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성화의 반쪽이 금역으로 쳐들어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성화와 싸우기 전, 어떻게 싸울지 전략도 짜야 했고 방비도 단단히 해야 했다.
대규모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누가 얼마나 준비를 했냐, 에서 승부가 판가름 나는 거니까.
-검제께서도 혁진군의 주화입마를 어쩌지 못하고 계십니다.
“…제가 어디로 가면 되죠?”
하나 이준은 박혁진에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겐 둘도 없는 친구였으니까.
자신이 혈족 계승도 못한 저능아로 있을 때도 옆에 있어 주었던 녀석이다.
그 시절 박혁진조차도 없었더라면 이미 자신은 고등학생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 모른다.
주변의 안 좋았던 시선과 세상에 혼자 남은 외로움을 버티지 못하고 말이다.
-철혈검가로 와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뚝.
이준이 전화를 끊었다.
[곧 성화가 올 거다.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도 모자랄 판에 어딜 가려고?]
흑염마조가 못마땅한 음성으로 말했다.
“빨리 다녀올게.”
[정신이 있는 건…]
[마조야. 그만 하거라. 빨리 온다하지 않느냐.]
[주인도 성화의 힘을 잘 알지 않아? 여기서 모두 죽을 셈이야?]
[늦지 않고 올 것이니라. 안 그렇냐 제자야?]
“예. 시간 안에 올 거예요.”
[후우우. 주인은 작은 주인한테 너무 관대하다.]
흑염마조가 체념하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시간 맞춰서 와라.]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게이트를 나왔다.
기숙사 방.
창문을 열고 힘껏 뛰어올랐다.
팡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무극군림보를 사용해서 철혈검가로 갔다.
극성으로 펼치자 공간을 격하면서 나아가던 이준.
5분도 지나지 않아 철혈검가에 도착했다.
그의 등장에 미리 안쪽에서 통보를 받았는지.
“창제를 뵙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검가의 입구를 지키는 각성자가 이준을 안내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이의태를 비롯해서 박춘식과 김혜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혁진이 상태 좀 바로 볼게요.”
이준은 박혁진의 손목을 잡지 않고 배에 손을 얹었다.
기를 불어 넣자.
찌릿-
“조심하시오. 혁진이 몸에 내기를 집어넣으면 반발력이 일어나….”
박춘식은 말을 하다 말았다.
이준의 손을 뇌기가 일어나자 자신과 같이 반발력이 일어난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저 방대한 뇌기를 참아?’
이준의 팔을 타고 뇌기가 올라오는 게 박춘식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준은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손자의 몸을 살펴보고 있는 듯 했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건데.’
손자의 뇌기는 강력했다.
S급 각성자인 자신조차 손을 못 댈 정도.
이의태는 치료무공을 가진 의원이기에 손자의 몸을 살펴볼 수 있었으나.
이준은 자신과 같은 공격무공을 지녔다.
상당히 강한 반발력이 있을 터.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외부의 기운이 강할수록 반발력은 두 배로 올 테니까.
박춘식의 생각과 달리 이준은 평온했다.
혼원신공은 SS등급에 있는 뇌신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고의 무공이었다.
천지간의 모든 기운을 품고 있는 혼원신공이었기에 무리 없이 박혁진의 몸을 들여다봤다.
‘주화입마 현상이긴 한데… 운공을 무리해서 잘못 됐다면 혈도가 다 찢겨야 정상 아닌가?’
박혁진의 혈도는 찢긴 흔적이 없었다.
무언가의 힘에 의해 강제로 커진 상태였다.
그저 몸 곳곳에 뇌기가 흩어져 있고 혈도가 약해져 있을 뿐이다.
[이 아이의 몸에 두 가지 기운이 섞여 있구나. 하나는 뇌신공. 하나는 뇌신공보다 더 강한 뇌기… 아마도 후자의 뇌기가 이 아이를 혼수에 빠트렸을 것이다.]
‘또 다른 뇌기요?’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많이 안 좋은 것이오?”
박춘식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정도의 뇌기는 노부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것도 아주 잠깐.]
‘사부님이 생각하신 기운은 뭔데요?’
[청룡의 뇌기. 뇌신공보다 강하려면 그것뿐이니라.]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은 동쪽을 지배하는 청룡밖에 없었다.
아니면 서양의 블루 드래곤이라던지.
