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6화
일선의 손가락이 청룡무의에 닿았다.
파직-
스파크가 튀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나 일선은 그 경고를 무시했다.
스파크만 튀었을 뿐, 이렇다 할 위험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손가락을 타고 팔 전체로 올라오는 뇌기를 무시하고 옷을 몸에 걸쳤다.
하의마저 입은 그가 옷무새를 매만졌다.
청룡무의를 입으니, 스님이 아니라 영락없이 무인으로 보였다.
화악-
청룡무의가 빛나며 일선을 감쌌다.
“드디어 파천혈신의 신물을 얻었어!”
목소리엔 희열이 가득했다.
고금제일인의 무복.
금강불괴를 넘어 입고만 있어도 신체를 변화시키는 기물.
태양지체나 마신지체로 만들어 주는 청룡무의였다.
또한 사신수 중 동쪽의 수호신인 청룡의 힘이 담겼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뇌기를 지닌 청룡.
그의 힘 일부를 얻게 된다.
무공을 익힌 인간이라면 어찌 마다하겠나.
일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직- 파지직-
그의 몸에서 뇌기가 미친 듯이 흘렀다.
눈이 푸른색으로 번들거렸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손을 오므렸다 펴길 반복했다.
“크크. 이게 청룡의 힘이라 이 말인가.”
일선은 자신의 몸에 가득 들어찬 힘에 아주 만족했다.
그 힘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일평생 모았던 내공을 비롯한 파천멸기를 순식간에 넘어선 뇌기.
족히 3배는 강해진 느낌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더 강해질 터.
파천혈신의 신물을 얻으면 왜 천하제일인이 되는지 그 이유를 오늘 알게 되었다.
“이 힘이라면 인주뿐만 아니라 지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군.”
일선이 힘에 취해 있었다.
여태껏 느껴 보지 못한 미지의 힘.
고작 옷을 입어 본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힘을 얻었는데, 시간이 흐른다면 어떤 결과를 얻을까.
파천혈신의 경지에 근접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마저 생겼다.
“사형 감축드립니다.”
“고맙네. 사제. 크크.”
일선의 번들거리는 눈에서 보이는 광기.
뇌기와 합쳐지니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자네 말대로 청룡무의를 입었네. 어때 보이는가?”
그가 이준을 향해 팔을 벌리면서 물었다.
이준은 여전히 건방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땡중이 입기에는 영 별로네. 내가 입어야 옷태가 날 것 같은데?”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구먼. 오만은 그에 해당하는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말이네.”
그 말을 끝으로 일선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튀어 나가려는 순간.
“윽!”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격하려던 거 아니었어? 갑자기 왜 그래?”
이준이 능글맞게 말했다.
드디어 신호가 오는 모양이다.
“이게 어떻게 된…? 큭!”
“사형! 괜찮으십니까?”
털썩.
일선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핏줄은 울긋불긋 터질 듯 튀어나왔다.
“시작됐지?”
“크윽….”
“사형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내가 뭐? 제 주제도 모르고 신물을 탐한 벌을 받는 거지.”
“신물을 탐한 벌?”
이선은 고개를 돌려 일선을 보았다.
일선은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입에선 침과 함께 선혈이 흘러나왔다.
귀와 콧구멍에서도 피가 흘렀다.
“으아아악!”
일선의 고개가 위로 젖혀지면서 비명을 토해냈다.
“청룡의 힘도 감당하지 못할 거면서 왜 신물을 탐내. 병신같이.”
시간이 흐르자.
“끄륵….”
일선의 몸이 무너졌다.
광기로 가득 찬 눈은 온데간데없고 흰자만이 보였다.
정신이 붕괴된 것이다.
그의 몸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사형, 사혀어엉!”
이선은 일선에게 달려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일선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미 숨이 끊어져 버렸으니까.
백 오십 년의 세월을 넘게 살아온 이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한 명은 쉽게 처리했고. 이제 너만 남았네? 너도 청룡무의 입어 볼래?”
이준이 악마의 미소를 지닌 채 이선에게 제안했다.
그 강인하던 일선이 청룡무의를 입고 죽어 버렸는데 옷이 탐나겠나.
