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인주가 하얀 도복을 입은 남자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앞으로 나왔다.
“우리 쪽에선 내가 나가겠소.”
한국 측에선 검제가 나섰다.
“너부터 할 테냐? 그러면 난 두 번째 순서겠구나. 지지 말아라.”
“지면 평생을 네놈에게 시달릴 텐데 그럴 수 없지.”
“시달리기만 할 것 같으냐? 평생 놀림감이다. 각오하는 게 좋아.”
“흥. 그럴 일은 없다.”
스르릉-
검제가 검을 빼 들었다.
청명할 정도로 깨끗한 검명음이 들려왔다.
검제의 검도 싸울 준비가 된 모양이다.
이준은 뒤로 빠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몬스터는….”
“우리가 다 처리해 놨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인주가 입매를 비틀면서 말했다.
“중국 일 처리 거지같이 하는데 당신은 일 처리가 빠르시네.”
“오랑캐 따위가 입 놀음을 꽤 하구나.”
“입이 풀릴리면 멀었는데 이걸로 발끈하시면 어떡해요. 당신 사부가 싸우기 전에는 흥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사부란 단어가 나오자 인주의 이마에 내 천 자가 새겨졌다.
인주에게 있어 사부는 트라우마였다.
천외천에서 금지 단어가 될 정도.
그런데 이준이 대놓고 사부란 단어를 언급하자 기분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그 주둥이를 찢어버리기 전에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저도 여기서 그만하려고 했어요. 사부란 단어에 과민 반응 하시네.”
이준이 씩 웃으며 몸을 뒤로 뺐다.
대장전을 위해 자리를 비켜줬다.
인주는 하얀 도복을 입은 남자에게 명했다.
“육선.”
“예. 인주.”
“가지고 놀다가 죽여라.”
“알겠습니다.”
“최대한 잔인하게.”
그리고 이준을 노려보곤 수하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육선 또한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네가 남궁의 검을 익혔다지?”
“그렇소. 당신의 검은 무엇이오.”
“어디 내 검의 이름을 스스로 알아보려무나.”
팟-
육선이 땅을 박차고 움직였다.
특이한 건 검을 역수로 들었다는 것.
허공을 향해 검을 움직이는데 검신을 따라 용의 형상이 생겨났다.
쾅!
육선의 검이 검제의 검과 부딪혔다.
용의 형상은 검제를 잡아먹으려고 몸 이곳저곳을 물어뜯었다.
“읏!”
무지막지한 일격.
이후에 연속으로 검이 충돌했다.
검제가 육선의 검을 받아 낼 때마다 신음을 흘렸다.
‘어떤… 윽! 무공인 거지?’
그는 육선의 무공이 어떤 건지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머리에 있는 무공 지식을 꺼내 보았지만 검을 역수로 사용하는 무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도가 계열 중 하나같은데… 억!’
검제가 배운 남궁세가의 검법은 중검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그 어떤 검보다 무거웠으며 강했다.
그런데 적의 검도 검제와 같은 중검의 묘리를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검제의 검보다 더 무거워 보였다.
쾅-
콰광!
“아이야. 남궁의 검이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은 것이냐!”
육선은 연신 검강을 휘두르며 검제를 몰아쳤다.
육선의 경지는 화경 초입에서 완숙의 중간 경계에 서 있었다.
현대의 등급으로 치면 S급 초입에서 완숙.
검제의 경지는 화경 완숙에서 끝자락 사이였다.
오히려 경지로 보면 검제가 더 높았지만 실력 차이가 많이 났다.
그건 육선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다른 하나의 기운 때문이었다.
정파의 무공을 지녔지만 마기를 사용하는 천외천.
파천멸기의 파편이 육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무림에서 도산검림을 해치고 우뚝 선 자.
검제와의 경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었다.
“윽!”
“남궁의 검이 방어만 하는 무공이었느냐. 제왕검형을 만든 남궁의 시조가 관에서 뛰쳐나오겠다!”
육선의 검에서 다시 용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번엔 조금 더 짙은 흑룡이었다.
‘위험하다.’
검제가 육선의 흑룡을 보고 위기를 느꼈다.
천뢰기를 꺼내 검에 가득 담은 그가 흑룡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그었다.
뇌전과 흑룡이 서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먼지를 뚫고 뒤로 나가떨어지는 한 사람은 검제였다.
뒤로 나뒹굴던 그가 땅에 검을 박아 넣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푸웁!”
검제가 한 차례 피를 토하며 손으로 입을 닦아냈다.
