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한 남자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이대로 도망쳐야 해. 아니면 살해당할지 몰라.’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남자는 무사고의 교사 김태형이었다.
그는 이준이 천중호수를 클리어하고 나오고서부터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신과 패력진권 이민욱의 몰락.
그리고 이준의 급부상은 불안감을 더욱 커지게만 했다.
이준이 크기 전에 진작 해치웠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
모든 원인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서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거야.’
김태형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
속세를 벗어나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이 야밤에 도주를 택한 것이다.
김태형이 주변을 살피면서 아주 은밀히 움직이는데.
부스럭.
뒤편에서 무언가 발에 밟히는 소리가 났다.
김태형이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누, 누구야.”
뚜벅뚜벅.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김태형의 눈에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온 순간.
“히에에엑!”
김태형이 너무 놀라 뒤로 넘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패력진권.”
그랬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신력권가의 이민욱이었다.
이민욱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김태형을 내려다봤다.
“어딜 그렇게 몰래 가시나.”
“어, 어떻게!?”
김태형은 이민욱이 나타나자 기겁했다.
그가 이렇게 밤늦게 야반도주를 선택한 건 이유가 있었다.
천중호수의 일로 인해 이민욱에게 근신 처분이 내려진 것.
기회다 싶어서 최대한 빨리 야반도주를 시작한 거다.
그런데 자신의 앞에 이민욱이 나타나서 너무 놀랐다.
“신력권가의 돈을 처먹을 대로 먹어놓고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튀려고 해? 우리가 만만해?”
이민욱이 김태형에게 한 발 다가갔다.
김태형은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뒤로 계속 물러났다.
“저, 저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 네가 이준 그 천한 것을 제대로 처리했으면 나와 아들이 이런 개망신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다.”
“죄, 죄송합니다. 하, 한 번만 용서를….”
이민욱의 입가에 비틀린 입매가 짙어졌다.
“아직도 용서를 바라는 건가?”
“제, 제발.”
그의 살기 어린 음성에 김태형이 자리를 고쳐 잡았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얼마나 이민욱이 두려웠는지, 눈물과 콧물을 흘렸다.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김태형이 이민욱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악했다.
하나 살려줄 이민욱이 아니었다.
그가 김태형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커억.”
김태형이 배를 부여잡고 컥컥거렸다.
이민욱이 김태형의 목을 발로 지그시 밟았다.
“사, 살려… 주… 세요.”
“네가 일을 잘했다면 내가 이러지 않았을 거야.”
이민욱의 발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김태형은 숨이 막혀 이민욱의 발을 손으로 붙잡았다.
바지를 쥐어뜯고 치우려 했지만, 그의 힘으로는 이민욱의 발을 치울 수 없었다.
“커어어….”
김태형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얼굴에 힘줄이 돋아나고, 눈은 점점 흰자가 드러났다.
그러다 우득, 소리와 함께 김태형의 목이 옆으로 꺾였다.
“능력도 안 되는 게 욕심만 많아 가지고.”
이민욱이 발을 털어냈다.
그의 뒤에 수족인 무영이 나타났다.
“치워.”
“사고로 위장해 놓겠습니다.”
무영이 김태형을 업고 사라졌다.
“꼴 보기 싫은 놈 한 명은 처리했고. 남은 건 이준뿐인가?”
이민욱에게 있어 이준은 조카가 아니었다.
자기 아들의 단전을 깨부순 원수였다.
그에게 있어 김태형보다 1순위로 처리해야 할 사람이 이준.
그러나 지금은 가주인 형님의 명으로 자숙해야 할 때였다.
“내 근신 처분이 풀리면 이준, 네 녀석 차례다.”
이민욱이 이준의 이름을 곱씹고는 가문으로 돌아갔다.
* * *
등교한 이준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에 온 문자를 보고 있었다.
[한상인: 회장님께서 레드존 게이트 하나를 선불로 파천자 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남산 일대 게이트 중 어떤 걸 원하십니까?]
이준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꿈의 정원을 주세요.]
메시지를 보내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꿈의 정원으로 가서 파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운 좋게 꿈의 정원은 암상이 소유한 게이트였다.
꼭 한 번 들려야 하는 장소.
파랑이에 대해 알아야 잘 키우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블랙존 게이트와의 적대도.
파랑이가 어떤 아이길래 사신수들이 적대를 할까.
안 그래도 적이 많은데 몬스터까지 적으로 돌아서는 건 사양이었다.
‘근데 당분간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움직일 수가 없어.’
암상에 가서 물건도 구매해야 한다.
자신의 원대한 계획 중 하나.
게이트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하는 게 꿈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바깥세상이 초토화된다 하더라도 대피할 수 있는 그런 장소.
핵폭탄이 떨어지면 방공호에 숨듯.
몬스터나 이외의 것들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스케먼과 페어리가 있으니까 가능할 거야.’
스케먼은 타고난 일꾼.
싸움은 그렇게 잘하는 녀석들이 아니지만, 일 하나만큼은 레드를 넘어 블랙급에 근접해 있었다.
스케먼이 있기에 자신이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페어리들.
자연과 제일 친화적인 몬스터다.
사막 모래만 있던 금역을 푸른 초원으로 만든 것도 페어리였다.
스케먼이 농사를 짓고 페어리가 작물에 버프를 걸면 벼가 금방 자라지 않을까.
‘시도해 볼 만해. 만약 성공한다면 대박일 거야.’
이준이 잔뜩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뒤를 돌았다.
“혼자 무슨 상상해?”
“어? 지유가 말하던 그 웃음 아니야? 지유야 봐봐. 이준이 이상한 표정 짓고 있어.”
