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2화
이준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어떠한 분노와 흥분도 없었다.
이휘는 이준을 유심히 관찰했다.
‘저게 SS급 각성자라고?’
그는 이준에게서 그 어떤 힘도 느끼지 못했다.
현재 이준의 모습은 내공을 지니지 않은 평범한 사람 같았다.
‘기를 일부러 감춘 건가?’
이휘는 판별 마법을 사용해 이준의 몸을 훑었다.
판별 마법은 상대의 기, 속성, 은신 등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상대가 기를 감춘다 해도 어느 등급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 평범해….’
이준에게 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문을 잠시 비운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이휘가 의아하며 랭킹 창을 열었다.
[??? - 1위]
[??? - 2위]
[파천자 이준 – 3위]
이준은 여전히 (진)세계 랭킹 3위에 있었다.
‘각성자는 확실한데… 어떻게 된 일이야.’
이휘가 조심스럽게 이준을 살피고 있는데 이신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이준!”
그러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는 이신이었다.
이준이 강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동생인 이휘도 있고, 이준이 소중히 여기는 가솔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있었으니까.
“내가 묻잖아. 뭐 하고 있냐고.”
이준의 목소리에 이신은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했다.
“보면 모르냐. 가문의 기강을 잡고 있다.”
“네가 무슨 권리로?”
“이 가문의 후계자는 나니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때 확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헛숨을 들이켜야 했다.
“헙!”
“으음….”
“……!”
지독한 살기였다.
하나 이신은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
이준의 살기에 반응한 건 오로지 천무를 익힌 가솔들뿐.
이신과 이휘, 차보영은 평온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 발 치워.”
이준의 말에도 이신은 비열하게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왜 버러지 같은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이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봉팔의 단전을 눌렀다.
김봉팔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신음을 토했다.
“끄윽!”
“이놈의 단전이 박살 나는 게 보고 싶으면 계속 날 자극해 봐, 버러지 새끼야.”
“주…군 으윽….”
김봉팔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까딱하다간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
“네 몸에 있는 마나를 믿는 거냐. 아니면 이휘를 믿는 거냐?”
“둘 다라고 할 수 있지. 이 마나라면 네놈과 대등해질 수 있어!”
“그 전에 나한테 죽으면 그것도 다 의미 없다.”
“큭큭. 파천자가 패륜을 저지르게 하는 것도 괜찮군. 날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든지.”
“아주 막 나가는구나.”
이준은 곧바로 행동하지 않았다.
오직 말뿐이었다.
그의 모습에 이신이 득의양양했다.
이준이 움직이지 못하는 건 자신의 발밑에 있는 녀석 때문.
역시나 가솔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대단했다.
‘이 녀석을 통해 이득을 많이 보겠는데?’
이신은 이준을 상대로 자신감이 올라갔다.
“어쩔 테냐 크큭.”
“끄어어억!”
이신은 김봉팔의 단전을 바로 깨 버리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아주 깊은 고통을 주었다.
그는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그 모습을 즐겼다.
“괴롭히지 말고 단전을 부숴.”
“싫은데? 난 이 녀석을 천천히 가지고 놀 거야.”
“아, 잊고 있었어. 네 병신 같은 짓거리를 보고 있자면 화가 솟구친다는 사실을 말이야.”
이준도 더는 참지 않았다.
회안이 번들거리는 순간!
쾅!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건물이 박살 나는 소리에 이신이 고개를 돌렸다.
“어, 어머니?”
거처에서 요양하고 있던 최미진의 신형이 건물을 부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목적지는 이준이었다.
이휘가 움직이려 했지만 목이 서늘해 움직일 수 없었다.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목이 날아갈 것 같아 꼼짝할 수 없었다.
그 사이 최미진은 이준의 지척에 도달했다.
극에 달하는 허공섭물이었다.
“너희가 먼저 시작한 일이야.”
최미진은 이준의 앞에서 멈춰섰다.
이준은 그녀를 향해 손을 활짝 폈다.
“흡자결.”
그는 최미진의 내공이 아닌, 생기를 빨아들였다.
50대 후반이었던 그녀의 피부가 점점 쪼그라 들었다.
생기는 목숨과 직결되는 기운.
