요?”
“하루만 시간을 주시오. 우리도 준비해야 할 게 있으니.”
“하루요? 그러면 거점 점령전이 전부 끝나고 마지막에 하는 걸로 하죠. 저도 일 봐야 할 게 있어서 말이에요.”
“우리는 좋소.”
“그럼 일주일 뒤에 뵙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준이 몸을 돌렸다.
그가 몇 걸음 걷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얻었네.”
박춘식이 가주들을 향해 말했다.
옆에서 정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이면 많은 준비를 할 수 있겠어.”
“전략도 짜야겠지요?”
홍엽상이 슬며시 물었다.
이에 류한길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한 소리! 진법이든 결계든 가능한 건 모두 동원해.”
그의 입은 귀에 걸려있었다.
이준과의 싸움은 그를 흥분시켰다.
벌써부터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와 싸운다는 긴장감으로 인해 손에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도 너무 좋았다.
어쩌면 이번 싸움으로 인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총 참가 인원… 아홉 명이군요.”
한지웅이 인원을 체크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에게 검은 머리 외국인이 다가왔다.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파스콜 가문의 가주 랭스 파스콜과 그의 집사인 제롬 슈워츠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경기가 시작할 무렵 도착했습니다.”
랭스 파스콜은 탈리아와 토비의 경기를 보기 위해 영국에서 날아왔다.
물론 최근에는 각사학에 대륙 간 포탈이 설치되어 승인만 나면 바로 한국으로 넘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정신이 팔려 파스콜 가주가 온 지도 몰랐군요. 죄송합니다.”
“파스콜 가문의 가주가 아닌 자식들의 아비로 왔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아이들이 많이 발전한 것 같습니다. 특히 토비가 눈부시게 성장한 느낌입니다.”
파스콜 가주는 경기를 지켜보고 흡족해했다.
그토록 소심하던 토비가 누나인 탈리아와 검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격렬하게 말이다.
아버지의 입장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뿐인가.
그동안 지녔던 단점들도 보완한 느낌이었다.
특히 탈리아의 성급한 성격이 많이 고쳐진 듯했다.
팀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날뛸 줄 알았건만.
제 자리를 지킨 채 토비를 상대했다.
자식들의 성장에 아버지로서 뿌듯했다.
“아이들이 노력한 덕분이지요.”
“좋은 선생님 밑에서 배운 덕분이기도 합니다. 아, 그보다 파천자 님과 특별전을 하는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리됐습니다.”
한지웅의 말에 파스콜 가주는 자신과 제롬 슈워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끼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가주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인원은 많을수록 좋았다.
더욱 격렬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
“당연히 됩니다.”
“감사합니다. 혹시나 참여를 못 할까 봐 불안했는데 하하.”
랭스 파스콜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 순간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파스콜이 참여하는데 내가 빠질 순 없지.”
노말 페니모어와 그의 집사 조쉬 막론이 나타났다.
* * *
이준은 철혈검가의 수련동 게이트로 왔다.
삼엄한 경계였으나 이준에게는 무의미했다.
“현이야. 돌아가.”
무극대의 막내인 심현이도 강하긴 하나.
철혈검가의 경계를 뚫고 수련동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준이 기척을 감춰 준 덕분이다.
“사 단주가 가주의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여긴 네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야. 아니지. 들어갔다가 강제로 튕겨 나올걸?”
“검제 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겁니까?”
“…내가 갈 곳은 자격이 필요해. 그러니까 가문으로 귀환해.”
“그러면 어쩔 수 없군요. 돌아오시면 연락 주십시오.”
“나갈 때 들키지 마.”
“네.”
심현이가 사라지자 이준은 수련동 게이트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온 이준은 광활하게 펼쳐진 넓은 평원을 볼 수 있었다.
[청룡의 기가 느껴지는구나.]
“어떻게 바로 찾을 수 있는 거예요?”
[홀홀. 이 사부가 누구냐. 인계에선 고금제일인이었던 무인이고 신계에서는 신선제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니라.]
무극자 사부가 자화자찬을 했다.
신선제에 올라도 자신을 자랑하는 건 안 고쳐지나 보다.
이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누구의 사부신데요.”
[홀홀홀.]
행동과는 달리 입은 무극자 사부를 칭찬하고 있었다.
다만 진정성이라곤 1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극자 사부는 좋다고 웃었다.
정말 단순한 사부.
어떻게 신선제에 오른 건지 정말 의문이었다.
신계에서 사기나 안 당하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요?”
[네 심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되느니라.]
“심장이요?”
[중단전에 뇌령석의 힘이 깃들어 있지 않느냐.]
뇌령석은 청룡의 힘이 담긴 정수.
박혁진을 치료하다가 얻게 된 힘이었다.
사부의 말을 듣고 중단전의 힘을 움직였다.
그러자 눈에 강렬한 선이 잡혔다.
“저거죠?”
[그러니라.]
“쉽네요.”
한번 느껴 본 기운은 잊히지 않는 법.
특히 눈에 보이는 수많은 실선을 봤을 때는 더더욱 기억에 박힐 수밖에 없다.
[홀홀홀.]
그런데 무극자 사부가 꺼림직하게 웃었다.
자신을 골탕 먹일 때나 뱉는 웃음.
뭔가 신경에 거슬렸다.
“찜찜하게 왜 그러세요.”
[끌끌.]
이준은 귀를 막았다.