돌아선 여학생은 박은비와 서혜지였다.
원래 각자 다른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다른 애들과 언제 자리를 바꿨는지 현재는 고정석이 됐다.
옆에 있던 한지유가 이준에게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가, 가깝다니까!”
이준이 기겁하고 고개를 뒤로 뺐다.
하마터면 얼굴이 닿을 뻔하지 않았던가.
이 때문에 주변으로 살기가 가득했다.
자신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반 아이들이 눈에 뵈는 것도 없는지.
살의가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질투의 위험이다.
“변태.”
한지유가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것들이 진짜.”
이준이 눈을 부라렸지만 소용없었다.
한지유는 원래부터 꿈쩍 안 했고 박은비와 서혜지는 그동안 꽤 친해져서인지 이준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준이가 지유를 보면서 웃고 있었긴 했지?”
“응. 그런 것 같아. 뭔가 지유를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달까? 그런 느낌이었어.”
박은비와 서혜지는 말하면서도 이준을 힐끔힐끔 보았다.
입가엔 장난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준의 반응을 즐겼다.
한지유는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
이준이 자기를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고 들었는데도 기분 나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어렸다.
긍정의 웃음이랄까.
그녀와는 달리 이준은 팔짱을 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휴. 착한 내가 참는다.”
상종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그럼에도 박은비와 서혜지는 이준을 계속 놀렸다.
그렇게 조회 시간이 다 됐다.
점점 시간이 흘렀다.
10분을 지나 15분이 지날 때는 박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선생님 데려올게.”
“은비야, 가지 마!”
“그냥 이대로 있자.”
수업을 늦게 하고 싶은 아이들은 박은비를 말렸다.
그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 남학생들이 안으로 들어온 여선생을 보고 얼굴이 활짝 피었다.
학교 선생님 중 가장 예쁘고 인기 많은 홍련권, 차경진이다.
그녀가 무거운 표정을 한 채 교탁으로 갔다.
교탁 앞에 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러분께 안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어요.”
“네?”
“어떤 거요?”
“권법 수업 시간에 기초 훈련을 더 늘린단 말씀은 아니시죠?”
“아니면 초식을 더 느리게 펼치라든가.”
차경진이 고개를 저었다.
“모두 아니에요. 오늘 김태형 선생님께서 학교에 안 나온 이유를 말씀해 드리려고 제가 대신 왔어요.”
“담임선생님 어디 아프신 건가요?”
“김태형 선생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네?”
“돌아가셔요?”
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네…. 어젯밤 술을 마시고 가던 중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에 의해 습격당하셨나 봐요.”
“몬스터 웨이브인가요?”
“아직 정확한 경위는 안 나왔지만, 몬스터 쇼크인 것 같아요.”
“아….”
몬스터 쇼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파동으로 인해 벌어진 현상이다.
몬스터의 몸 일부분이 잠시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한다.
각성자에겐 제일 운이 없는 죽음이다.
제대로 싸워 보지 못한 채,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로 인해 게이트로 끌려가는 것.
김태형은 그냥 운이 없었던 거다.
하나, 이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눈을 착 가라앉힌 채 생각에 잠겼다.
‘몬스터 쇼크가 아니야. 아마 가문에서 나선 게 분명해.’
김태형을 진작 처리하고 남았을 가문이었다.
그런데 한참이나 그를 살려뒀다.
아마도 천중호수 공략으로 바빠 김태형을 잊고 있었던 것일 터.
아마 그가 죽은 이유는 자신에게 있을지 모른다.
‘천중호수 일로 근신 처분까지 내려졌으니, 작은아버지 입장에선 김태형을 죽이고 싶었겠지. 김태형이 실수 없이 날 처리했다면 이번과 같은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니까.’
뒤가 구린 일은 항상 작은아버지가 도맡아 왔다.
아니, 자진해서 그 일을 했다고 할까.
가문 내의 작은 입지를 살인이나 폭력으로 풀려고 하는 작은아버지였다.
만약 가문의 힘이 없든가 연맹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면 작은아버지는 필시 범죄자인 마인이 됐을 거다.
그의 성격은 그 정도로 잔인했다.
‘뭐, 김태형이 죽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전생에 신력권가의 돈과 뇌물을 왕창 받고 자신을 괴롭혔던 김태형.
현생 또한 똑같이 괴롭히고 죽이려 했다.
그런 사람을 불쌍하다고 여길 필요가 있을까.
신력권가가 아니더라도 한 번만 더 자신에게 허튼짓을 했더라면 직접 그를 죽이려 했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람을 두 번이나 용서해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
이준이 김태형의 추태들을 곱씹고 있을 때, 학생들이 차경진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는 누가 맡나요?”
2학년 5반은 E급 반이다.
모든 선생이 맡길 꺼리는 반.
누가 재능도 없는 학급을 맡고 싶어 하겠는가.
그나마 이준과 한지유가 있기에 반의 레벨이 높아진 거다.
“김태형 선생님의 공백을 줄이기 위해 제가 5반 담임을 맡게 됐어요.”
“경진 쌤이요?”
“헐.”
김태형의 사고 소식으로 조금 전까지 슬퍼하던 학생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차경진은 B급 각성자.
김태형보다 더 강했으며 가르쳐 줄 것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은 김태형의 죽음을 머릿속에서 곧바로 지워 버렸다.
반 아이들의 반응에 이준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김태형, 당신이 진심으로 학생들을 아끼고 챙겨 줬다면 아이들이 이렇게 바로 당신을 잊지 않았을 거야.’
애초에 그는 학생들을 생각하는 선생님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억울해할 필요가 없었다.
이 모든 게 김태형의 업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