이선은 일선을 내려 두고 검을 들었다.
“우릴 속였구나.”
“지랄도 풍년이다. 옷을 입은 건 지들이면서 내 탓은. 나이가 들면 다 그러냐?”
[사부는 아니니라.]
“닥치지 못할까!”
“할 말 없으면 꼭 상대방한테 닥치라고 해요. 똑같은 레퍼토리 지겹지도 않나. 그냥 덤벼.”
“네놈을 꼭 죽이고 말겠다!”
“능력 있으면 해 보든지.”
이준이 계속 속을 긁자 참지 못한 이선이 그에게 쇄도했다.
***
“겨우 도망친 곳이 이곳이더냐?”
무극대를 쫓아온 백팔나한.
그들이 들어선 곳은 서울숲이었다.
“흩어져서 찾아볼까요, 사형?”
“아니다. 우리가 흩어지는 걸 노리고 각개격파로 공격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일단 주변을 살펴라.”
무진의 명령에 백팔나한들은 걸음을 옮기며 서울숲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김봉팔이 손을 들어 올리며 뻐큐를 날렸다.
“여기까지 따라오고 난리냐. 좀 질척대지 마라. 나 임자 있는 몸이다.”
“낄낄. 쟤들이 그 욕을 알겠소?”
“질척대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도 쓰고 싶었습니까. 부대주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말입니다.”
“야야. 팩폭 하지 마. 일평생 쓸 일이 없는 걸 써 보겠다는데 왜 그래.”
“너어는 진짜 나쁜 놈이야.”
어디선가 무극대원들의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들이!”
김봉팔은 째진 눈으로 이를 뿌득 갈았다.
적들만 아니면 기합을 줬을 텐데 너무 아쉬웠다.
그들의 여유에 한껏 열받은 건 김봉팔만이 아니었다.
“사형! 더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저 중생 놈들을 찢어발겨야 분이 풀릴 것 같소.”
“사형이 못 하겠다면 내가 나서리다.”
백팔나한 중 다섯 명 정도의 인원이 김봉팔에게 짓쳐 들어갔다.
무승들이 반쯤 다가왔을 때쯤 김봉팔이 신호를 보냈다.
“지금!”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봉팔은 두 손을 올려 얼굴을 보호한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한 중생 같으니.”
“지옥에나 떨어지… 거라…?”
다섯 무승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종래엔 그대로 자리에 멈췄다.
마치 석상처럼 굳은 무승들.
그들은 눈을 크게 뜬 채였다.
그러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푸확!
무승들의 몸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다.
김봉팔에게 달려든 무승들의 몸이 조각났기 때문.
육편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빨리 안 하냐?”
“신호에 맞춰서 줄을 당겼습니다만?”
“늦게 당기는 거 봤거든?”
“어라? 들켰나.”
“전투 끝나면 넌 뒈졌어.”
김봉팔을 보고 있던 백팔나한이.
아니, 이젠 백삼나한이라 불려야 하나.
그들이 비명을 질렀다.
“억!”
“함정입니다!”
사제들의 죽음에 대사형 무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100년을 함께한 형제 같은 이들의 죽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함정에 걸려 죽었다는 게 화가 났다.
“고작 함정에 빠져 죽다니! 용서할 수 없다. 나한진을 펼치며 전진하라!”
무승들이 다시 진법을 이루었다.
그들의 몸에선 황금빛 서기가 나왔다.
형제의 죽음 때문에 그런가.
전보다 더 강한 기세를 뿌렸다.
“산 넘어 산이네. 후퇴!”
김봉팔이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도망쳤다.
“죽여라!”
백삼나한은 진법을 이룬 채 김봉팔을 쫓아갔다.
양쪽에 앙상한 나무가 심어진 길이 나왔다.
지금껏 무턱대고 도망치던 김봉팔이 무언가 조심스럽게 넘듯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함정이 있을 것이다. 진법을 유지한 채 전진한다.”
무진의 명으로 무승들이 김봉팔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나무 사이에 가느다란 게 걸려 있는 걸 인지한 백삼나한이었다.
“천잠사입니다.”
“음… 천잠사보다 얇은 것 같으니 조심해.”