‘혁진이가 어떻게 청룡의 뇌기를 몸에 지닐 수가 있죠?’
[아마 저 아이가 얻은 뇌령석때문이지 않겠느냐?]
‘아, 뇌령석!’
이준은 박혁진의 몸을 뒤졌다.
뇌령석이 어딨는지 뒤져보는데 가슴 부근에 구슬이 한 개 만져졌다.
‘찾았다.’
구슬을 꺼냈다.
투명한 구슬에 뇌기가 번쩍이던 게 현재는 돌이 되어 있었다.
‘뇌령석 안에 있던 힘이 혁진이한테 간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제일 크니라.]
‘막대한 뇌기가 몸 안을 점령해서 주화입마 같은 현상에 빠진 거다?’
[정확히는 뇌령석의 뇌기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한 거지. 이 뇌기만 잡아준다면 무리 없이 일어날 것이다. 눈을 뜰 때는 지금과는 달려져 있을 것이고… 하지만 뇌기를 잡지 못한다면 기운에 잡아먹혀 미치광이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다.]
무려 청룡의 힘이었다.
성화의 반쪽이나 흑염마조처럼 불안전한 기운이 아니다.
뇌령석 안에 든 건 청룡의 온전한 뇌기였을 터.
박혁진이 일어난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다.
‘그러면 제가 제어를 해 볼게요.’
[혼원신공이 10성에 달한다면 모를까 네 힘으로는 어림도 없느니라.]
‘혁진이가 이대로 눈을 못 뜨면 어떡해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방법이 있어요!?’
[있지. 있긴 한데… 흐음….]
무극자 사부가 뜸을 들였다.
무언가 고민하는 모양.
시간이 없기에 무극자 사부를 보챘다.
‘해결책이 있으면 빨리 말씀해주세요. 저희 시간 없잖아요.’
[혼원반지를 저 아이에게 끼우면 된다.]
‘혼원반지면 되는 거예요? 쉽잖아요.’
이준은 반지를 냉큼 손가락에서 빼려고 했다.
그러던 찰나 무극자가 그를 말렸다.
[혼원반지는 본문의 신물. 타인이 낄 수 없느니라.]
‘친구가 죽는다는데 그깟 규율이 중요해요?’
이준은 손에서 반지를 뺐다.
그때 다시 무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냥 혼원반지로는 안 된다. 혼원반지의 진정한 힘을 깨워야 해. 그 힘을 깨우려면 각오가 필요 하느니라.]
‘혼원반지를 각성시킬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이 아이가 네게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냐?]
‘네. 이놈 아니었으면 저도 없었을 거예요.’
[알았다. 네 의지가 정 그렇다면… 그럼 다시 묻겠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지를 각성시키겠느냐.]
‘예.’
이준이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박혁진, 박정연이 없었다면 과거에도 현재의 자신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어쩌면… 자신도 도왕과 마찬가지로 악마들에게 영혼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원망한 채 분노와 복수로 가득했을 거다.
마음을 잃지 않게 도와준 게 박씨 남매.
그 어떤 대가를 받치더라도 박혁진을 구하고 싶었다.
[네 각오가 그렇다면… 혼원반지에 네 피를 적시거라.]
이준이 오른쪽 손의 엄지를 이로 깨물었다.
살에서 피가 나자 왼쪽 손에 낀 혼원반지에 핏방울을 떨어트렸다.
은색이던 반지가 붉게 물들어지자.
[혼원반지를 각성시키는 대가는… 네 30년 치 목숨이다. 계약에 따라 뒤로 물릴 수 없다.]
어느 정도 예상했다.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진중했으니까.
‘네.’
이준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혼원반지에 새겨진 계약을 실행한다. 방법은 혼원신공이 아닌, 네가 가지고 태어난 선천지기를 지기다. 그 힘을 혼원반지에 집중시켜라.]
그는 사부의 말대로 행동했다.
혼원신공은 봉인해둔 채 오로지 몸속에 잠든 아주 조그마한 기운을 끄집어냈다.
굉장히 미약하지만 강한 생명력이었다.
웅웅-
반지에서 공명음이 울렸다.
파멸겁도 이에 반응했다.
웅웅-
오랜만에 만난다며 서로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들었던 반지가 서서히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읏!”
“이, 이건!”
“무슨 이런 기파가!”
박춘식이 이준에게서 뿜어지는 기파에 내공으로 대항했다.
김혜연도 마찬가지였다.
