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9화
이준이 발밑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게이트 전체가 흔들렸다.
거대한 지진.
세상이 무너질 듯했다.
동시에 수많은 메시지가 올라왔다.
[청룡이 당신에게 귀속을 청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Y/N)]
[청룡이 당신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천상의 동쪽’ 게이트를 얻었습니다.]
[‘풍뢰 지대’에 속한 몬스터들이 귀속해 옵니다.]
[블랙급 몬스터 하이엘프가 귀속되었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7,000,000p가 지급됩니다.]
[블랙급 몬스터 썬더라이가 귀속되었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6,500,000p가 지급됩니다.]
[블랙급 몬스터 드라고니가 귀속되었습니다.]
……
……
……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50,000,000p가 지급됩니다.]
현무가 귀속해 왔을 때처럼 많은 알림이 울렸다.
“확실히 보상이 줄었어.”
이전이었다면 1억 포인트는 가뿐히 얻었을 터.
사신수를 얻고 얻은 포인트가 1억 포인트가 간신히 넘을까 말까 했다.
이제는 정말 테크트리 포인트를 신중하게 써야 할 때였다.
게이트의 진동이 멈추자 세상이 바뀌었다.
새롭게 지어지고 있는 4대 성지의 금역의 한 부분.
동쪽 영역에 풍뢰 지대가 자리한 것이다.
[현무와 주작이 이곳에 모여 있다니.]
“거짓말 아니라니까.”
[백호만 모이면 사신수가 다 모이겠군…. 이게 얼마 만인지.]
사신수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 천년이 훌쩍 넘었다.
사신수끼리는 멀리 있어도 소통이 가능했다.
물론 상대방이 소통을 거부한다면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겠지만.
거부만 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청룡. 너도 협박을 당한 것이냐?]
현무의 목소리였다.
청룡의 앞에는 이준뿐이었는데 현무의 목소리가 풍뢰 지대에 들린 것이다.
[협박?]
[…아닌가?]
[인간에게 협박당한 건가? 천하의 현무가?]
[무슨 소리! 인간에게 협박당하지 않았다.]
[그럼?]
[다쳐서 잠시 이곳에 의탁한 것이다.]
[아닌 것 같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청룡이 정곡을 찌르자 현무가 버럭 소리쳤다.
[네놈은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냐.]
이번에는 청룡이 침묵했다.
사신수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게 청룡의 생각.
차라리 입을 다물지언정 거짓은 불가했다.
현무가 재차 물어보려는데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거절하더니 두 번째엔 흔쾌히 수락하던데?”
[저 말이 사실이냐?]
[…….]
청룡은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흔쾌히 수락한 적은 없었다.
이준이 파천혈신, 신선제에게 미친 듯이 맞는 모습을 봤을 뿐.
그걸 봤는데 어찌 이준의 제안을 거절할까.
곁에 파천혈신만 없었다면 무시했을 터.
평온한 모습으로 보고 있으니 제안을 수락한 거다.
파천혈신이 화났을 때보다 제자의 교육을 마친 평온한 모습이 더 무서웠으니까.
[나와 같은 상황일 줄 알았는데….]
현무가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후에는 현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현무의 음성이 사라지자 청룡이 이준에게 물었다.
[현무는 네게 협박당해서 이곳에 있는 건가?]
“아니.”
[조금 전 현무 제 입으로 분명 협박당했다고….]
“내가 아니고 사부님.”
[음….]
“내 제안을 안 받았으면 너도 사부님한테 협박당했을 수도 있었어. 정말 잘 선택한 거야.”
[그렇게 된 거군.]
“참고로 흑염마조가 현무를 매일 갈구고 있거든. 심심하면 북쪽으로 구경 가 봐. 어? 저기 불꽃 보이네?”
이준은 북쪽 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하늘에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현무의 기운도 느껴지는 걸 보니.
흑염마조가 현무를 갈구다가 현무가 폭발한 듯했다.
“너도 잘못 선택했으면 현무처럼 될 수 있었다는 것만 알아 둬. 그럼 난 이만 간다.”
이준이 경공을 펼쳐 풍뢰 지대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청룡.
청룡은 북쪽 하늘에 솟은 성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다행이군. 주작은 뒤끝이 상당히 길어서 당하면 수명이 줄었을지 몰라.]
청룡은 십년감수했다 여겼다.
* * *
검제를 비롯한 가주들이 모두 모였다.