“태허… 도룡검법! 역수를 취해서 몰랐는데 곤륜파였어.”
그는 드디어 육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 * *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괴개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춘식이가 계속 밀리는데 괜찮은 것이오?”
“괜찮을 거예요. 저 두 사람의 무공은 완전 상극이거든요.”
“상극이라면… 춘식이의 무공이 카운터란 말이오?”
“네. 인주가 저희를 개무시하고 있네요. 카운터라는 걸 알면서도 곤륜파를 내보낸 걸 보면 말이죠.”
“내가 보기엔 춘식이가 불리한 걸로 보이오만….”
괴개는 이해하지 못했다.
검제는 계속 방어만 취하고 있는 상태.
심지어 막기에 급급해 보였다.
저게 어디가 상극의 무공인지.
오히려 검제의 무공이 더 불리해 보였다.
“상대가 사용하는 무공은 태허도룡검법이라고 곤륜파의 무공인데 이름과는 달리 유연함이 없어요. 오로지 강맹함에 중점을 두고 있죠.”
[허나 강맹함에 중점을 두지만 부드러움이 있어야지만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검법이 저 태허도룡검법이니라.]
“검에 무게를 더 줌으로 강함을 증폭시켜서 부드러움을 배제한 나머지 신검합일의 경지는 요원해졌어요.”
[검을 역수로 쥔 게 저놈의 발목을 잡을 것이니라 계속 받아친다면 초식에 균열이 생길 것이니 그때를 노리는 게 좋다.]
이준은 무극자 사부에게 들은 대로 괴개에게 말했다.
괴개는 설명을 듣고 의아한 표정으로 이준을 보았다.
‘태허도룡검법을 알고 있나? 춘식이와 내 무공도 자세히 알고 있는 걸 보면 가능한 이야기긴 한데….’
대체 무공에 대한 지식은 어디서 배웠을까.
백사편법은 미완성의 무공이었다.
이준이 백사편법을 완성해 주기까지 했지만 괴개는 그에 대해 의문만 커졌다.
아무리 천재라 하나 무공의 구결을 알지 못하면 무공을 완성 시킬 순 없었으니까.
뿐인가.
무공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구결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고 서는 무공의 장단점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미지의 인물이야. 아니지, 연구 대상이라 하는 게 옳다. 춘식이 말로는 사부가 있다고 하던데 혹 그 사부란 사람이 무공에 대한 지식을 알려 줬을까?’
“검제께도 이 내용을 전달했으니 알아서 잘하실 거예요. 그리고 슬슬 수련의 성과가 나타날 때가 됐거든요.”
“수련의 성과 말이요?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게 아니오?”
“천외천과 일대일로 상대를 할 수 있는 게 성과라 생각하세요?”
“아니었소? 춘식이 말로는 천외천의 수뇌부와 일대일로 싸운다면 필패라고 들었소.”
“천외천과 싸울 수 있게 된 건 성과의 일부분일 뿐이죠. 설마 손만 겨루게 하려고 그 미친 수련을 시켰겠어요?”
이준의 입에서 미친 수련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도 자신이 시킨 게 지옥과 같은 훈련이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저 봐요. 슬슬 효과가 나오죠?”
이준이 앞을 가리키면서 웃었다.
* * *
“슬슬 지겨워지려고 한다. 인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검을 잡은 한쪽 팔부터 시작하자.”
육선의 검이 검제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흑룡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검제의 어깨에 닿으려는 찰나!
“큭.”
아슬아슬하게 검제가 검으로 막았다.
하지만 육선이 힘을 잔뜩 준 탓에 검이 검제의 어깨로 점점 파고 들어갔다.
어깨 부위에선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챙-
다행히 육선의 검을 쳐낸 검제가 급히 몸을 뺐다.
육선은 거리를 벌리는 건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튕겨 바짝 쫓아 갔다.
‘놈의 약점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져.’
검제는 대장전의 첫 번째 선수였다.
이대로 무력하게 질 순 없었다.
‘창제의 말을 떠올려라.’
검제는 이준이 전음으로 했던 말을 되새겼다.
특히 마지막에 했던 말.
수련의 성과를 믿어라.
곧 내공이 알아서 반응할 거라고 했다.
‘내공을 전신에 퍼트리고 검에 몸을 맡긴다.’
지금까진 내공을 검에만 담기에 급급했다.
상대의 공격으로 인해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여태껏 밀렸으니 이제 자신이 반격할 차례였다.
웅웅.