내공이 없다고 해도 살 수는 있으나.
생기가 없으면 죽는다.
“어머니를 놓지 못해!?”
“비겁한 새끼! 어머니한테 뭐하는 짓이야 당장 멈춰!”
“내가 왜?”
이준의 두 눈과 목소리에는 감정이 죽어 있었다.
공허 그 자체였다.
“이 개새끼가!”
화가 난 이신이 김봉팔의 단전을 부수려 했다.
“끝까지 병신 짓만 골라서 하고 있어.”
이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신의 몸을 속박했다.
“옛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해 줄게. 똑똑히 지켜봐. 네가 믿고 있는 이휘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말이야.”
이준이 몸을 돌렸다.
“네가 이 모든 걸 꾸몄겠지? 이신의 몸에 서클을 만들어 준 것도 너일 테고”
“…….”
“네가 있으니까 저 멍청한 놈이 이런 짓거리를 벌였을 거야.”
뚜벅뚜벅.
또다시 이준의 걸음 소리만 들렸다.
‘고작 걷는 것뿐인데….’
이휘는 이준의 걸음걸이에 위협을 느꼈다.
“도련님….”
그가 차보영과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수백의 그림자가 하늘에 나타났다.
이휘를 따라온 마법 학회의 마법사들.
검은 로브를 쓴 마법사들이 지팡이로 허공을 두드렸다.
탕탕 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준을 둘러싼 수백의 마법 인장.
아직 마법이 발출되기 전인데도 가공할 마력이 느껴졌다.
“어머니가 죽는 게 먼저일까. 네가 죽는 게 먼저일까? 어머니를 풀어주면 나도 한 발짝 물러날게.”
“협상할 생각 없으니까 닥치고 마법이나 써.”
이준은 이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 좋아. 누가 이기나 보자. 저 새끼의 시체를 남긴없이 날려버려.”
이휘는 프랑스 마법 학회 마법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최미진의 생기가 이준에게 빨려 들어가는 상황.
그럼에도 이휘는 망설임 없이 명령을 내렸다.
이에 당황한 건 이신이었다.
“휘야! 뭐 하는 거야!”
“어머니를 구할 방법은 이것뿐이야. 이준에게 계속 휘둘릴 수는 없어.”
“하지만 어머니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성수가 내게 있어. 이준만 처리하고 어머니께 성수를 먹이면 돼.”
성수.
서양의 각성자만이 가지고 있는 보물급 아티팩트였다.
죽은 자도 소생시킬 수 있다는 명약.
숨만 끊어지지 않으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성수였다.
이휘가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엄마인 최미진을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준만 처리한다면 모든 걸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어.’
그래서 작은 희생은 감수하기로 했다.
마법사들이 사용한 마법 인장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각양각색의 빛들.
사대 원소의 마법이 이준만이 아니고 가솔들을 향해서도 쏘아졌다.
* * *
정적.
강대한 마력이 발출됐다.
주변이 초토화되고도 남을 위력.
곳곳에서 비명과 죽은 사람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마법은 도중에 캔슬됐다.
그로 인해 가솔들은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이휘와 차보영의 눈이 커졌다.
그의 계획은 이준이 가솔들을 구하려고 호신강기를 두르는 찰나를 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격도 하기 전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준의 손짓 한 번에 사대 원소의 마법이 전부 무력화가 됐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프랑스 마법 학회에서 데려온 이들은 전부 S급 마법사들.
그것도 그 숫자만 족히 이백 명이었다.
성마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전투 병기들.
그들은 성마회의 모든 전력이라 해도 과언 아니었다.
그런 이들의 공격이 막혔다.
“성마회의 정예라면 랭킹 3위에 있는 이준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계 랭킹에는 등록되지 않은 괴물들이 꽤 있었다.
그중 자신이 모시는 스승도 포함됐다.
(진)세계 랭킹이라 나와 있지만 아직은 (가)랭킹.
모든 각성자가 등록되지 않은 상태였다.
현재의 순위는 불완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준이 랭킹 3위에 있다 하더라도 무섭지 않았다.
성마회의 정예 마법사라면 이준을 처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니까.