무극자 사부의 음흉한 웃음을 듣고 있으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청룡을 빨리 만나기 위해 귀를 닫고 움직였다.
이준은 뇌기의 실선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밑을 가리키는 뇌기의 실선.
경공을 펼쳐 움직이는 와중, 절벽에 다다르자 뇌기의 실선이 끊겼다.
“어쩐지 찜찜하더니. 후우우.”
[이제 어쩔 테냐. 뇌기의 실선이 없는데 청룡을 어찌 찾을꼬?]
“이 밑에 청룡이 있는 건 분명한데 결계를 어떻게 뚫지?”
현무의 절대적인 방어 결계보다 수 배는 단단해 보였다.
자연경, EX급 초입에 있는 이준도 뚫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견고했다.
이 결계를 뚫어야지만 청룡에게 가는 뇌기의 실선이 다시 보이지 않을까.
“그냥 뚫어 봐?”
[가능하겠느냐?]
“저 자연경이에요, 사부님.”
[그래 한번 뚫어 보거라. 청룡의 허락 없이 이 안으로 들어가려면 결계를 무너트리는 방법밖에 없느니라. 끌끌.]
무극자 사부의 저 자신감 찬 목소리가 거슬렸다.
항상 제자를 골탕 먹이고 싶어서 안달인 사부.
반대로 자신이 사부를 놀래켜 주고 싶었다.
혼원신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쿠웅-
이준의 몸에서 회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회색의 파동이 주위로 퍼지자 잡초가 메말라 버렸다.
“마안.”
이준의 눈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마안은 패시브 스킬.
마신지체로 인해 얻게 된 마안은 평소에도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 이렇듯 마안을 집중적으로 사용한 건 드문 일.
EX급 스킬답게 눈이 빠지게 시려 왔다.
내공이 극심하게 소모되는 건 덤이었다.
[마안(EX)이 극성으로 펼쳐졌습니다.]
[세상 만물 판별이 가능합니다.]
[판별 대상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상 - 운의 결계(뇌), 청룡이 펼친 환영 미로진.]
[파훼법 - 청룡의 기운 주입 or 결계를 강제로 해체.]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
청룡의 기는 자신의 중단전에 있었다.
혼원신공이 청룡의 기를 많이 키워 놓은 상태.
이 정도의 양이면 결계가 충분히 깨질 것이다.
절벽 아래로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뇌령석의 기운을 주입했다.
파직-
파지지직-
절벽에 깔린 안개에서 뇌기가 흘렀다.
안개 사이로 번쩍이는 빛.
게이트 하늘이 요동쳤다.
결계가 깨질 듯 말 듯했다.
밀고 당기기를 하며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이준은 이를 악물고 뇌령석의 기를 주입했다.
하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계가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후욱… 후욱….”
오랜만에 숨이 가빠 왔다.
이마에도 땀이 흘렀다.
힘들어 죽겠는데 귀에선 무극자 사부의 음흉한 웃음이 들려왔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흘린 웃음이리라.
오기가 생겼다.
사부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다.
“빌어먹을. 내가 이 결계 꼭 깨고 만다.”
이준이 이를 악물었다.
다시 마안을 사용했다.
눈이 회색빛으로 번쩍였다.
이번에는 뇌령석의 기운을 주입하는 게 아닌, 파괴.
청룡이 결계를 열어 줄 생각을 안 하니.
강제로 파괴하려는 것이다.
하단전에서 올라온 혼원신공이 혈맥을 타고 중단전을 지났다.
중단전을 지나 상단전에 이르자.
이준의 목에 핏대가 섰다.
빛과 같은 속도로 흐르는 내공.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을 모두 열었다.
이제 어떤 무공을 꺼낼지 빠르게 선택할 차례였다.
그러나 이준은 이미 무공 선택을 끝냈다.
그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센 무공.
패천기공 중 삼공, 천살이었다.
[끌끌. 천살이라도 청룡이 겹겹이 쌓아 올린 결계를 무너트릴 성싶으냐.]
무극자 사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준이 절대 결계를 깨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천살.”
패천삼공이 펼쳐졌다.
하늘이 갈라진다거나 땅이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오로지 정적.
세상의 소음이 사라졌을 뿐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풀이 흔들리는 소리.
전부 사라졌다.
무음이 된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검은 비가 뚝뚝 떨어졌다.
작은 빗방울이 점점 소나기로 변하자.
천둥 번개와 함께 폭풍이 몰아쳤다.
수없이 쏟아져 내리는 검은 빗방울이 안개에 닿았다.
[어찌!?]
이준을 비웃던 무극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이 생각하던 결과와 다르기 때문.
검은 빗방울에 의해 운의 결계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닌가.
패천삼공이라도 결계를 부수는 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 무극자였다.
이곳은 청룡이 머무는 장소.
그가 느끼기에 청룡은 원래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모양.
온전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사신수보다 훨씬 강했다.
진정한 사신수의 힘을 가진 청룡.
패천삼공이 아닌, 패천사공이라면 운의 결계를 무너트릴 수 있으나.
패천삼공은 무리라 여겼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예상과는 달리 이준이 운의 결계를 무너트린 것.
절벽 아래 끝에서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싶었다.
가장 어이없는 건 이준을 놀렸던 무극자였다.
[어, 어떻게 했더냐?]
무극자가 말까지 더듬으며 이준에게 물었다.
이준은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으며 승자의 미소를 보였다.
“제가 허억… 결계 깨고 만 허억… 다고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