특별 거점 점령전 회의.
신기학사 한지웅이 전략을 브리핑했다.
“특별 거점 점령전의 맵은 설산입니다. 저희의 거점은 설산 꼭대기로 할까 합니다.”
“설산 꼭대기? 안 좋은 선택 아니야? 파천자께서는 공중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
류한길이 반박하고 나섰다.
이준의 경공은 각성자들이 펼치는 그저 그런 경공이 아니었다.
마치 몸이 부유하듯.
허공에 붕 떠서 이동했다.
이런 자를 상대로 산꼭대기에 거점을 지정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파천자 님을 상대로 어떤 거점을 정하든 불리합니다. 산사태라도 일으켜서 시간을 벌 수 있는 곳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버는 게 가능하다면 산꼭대기도 나쁘지 않네.”
박춘식이 한지웅의 말에 동의했다.
이준을 상대로 무엇을 시도해도 분리했다.
애초에 실력 차이가 났으니까.
차라리 싸움 경험이라도 적으면 모를까 이준은 경험이 풍부했다.
무식하게 힘으로 공격해 오는 듯 보이나.
그 속에는 상대를 어떻게 망가트릴지 모든 게 계획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이준의 무서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움이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총련주. 설산 꼭대기로 하시지요. 신기학사의 말이 옳습니다.”
뇌마 홍엽상이 류한길을 설득했다.
다른 가주들도 모두 한지웅의 말에 동의하는 상황이었다.
“다음 계획은?”
류한길도 설산 꼭대기에 거점을 세우는 데 찬성했다.
“괴개 님과 살마가 음설독과 폭우이화정, 굉폭뢰를 곳곳에 설치할 겁니다. 1차 지점은 평평한 설원, 2차 지점은 설산 입구, 3차 지점은 거점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음설독은 믿어 볼 만하겠어.”
류한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장 믿는 게 바로 이 음설독이었다.
음설독을 눈에 뿌리면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액체가 닿으면 눈이 녹든가 그대로 얼음이 되어야 정상.
하나 음설독은 눈과 동화되었다.
오히려 눈과 하나가 되어 더욱 소복이 쌓인 눈처럼 보였다.
겨울에 탁월한 암살 효과를 보이는 게 바로 이 음설독이었다.
눈인지 독인지 전혀 알지 못하니.
그냥 밟고 지나갔다가 자기가 독에 당한지도 모르고 죽는 게 이 독이었으니까.
또한 음설독에는 내공을 흩어지게 하는 산공독 효과가 있었다.
상대가 죽지 않아도 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될 터.
그때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반대로 음설독에 당하면?”
“저희는 해독약을 먹을 겁니다.”
“해독약이 있어?”
류한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설독은 해독제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괴개인 정심호도 만들다 실패했다고 했다.
“내가 못 만드는 해약은 없다.”
그때 정심호의 자신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이 만들었소?”
“낄낄. 당연하지 않느냐. 해독약만 먹으면 음설독 위에서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맨날 실패했다고 화를 내더니 용케도 만들었소.”
“재료가 빈약해 화를 낸 거다.”
“장인은 재료를 탓하지 않는다 들었소만.”
“독 좀 먹어 볼테냐?”
“사양하겠소. 무튼 제한 시간은 얼마나 되오?”
“한 알에 두 시간. 총 다섯 개까지 복용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폭우이화정이나 굉폭뢰에도 갖은 독을 바를 터.
제아무리 이준이라도 제한된 내공으로 자신을 상대하게 될 테니.
독은 그의 행동반경을 좁힐 것이다.
“곳곳에 환영진과 미로진도 설치할 생각입니다. 조를 나눠 차륜전으로 파천자 님의 체력을 뺄 작정입니다.”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지만 나쁘지 않아.”
“저희가 믿을 건 파천자 님에 가해진 내공 제약입니다. 이를 최대한 활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다음은 뇌마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한지웅의 브리핑이 끝났다.
다음은 홍엽상의 차례였다.
얍삽하게 상대를 짜증 나게 하는 게 홍엽상의 특기.
그는 어떤 식으로 이준을 상대해야 하는지.
가주들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걸.
이준은 내공 제약이 걸린 상태로 싸우지만 이를 아예 무마시켜 버리는 사기적인 패시브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 * *
가주들이 특별 거점 점령전을 준비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준은 그동안 백호를 찾았다.
제일 쉽게 찾을 줄 알았던 백호가 보이지 않았다.
