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3화
“우선 이야기는 이곳을 정리하고 하시죠.”
이준과 미야와키 요코가 대화하는 사이 몬스터가 몰려들었다.
“보스 몬스터를 죽인 것 같은데 도망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도망은 적성에 안 맞아서.”
그가 주변을 쓱 둘러봤다.
블랙 오크의 숫자가 족히 100마리는 넘어 보였다.
일반 몬스터 등급은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 등급으로는 레드급.
S급 각성자라도 홀로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존재였다.
하나 상대는 이준이었다.
백호를 정화하면서 얻은 힘.
전 속성의 숙련도는 MAX.
작게 열렸던 상단전도 활짝 열린 상태였다.
뿐인가.
혼원신공이 무려 11성에 도달했다.
아니, 사신전의 마지막 관문을 도전해야지만 완전한 11성이 되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의 경지는 S급을 넘은 지 오래.
SS급 끝자락인 현경의 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블랙 오크들이 전부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면 그에게 상처도 주지 못한다.
“여러 마리를 죽이기에는 이만한 게 없지.”
이준이 발을 무릎까지 올렸다.
기류가 회전하면서 발에 모였다.
불길한 검은 아지랑이가 요동치면서 강대한 힘을 발하자.
“죽어.”
콰앙!
이준이 땅을 향해 진각을 펼쳤다.
발이 부딪힌 땅이 주저앉았다.
대지가 갈라지면서 아지랑이가 블랙 오크를 향해 뻗어 나갔다.
“꾸엑!”
“켁!”
곳곳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렸다.
[카오스 몬스터 데란을 해치우셨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5,000,000p를 획득하셨습니다.]
……
……
[카오스 몬스터 데란을 해치우셨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5,000,000p를 획득하셨습니다.]
무극군림보 중 삼보, 파였다.
100마리의 블랙 오크가 동시에 몸이 터져 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옆에 있던 미야와키 요코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 세상에!”
이준의 무공을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데, 데란을 한꺼번에…!”
전율스러운 힘이었다.
블랙 오크는 일본 랭킹 1위인 마츠모토 아카기조차 상대하기 버거워하는 몬스터였다.
그런데 그런 놈들을 고작 발 구르기 한 번에 싹 다 처리했다.
이게 사람의 힘인지 의심스러울 지경.
미야와키 요코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파랑아 네 차례야.”
“뀨웃!”
파랑이가 이준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어깨에 앉은 녀석이 입을 활짝 벌렸다.
파랑이의 눈이 파란빛으로 반짝이자.
[파랑이가 패시브 스킬인 혼돈의 마기(SS)를 사용했습니다.]
[파랑이가 혼돈의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
……
……
[파랑이가 혼돈의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블랙 오크의 기운을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청호! 당신은 창제군요!”
미야와키 요코는 파랑이를 보고 이준의 정체를 알아챘다.
청호는 창제가 데리고 다니는 몬스터였으니까.
그 청호가 특별한 몬스터라는 것까지 알려진 상태였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지원 나온 이준이라 합니다.”
이준이 웃으면서 답했다.
조금 전까지 블랙 오크를 일거에 쓸어버린 사람치고는 해맑은 미소였다.
“절 도와준 사람이 창제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저도 칸나의 엄마를 여기서 만날지 몰랐네요.”
“제 딸은 어떻게 아세요? 딸 아이는 한국에 여행을 갔다 온 적도 없는데.”
“아, 그게….”
미야와키 칸나는 엄마인 요코가 죽고 후에 이름을 알린 각성자였다.
지금은 무명.
한국의 유명인이 존재감도 미미한 미야와키 칸나를 아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제 사부님이 미야와키 가문에 대해서 말해 주셨어요. 그쪽에 칸나란 예쁜 숙녀가 있다고 해서 저도 모르게 친한 척했네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이준은 얼렁뚱땅 대답했다.
변명할 때면 매번 생각나는 무극자 사부였다.
사부를 들먹이면 언제든 잘 넘어갔다.
지금처럼 말이다.
“창제 님의 사부님이 저희 가문에 들리셨나요?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이름을 알리기 꺼리시는 분이에요. 그저 옛날에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고 하셨어요.”