그래도 명색에 소림의 최정예라 그런가.
무승들은 김봉팔의 행동을 단박에 파악하고 그와 거리를 좁혔다.
거의 잡았다, 생각했을 때 공중에서 보라색 물이 쏟아졌다.
“독물이다. 내공을 끌어 올려 대항하라.”
독은 무승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불기의 카운터 격.
오히려 백삼나한의 사기만 올려 주는 꼴이었다.
“저놈들도 우릴 상대할 방법이 떨어졌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살계가 열릴 것이다.”
무진이 나한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나고쉬의 독 하나로는 무승들에게 타격이 전무했다.
하나 독액은 그저 애피타이저일 뿐.
메인 디시는 따로 있었다.
나고쉬의 독이 실에 닿자, 실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더욱더 가늘어지며 무승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실.
기감을 잔뜩 올려 실을 피해 앞으로 나아가는 그 순간, 드디어 피의 축제가 막을 올렸다.
“으악!”
실의 점성이 강해져 나한들의 발을 붙잡았다.
봉을 휘둘러 실을 끊으려고 해도 오히려 봉이 잘려 나갔다.
손에 강기를 실어 실을 자르자.
푸확!
“악, 내 손!”
도리어 손목이 날아갔다.
피가 뿌려지며 주위의 실로 튀기자 지옥도가 펼쳐졌다.
곳곳에서 혼란이 가중된 상황.
나한진은 엉망이 된지 오래였다.
“공중이다! 허공으로 치솟아 이곳을 빠져나간다.”
무승들이 위로 점프하자 발바닥에 붙은 실까지 따라 올라와 곁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퍼벅퍽퍽!
실은 가시가 되어 나한들의 몸속에 파고들었다.
심장을 비롯한 혈액이 흐르는 곳은 어디든 찾아 뚫어 버리는 나고쉬의 실.
그들이 아무리 AA급, 초절정의 경지에 있다 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개 같은 놈들이!”
무진의 두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함정으로 인해 무승들 절반가량이 불귀의 객이 된 것.
시체라도 온전했다면 좋으련만 정상적인 게 없었다.
그들의 숫자가 줄어드니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무극대였다.
함정은 다 썼다.
이제 진짜 정면 싸움을 해야 할 때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죽는다.”
“소림의 나한들과 제가 싸우다니 두근거립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별거 있겠냐.”
한마디씩 하는 무극대를 향해 사형준이 말했다.
“신력을 위해 싸우다 죽어라. 그게 나와 너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일 것이다.”
“신력권가의 옆에 우리들의 이름이 걸려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설레오.”
“인생 한 번 사는 거 뭐 있겠나. 명예롭게 죽다 가는 거지.”
무극대가 기세를 피웠다.
몸에선 투기가 무럭무럭 나왔다.
하지만 이 장엄한 순간에 꼭 초를 치는 한 사람.
“난 죽기 싫은데…. 그리고 주군이 살아남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사 대주의 말은 주군의 말을 어기는 겁니다.”
김봉팔 산통을 깼다.
“아휴. 나이만 안 많으면 그냥.”
“전 저렇게 늙지 않으렵니다.”
무극대의 막내 현이도 김봉팔을 외면했다.
영화의 한 장면이었는데 NG를 내 버린 것.
편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왜 맞는 말이잖아. 주군 말 안 들을래?”
“쫌! 눈치 좀 챙기시오.”
“내가 죽어서 다음 생에 태어나면 꼭 형님보다 일찍 태어날 것이오.”
“다들 나한테만 난리야. 내가 만만하지?”
“잡담은 그만. 모두 전륜마멸진을 펼쳐라.”
“명!”
무극대가 각자의 자리로 갔다.
그 옛날 혈마의 무적 진법인 살상진과 신기지가의 천재 한지웅이 만든 천강마멸진을 합친 진법이 펼쳐졌다.
만들어 낸 이는 무려 천주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파천혈신.
과연 소림의 무승이 펼친 나한진과 전륜마멸진이 붙으면 어떤 진법이 이길까.
굉장히 궁금해지는 결과였다.
“신력의 영광을 위해!”
사형준을 필두로 무극대가 나한들과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