창제가 대단하다는 건 귀가 따갑게 들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건 처음.
저 어린 나이에 검제를 능가하는 기운을 뿜어내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 사람과는 달리 평온한 이준.
그러나 혈색만큼은 창백했다.
[이제 되었다.]
혼원반지가 제 색을 되찾자.
[계약 관계에 따라 혼원반지를 각성시켰습니다.]
[각성된 혼원반지를 획득하셨습니다.]
이준이 선천지기를 거뒀다.
몸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
생명이 사라졌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허공에 내리그었다.
[혼원반지(각성)]
등급: SSS
설명: 혼원문의 기보로 내공을 빠르게 모아줄뿐더러 주화입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북쪽의 신수인 현무의 힘으로 만들어진 반지이다.
효과: 운기 효과 +100%, 본신 내력 은신상태, 주화입마 –100%, 내공 안정, 현무철벽
*사대 기보 세트(2/4)
[주(朱) 각성 전]
흑염(S) 사용 가능
[현(玄) 각성]
모든 속성 방어력 +500%
봉인(조건 미달성)
봉인(조건 미달성)
힘이 없어서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화입마 –100%와 내공 안정뿐.
정보창을 끄곤 박혁진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약지가 아닌 새끼손가락에.
힘이 없는 와중에도 절대 약지에는 끼지 않았다.
그건 커플끼리만 하는 행동이었으니까.
태어나서 모태솔로로 살아온 인생만 20년이 훌쩍 넘었다.
박혁진 이 자식에게 커플들만 하는 성스러운 의식을 대신할 수 없었다.
꼭 처음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해주고 싶단 생각에 아득한 정신을 붙잡고 행동한 것이다.
[약지는 죽어도 싫은 모양이구나.]
‘…아무리 절친이라도…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이준의 신념은 확고했다.
저 성스러운 의식은 꼭 여자친구에게 해주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럴 테지, 저기 의심하는 눈초리가 보이구나.]
새끼손가락에 끼워줬는데도 불구하고 세 사람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 말할 힘도 없는데.’
[네 행동이 꽤나 경건했나보지.]
이준이 창백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후우우우.”
큰 숨을 몇 번 내쉬곤 입을 열었다.
“이 반지는 제 사부님께서 남겨주신 아티팩트에요. 반지에 주화입마를 벗어나는 기능이 있어서 끼워준거니 그런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시겠어요?”
이준의 말에 박춘식이 헛기침을 했다.
“크험. 설마 신력의 가주께 그런 무례한 눈빛을 보내겠소? 그저 반지의 기능이 놀라워서 그랬소. 어떤 반지이기에 낀 것만으로 그 방대하던 뇌기가 잠잠해지는 것이오?”
“…비밀입니다.”
박춘식은 혼원반지의 정보창을 열었다.
죄다 ???로 되어 있는 정보.
등급, 설명, 옵션 등 전혀 알 수 없었다.
박춘식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이준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놔두면 알아서 깨어날 거예요. 혁진이 일어나면 반지 먹고 튀면 죽는다고 전해주세요.”
“다 끝난 것이오?”
“네. 이제 정신을 차릴 일만 남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박춘식의 부인인 김혜연이 이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친군데 당연한 일이에요.”
“이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제 방으로 가서 차 좀 마셔요.”
“아닙니다. 제가 지금 바로 가야 해서요. 다음에 마실게요.”
“그럼 꼭 다음에 마셔요.”
김혜연이 이준의 손에 힘을 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이준을 놓아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준이 나가고 세 사람만 남았다.
박춘식이 김혜연과 눈을 마주쳤다.
“어떻소? 손녀사위로 아주 진국 아니오?”
“전 쌍수 들고 환영이에요.”
“신의께서도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신력의 모든 일은 가주의 의지에 따릅니다.”
“그래도 옆에서 바람 좀 넣어주시오. 내 섭섭지 않게 해드리리다. 신력도 우리 철혈과 사돈이 된다면 좋은 일 아니오.”
“저는 정말 권한이….”
“안 되겠소. 여기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눕시다. 부인. 술상을 좀 봐와 주시겠소?”
“당장 차려 올게요.”
김혜연이 방을 나갔다가 얼마 후에 술상이 거하게 가져왔다.
박혁진은 침대에 누워서 깨어날지 안 깨어날지 모르는데.
어른들은 그 옆에서 대사를 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