검제가 가지고 있던 검이 다시 검명을 토했다.
그의 몸이 뇌전으로 뒤덮였다.
눈동자가 파란색으로 번쩍이는 순간!
검제가 보던 시야가 달라졌다.
‘이건!’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상대의 안 보이던 움직임이 눈에 잡혔다.
동작도 전보다 느려 보이기까지 했다.
육선이 아래에서 위로 검강을 긋는 게 들어오자.
검제가 일보 옆으로 움직여 몸을 틀었다.
육선의 검강은 애꿎게 허공만 찢어 댔다.
‘약점이 보인다. 어떤식으로 검을 움직여야 적을 상대할지 길이 보여.’
검제와는 달리 육선의 눈이 커졌다.
헛손질에 당황한 게 아니라 검제가 자신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였다.
“요령이 늘었구나. 이번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육선은 검제의 팔 한 짝을 가져오기 위해 어깨만을 노리고 공격했다.
재차 흑룡의 송곳니가 검제를 노리는데.
따당!
검제가 검을 쳐내 버렸다.
“저놈… 뭐지?”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던 인주가 중얼거렸다.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육선에게 빨리 끝내라고 말하겠습니다.”
“육선! 장난은 그만하게!”
“인주께서 인내심에 한계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어서 끝내십시오.”
오선과 칠선이 육선을 향해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가 육선에게 닿았다.
인주가 지켜보고 있는데 추태를 부렸다는 생각에 육선이 이를 부득 갈았다.
“벌레 같은 놈 때문에 내가 창피를 당하는구나.”
쾅-
육선이 땅을 세차게 밟았다.
눈발이 흩날리면서 날아가는 그가 검을 들지 않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검과 마찬가지로 용의 형상을 보이는 손.
그런데 도중에 형상이 흐릿해졌다.
마치 용이 몸을 숨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전이었다면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저 손아귀에 잡혔을 검제였으나.
‘옆구리를 찔러오고 있어.’
검으로 왼쪽 옆구리를 보호했다.
까아앙!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었다.
“네놈이 어떻게!?”
“당신의 공격이 느껴지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육선은 조법인 운룡조를 연이어 펼쳤다.
태허도룡검법과 같은 육선의 독문무공.
그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두 무공이 번갈아 가면서 펼쳐졌다.
검제는 검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육선의 공격을 전부 막아냈다
“죽어엇!”
이에 육선이 흥분하며 검제에게 마구잡이 공격을 펼쳤다.
저 마구잡이 공격에도 초식의 변형이나 공격의 섬세함은 있었다.
나름 육선 또한 화경에 속한 인물이었으니까.
하나 천뢰기와 하나가 된 검제의 폼은 최상에 가까웠다.
몸의 상처 따위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듯 제왕검형의 초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상처로 인해 초식이 흐트러질 법도 하나 원래의 경로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깟 검강에 내가 베일 것 같으냐!”
육선은 검제의 검강을 향해 용의 발톱을 드러냈다.
평범한 검강 따위는 단번에 두 조각 내버린 극성의 운룡조였다.
쾅!
짧은 폭음.
눈발과 먼지가 뒤섞여 시야가 가려졌다.
뒤에서 보고 있던 이준과 인주의 표정은 극명하게 갈린 상황.
이준은 웃고 있었으며 인주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눈발과 먼지가 가라앉으며 시야가 보였다.
“내, 내 팔이!”
육선의 왼쪽 손이 중지에서부터 어깨까지 기괴하게 잘렸다.
뼈가 훤히 드러나는 상처 부위는 불로 지진 것처럼 연기가 흘러나왔다.
“쿨럭쿨럭… 내가 이긴 것… 같소이다.”
물론 검제도 온전치는 못했다.
내상을 심각하게 입은 모양인지 피를 게워냈다.
“이, 인정할 수 없….”
퍽!
육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인주의 권경이 날아와 그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상대가 성장할 시간을 주다니. 멍청한 놈.”
인주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수하를 죽였음에도 어떤 미안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음은 오선 네 차례다. 저 멍청한 놈처럼 했다간 너도 똑같이 된다는 걸 명심해라.”
“조, 존명!”
오선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나왔다.
육선이 있는 자리로 가서 시체를 발로 차 버렸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육선의 시체에 이준의 눈 근육이 실룩였다.
“상종 못 할 쓰레기들이네.”
동료를 대하는 게 무협지에서 본 사파와 똑같았다.
정파라고 하기에는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
“다음은 내 차례군. 빠져라, 춘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