“하긴, 저희 집안에 들렀다 간 귀인들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기 쉽지 않군요. 실례했습니다.”
정말 잘 넘겼다.
자신이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는지 몰랐다.
아니지, 임기응변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상한 의심을 안 받아 다행이었다.
“괜찮아요.”
“절 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저야 감사하죠. 그러는 김에 며칠 신세 좀 질 수 있을까요? 제가 아직 숙소를 못 잡아서….”
“영광입니다. 절 따라오세요.”
* * *
오사카 시에 있는 하나의 큰 절이 바로 미야와키 가문의 집이었다.
고풍스러운 전각에 석재로 이어진 다리와 석상이 가득했다.
하지만 곳곳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치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느낌이랄까.
이 커다란 곳이 관리가 안 되어 있었다.
큰 연못을 지나자 처소가 나왔다.
“이곳이 저희가 기거하는 곳이에요. 칸나, 엄마 왔어. 잠깐 나와 봐.”
미야와키 요코의 부름에 집 안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을 열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어머니 오셨어요?”
보통 모녀지간이면 살갑지 않나?
양갓집 규수처럼 칸나는 굉장히 조신한 모습을 보였다.
반대로 복장은 집안일을 하고 있었는지.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손님 오셨어. 인사드리렴.”
“안녕하세요. 미야와키 칸나라 합니다.”
“한국에서 온 이준이에요.”
“준 사마!?”
고개를 올려 이준의 얼굴을 똑바로 본 칸나.
그녀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 있었다.
“네. 제가 이준입니다.”
“…….”
잠시 흐르는 정적.
뒤늦게 자신의 복장을 떠올린 칸나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칸나!”
미야와키 요코가 그녀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준은 그녀가 왜 저러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당탕!
집 안에선 또 한 번 아까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애가 아직 철이 없어서….”
민망한지 미야와키 요코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불쑥 찾아와서 그런가 보네요. 그런데 가문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다 내보냈어요.”
이준은 요코의 안내를 받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시국에요?”
“형편이 안 돼 각자의 길을 가게 했어요.”
“미야와키 가문은 오사카에서 꽤 큰 가문이라 알고 있었는데요.”
“사사키 가문과의 알력 다툼에서 밀려났거든요.”
미야와키 가문과 사사키 가문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
미야와키가 고결한 느낌이라면 사사키는 자유분방이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서 그런지.
사사키가 유독 미야와키를 싫어했다.
“그렇군요.”
“지금은 이곳에 저와 딸만 살고 있어요. 드셔 보세요.”
요코의 권유에 이준이 차를 마셨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귀기와 독기가 주변에 가득하네요.”
“사사키 가문의 짓이에요. 저것 때문에 가솔들이 수시로 죽어 나갔거든요.”
“여전히 악독한 심보를 가졌어.”
탁-
이준의 찻잔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찻잔과 차받침이 부딪히면서 공명음을 냈다.
그 공명음이 주변으로 퍼지면서 귀기와 독기에 닿은 순간!
이준의 눈으로 여러 장면이 들어왔다.
[모투술(S)이 발동했습니다.]
[상단전의 힘이 모투술(S)을 제어합니다.]
[지나갔던 과거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모투술을 의도한 게 아닌데?’
사사키 가문의 살수가 미야와키 가문의 가솔을 죽이는 장면.
미야와키를 섬기는 가솔들이 하소연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강시가 되어 찾아온 가솔의 장면을 보게 됐다.
‘앞의 장면은 그냥 가문끼리의 충돌이야. 그런데 가솔이 강시가 돼서 미야와키 가에 온 거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각성자 중에도 사령술을 쓰는 이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그 숫자가 손에 꼽혔다.
서양의 네크로맨서가 아니고서야 이지를 가진 강시를 만들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천외천이 미야와키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었네.’
미야와키 가문도 결국 멸문하지만 이는 나중의 일.
자신으로 인해 천외천의 마수가 빨리 다가왔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또 미래를 바꾸면 그만.
미야와키 칸나의 엄마인 요코도 구했으니, 가문까지 도와준다면 요령요화가 고마워할 거다.
그렇게 되면 칸나가 자신에게 넘어오는 건 쉽지 않을까?