이휘는 이준이 마법을 무력화 시킨 걸 인정할 수 없었다.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던 거야. 뭣들 해! 전력으로 다시 공격을….”
그가 마법사들에게 버럭 소리쳤으나.
털썩!
공중에 떠 있던 마법사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몸이 잘리고, 온 모공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폭죽처럼 몸이 터지는 마법사가 있는 반면, 눈을 크게 뜬 채 자기가 죽었는지 모르는 마법사도 있었다.
“헉!”
이휘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준은 제 자리에 있었다.
그 어떤 공격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기세 또한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토록 많은 마법사을 동시에 죽였을까.
이해할 수 없는 장면에 꿀먹은 벙어리가 됐는데 이준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준비한 걸 꺼내 봐.”
이휘는 이준의 시꺼먼 눈동자을 마주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존재하는 악마의 눈동자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떨림.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이걸로 놀라면 어떡하지? 난 시작도 안 했는데 말이야. 내걸 건드렸으면 댓가는 받아야지.”
이휘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내가 당할 것 같아?”
그의 옷이 펄럭였다.
몸에서 마력이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SS급 각성자의 기세에 마정석으로 만든 사신가의 단단한 건물이 휘청였다.
“죽어어어!”
이휘가 마력을 폭발시켰다.
쾅!
마법진과 함께 솟아오른 불기둥.
다섯 개의 중첩된 불기둥이 이준을 덮쳤다.
“하, 하하.”
8서클의 헬파이어.
다섯 개의 중첩된 헬파이어에 이준이 너무도 쉽게 휩싸였다.
이준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무방비 상태인 이상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멍청한 새… 헉!”
멍청한 이준을 욕하려던 이휘가 화들짝 놀랐다.
이준이 헬파이어를 가볍게 뚫으며 걸어 나왔다.
상처 하나 없는 몸.
그렇다고 옷이라도 탔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완전히 멀쩡했다.
“어디까지 날 무시하는 거지?”
이준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중지에 무극기가 맺히더니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졌다.
퍽!
“큭.”
이휘가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 사이로 피가 흘렀다.
이준이 사용한 무공은 탄지공.
기를 콩만 한 크기로 모아 쏘아 보내는 무공이었다.
극쾌의 지법에 속해 막는 것도 까다로웠다.
퍼벅퍽퍽-
“커어억!”
이준의 탄지공에 이휘가 베리어를 쳤다.
하지만 무용지물.
탄지공은 이휘의 방어막을 가볍게 뚫어 버렸다.
“재미 없어. 겨우 이딴 실력 가지고 내 것을 망가트렸다는 게 화가 나.”
쿵.
이준이 발을 굴렀다.
대지가 들썩였다.
기파가 주변으로 퍼지자 모든 생명체가 아우성쳤다.
“끄아아악!”
기파는 오로지 이휘게만 충격을 가했다.
그가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자.
“도, 도련님!”
차보영이 이휘를 다급히 부르며 다가가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뒤에서 그녀를 당기는 힘이 있었다.
“끄으윽!”
차보영이 이준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너는 차 선생의 동생이라지?”
“끄으….”
“언니를 잘 둔 덕에 산 줄 알아.”
이준의 활짝 펴진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 앞에서 멈췄다.
손바닥에선 거대한 기가 휘몰아쳤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 있던 많은 마력이 풍선 빠지듯 사라져 갔다.
이준이 차보영의 마나 서클을 망가트린 것.
이후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준의 다음 목표는 이휘였다.
그가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이휘를 향해 걸어가는데.
“내… 아들은 건드리… 지마….”
생기를 잃어 가는 최미진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했던 말을 반복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당신들이 내 것을 먼저 건드리지 않았나?”
“그… 그럼 네가 벌인… 이 미친 짓거… 리는 용서해 줄….”
“큭큭.”
이준의 눈이 회안으로 번뜩였다.
“악! 내, 내 다리!”
아무것도 못 한 채 가만히 서 있던 이신이 엎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의 다리가 잘려 나갔다.
“용서는….”
그의 기분에 따라 변하는 공기.
중천에 떴던 해는 칙칙한 검은 연기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밤이라도 된 듯 어두워지며 검은 연기가 세 모자를 감쌌다.
“당신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