4대 성지의 금역으로 돌아온 그는 사신수를 불렀다.
“너희들 백호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모른다.]
[알아도 가르쳐 줄 수 없다.]
[백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군.]
“친구가 소식이 없는데 너희는 걱정도 안 되냐?”
[우린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갈 뿐 서로 간섭하지 않아.]
청룡의 말에 현무가 맞장구쳤다.
[이번엔 나와 의견이 일치하군.]
“정 없는 녀석들. 백호가 위험에 빠졌으면 어떡해.”
[그놈이 약해서지, 우리 탓이 아니다.]
황금이일 때는 정말 착했는데 현무가 되더니 얼음덩이 그 자체였다.
말 하나하나가 정이 떨어지는 녀석.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조야 너라도 좀 찾아봐.”
[위험에 처하면 알아서 기어 올 거다.]
흑염마조조차 백호를 걱정하지 않았다.
“백호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내가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래.”
[작은 주인…. 그렇게 매정한 인간이었나?]
흑염마조의 말에 뒷골이 땡겼다.
사신수가 모여 있으니 마조도 정신이 이상해졌나 보다.
“말을 말자.”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게이트를 열었다.
오늘은 특별 거점 점령전이 있는 날.
백호의 소식이 없으니 우선 할 일을 끝내 놓고 찾을 생각이었다.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알려 줘. 마조야 너만 믿는다.”
[알았다. 작은 주인.]
이준이 게이트를 나갔다.
흑염마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현무와 청룡을 보았다.
[작은 주인의 말 들었냐? 나만 믿는단다.]
[그래서?]
[내가 너희보다 서열이 위라는 말이지.]
[무슨 소리!]
[이곳에 서열이 존재하던가?]
[서열은 어느 곳이나 존재한다. 주인이 가장 신뢰하는 동료가 서열이 가장 높지.]
흑염마조가 씩 웃었다.
이에 현무와 청룡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게 너냐?]
[믿기지 않는 일투성이군.]
[이곳에서 편하게 생활하고 싶으면 앞으로 내게 잘 보여라.]
흑염마조는 기분이 좋은지 성화를 태웠다.
공기가 뜨거워지자 현무가 버럭 소리쳤다.
[이 불닭이 내 영역까지 태우려는 것이냐!]
[뭐 불닭!? 이 얼음 거북이 새끼가!]
흑염마조와 현무가 다시 한판 붙었다.
청룡은 옆에서 방관만 하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불과 얼음이 그의 몸에 적중했기 때문.
이에 격분한 청룡도 두 신수의 싸움에 참전했다.
“아이고 세상이 무너진다!”
“아, 안 돼!”
“주인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땅이 파괴되고 있어!”
테구르가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면서 난리를 피웠다.
샥쿠와 로티틸도 안타깝다는 표정을 한 채 몸을 사려야만 했다.
사신수의 싸움.
몸을 숨기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 * *
한편.
게이트 밖에 나와 있는 이준은 찜찜함을 느껴야 했다.
“이 싸한 느낌은 뭐지?”
중요한 걸 잃는 것만 같았다.
직감 하나는 최고.
현재 게이트가 엉망이 되고 있는지라 그의 몸에 소름이 돋은 것이다.
“특별 거점 점령전을 빨리 끝내고 백호를 찾아봐야겠다. 불안해 죽겠네.”
그런데 이준의 촉은 다른 곳을 향했다.
게이트가 아닌 백호.
과연 그의 촉은 이번에도 맞을까.
“뭐냐. 전교생이 다 모인 거야?”
아니 학부모까지 죄다 온 것 같았다.
거대한 실내 체육관을 가득 메운 인파들.
곳곳에는 자신에게 강의 체험을 받았던 학부모들이 보였다.
“파천자 님, 이번에도 한 수 배우겠습니다.”
노말 페니모어 가주가 이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낌새가 이상한 놈들을 찾았습니다.”
“마인인가요?”
“네. 흑마력을 사용하는 이단 집단인데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잘하셨어요. 나머진 제가 판단할게요.”
“별말씀을.”
이준과 페니모어 가주가 친하게 이야기하자.
진병철은 위험을 느꼈다.
페니모어 가주가 저리 저자세로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자칫하면 자신의 자리가 뺏긴다는 생각을 했다.
‘파천자 님의 신도 중 내가 서열 1위다.’
사신수도 서열을 나누듯.
진병철도 추종자의 서열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