어차피 사사키 가문은 천외천의 끄나풀.
지구상에서 지워야 할 이들이었다.
‘그 전에 물어봐야 할 것도 있지.’
이준은 칸나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애가 조신하지 못하죠?”
“칸나의 몸은 괜찮아요?”
“예!?”
요코의 눈이 떨렸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그녀였다.
“칸나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사기 말이에요.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알고… 계셨나요?”
“거대한 기운을 못 느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사기가 워낙 커서 봉인해 두었어요.”
“미야와키 가문의 음공으로도 제어가 안 되나요?”
“시도는 해 보는데 봉인을 풀 때마다 칸나가 힘들어했어요.”
“흠….”
미야와키 가문의 힘은 칸나의 몸속에 든 사기에 있었다.
요화.
요사스러운 힘을 지닌 꽃.
그 꽃이 피면 요령의 진짜 힘이 발현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될 테지만 그것은 힘을 개방할 때의 이야기였다.
전생의 칸나도 싸울 때만 광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자신이 도와준다면 어렵지 않게 봉인된 힘을 다룰 수 있을 거다.
“요령의 힘을 얻는 걸 도와드릴까요?”
“창제께서요?”
“네. 제가 저 힘을 끄집어낼 수 있어요.”
“칸나가 이성을 잃으면 큰일인데….”
“언젠가는 꺼낼 힘이라면 제가 있을 때 안전하게 얻는 게 좋을 겁니다.”
이준의 말에 요코가 고민에 빠졌다.
요령의 힘은 그녀도 제어하지 못한다.
너무도 강한 힘이라 자칫 칸나가 광녀로 변할지도 모르니.
부모 된 입장에선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던 그때.
칸나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녀의 손엔 이준과 닮은 인형이 들려 있었다.
“제 요령을 깨워 주신다고요?”
큰 눈으로 이준을 본 칸나.
그녀의 손에 든 굿즈가 흔들리고 있었다.
* * *
월광이 뜬 밤.
칸나는 달빛이 제일 잘 깃드는 연못 위에 있었다.
연못 옆에는 요코가 두 손을 꼭 쥔 채 간절한 표정을 했다.
“음기가 가장 강할 때 요령의 힘이 날뛴다면서요?”
“준 사마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칸나는 이준에게서 등을 돌리며 말했다.
원래는 서로를 봐야 하지만, 그녀가 부끄럽다면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이준의 팬이었다.
팬 카페인 원스피릿에 가입도 했다.
심지어 한국에서 암암리에 거래된 굿즈까지 구매할 정도로 광신도.
그녀는 자신의 뒤에 이준이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쩌다가 들었어요.”
“지금이 제일 위험해요. 어쩌면 제가 준 사마를 해칠지 몰라요. 힝.”
요령의 힘은 빙의에서 나온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끌어와서 빙의하거나 요괴를 설득해서 빙의하거나.
요령은 빙의한 혼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녀의 몸속에 봉인된 요화는 바로 미야와키 가문이 계승한 요령심법의 창시자.
은서단이었다.
은서단은 사파의 거두.
선녀루의 루주였다.
남자들이 판치는 무림에 여인으로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여장부이기도 했다.
어떻게 요령심법의 창시자가 칸나의 몸속에 봉인됐는지는 모르나.
전생에 칸나는 은서단과 몸을 같이 사용했다.
평소에는 칸나로, 싸울 때는 요화 은서단으로.
사파의 거두답게 강시를 파괴하는 것도 아주 잘 알았다.
아니지.
그녀의 음공 자체가 강시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음공은 파동의 무공.
소리에 민감한 언데드와 강시에겐 천적과도 같았다.
“제 걱정은 마시고, 요화를 끌어낼 테니 정신 단단히 붙잡으세요.”
“네!”
칸나의 손엔 여전히 이준의 굿즈가 들려 있었다.
그녀에게 굿즈는 부적.
굿즈가 자신을 지켜 줄 거라 철석같이 믿었다.
칸나의 손에 있는 굿즈를 본 이준이 피식 웃고는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
화아악-
혼원신공을 운용하자 두 사람의 주위로 기의 파동이 일었다.
“흡!”
그녀의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듯 동그래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굿즈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