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금전노 한금만의 눈은 앞으로 튀어나올 듯 커졌다.
“복수를 대신해 주겠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이라면 이 말을 믿겠습니까? 복수를 하고 싶어도 못 했습니다. 패왕도가의 가주를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이라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일을 맡길 수 있겠소?”
수십 년도 지난 일.
세월에 복수가 희석되었다.
지금은 장성한 손자와 손녀가 암상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일을 맡길 순 없었다.
자칫하다간 그 화가 손자에게 미칠지 모르니까.
“제가 누군지 알면 거래를 하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당신이 누군지 알면 생각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값이 올라가는데 괜찮겠습니까?”
“자신감은 마음에 듭니다. 어떤 대가라도 상관없으니 정체를 알려주십시오.”
한금만은 앞의 남자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젊은 목소리의 주인공.
상당히 어려 보였다.
젊은 만큼 패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살짝 기대가 된다고 할까.
그는 남자가 후드를 벗길 기다렸다.
앞의 남자가 손을 올려 후드를 벗자, 한금만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주가가 치솟고 있는 인물.
풍사도 최대웅을 이긴 귀창 이준이었다.
아니, TV에서 기겁할 만한 권법을 보여 줘 이젠 권귀가 된 그였다.
“권귀 이준…?”
“암상의 회장께서 저를 알다니 영광입니다.”
한금만이 말을 더듬었다.
“파, 파천자란 닉네임이 당신이었습니까?”
여전히 이준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파천자란 닉네임일 때도, VVIP대우를 했다.
그런데 그 유명하다는 권귀라니.
자신만만하게 말할 만하다.
현대 사회는 각성자 시대.
실력 지상주의가 대변되는 세상이다.
나이가 어리다 해도 실력이 앞서면 대우를 해 줘야 했다.
한금만이 그에게 말을 놓지 않은 건 어찌 당연한 일이었다.
“놀라셨습니까?”
“놀라다마다요. 파천자가 권귀라니. 허허.”
“그렇다면 제가 왜 복수를 해 주겠다고 한지 아시겠군요.”
한금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준의 얼굴을 보고 알아차렸다.
천중호수에서 있었던 일.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내용이다.
몇몇 인물들이 공략대를 버리고 도주한 일은 아직까지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대는 신력권가의 사람 아닙니까.”
“신력과는 인연을 끊고 신기지가의 식객으로 들어간 상태예요.”
“흠….”
한금만이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긴가민가하는 모양.
그럴 수밖에 없다.
이준이 첩자 노릇을 안 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만약 그에게 의뢰했는데, 암살정보를 패왕도가에 흘린다면.
그 빌미로 패왕도가에선 암상을 꿀꺽 삼키려고 할 것이다.
암상은 지하 최대 경매장과 비밀리에 운영하는 정보단체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조직이다.
“학교 방학 전에 천무대전이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전 신기지가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할 겁니다.”
무사고에서 제일 큰 행사 중 하나였다. 오직 실력으로만 정해지는 공식 랭킹전이었다.
여기서 신기지가의 자격으로 참가한다는 건 그들을 대표한다는 이야기였다.
“으음.”
“그리고 전 암상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쪽이에요.”
“미공략 게이트의 물건 때문입니까?”
“맞아요. 그만한 물건을 팔 데는 암상 밖에 없죠.”
누가 장사꾼 아니랄까 봐.
미공략 게이트의 물건은 팔기 어려웠다.
잘못 팔았다간 기자에게 뒤를 밟힐지도 모른다.
항상 경계하면서 다니긴 싫었다.
차라리 암상에서 맘 놓고 파는 게 꼬리 밟기가 덜 했다.
무엇보다 차후에 있을 이세계의 악마들. 그들에 대항하는 조직이 있어야 했다.
암흑가를 지배하는 암상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만했다.
“좋습니다. 당신에게 의뢰를 맡기겠습니다. 보수 조건을 말해주십시오.”
* * *
이준은 한금만과 거래를 끝내놓고 경매장으로 다시 올라왔다.
그는 안내 데스크로 가서 한상인 앞에 섰다.
“물건을 팔고 싶은데,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VIP실로 모시겠습니다.”
파천자 닉네임을 가진 청년이 자신의 할아버지와 만나고 왔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직 그가 경매장을 안 나갔기에 코디네이터처럼 1:1로 붙었다.
이준이 넓은 방 소파에 앉았다.
“어떤 물건입니까?”
한상인이 두 손을 비볐다.
파천자가 과연 어떤 물건을 놓을까 기대하는데.
그가 후드 모자를 벗는 게 아닌가.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금전노 한금만과 같은 얼굴을 한상인이 했다.
“헤엑!”
“금전노께서도 같은 반응을 하시던데.”
“궈, 권귀 이준!”
“별명에 귀신이 붙었다고 너무 놀라시네요. 전 귀신이 아닌데 말이죠.”
“죄, 죄송합니다.”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린 한상인이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다.
입은 여전히 다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준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아이템을 전부 꺼냈다.
리자드 킹과 퀸을 사냥하고 얻은 물건이었다.
[하바사의 목걸이]
[우로간의 왕관]
[우로간의 장화]
[우로간의 부러진 창]
“하, 하바사에 우로간이라니!”
게이트 정보 매거진에서 발간한 책에서 본 이름이었다.
쌍둥이 늪지대였나.
그 게이트에서 리자드 킹과 퀸이 나온다고 했다.
얼핏 듣기론 한꺼번에 나올 확률은 고작 5%.
상대적으로 안전한 게이트라 판명 났다.
이 몬스터의 물건을 이준이 가지고 있을 줄이야.
한상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물건을 살폈다.
……
……
[나락의 투명실]
[나락의 독액]
[나락의 껍질]
“나, 나락의 실까지? 정말 이걸 파실 겁니까?”
“네.”
“이 재료들은 전부 저한테 파시면 안 됩니까?”
“상관없지만 값은 정확하게….”
“두 배로 쳐 드리겠습니다.”
“저야 좋습니다.”
A급 거미 몬스터인 나가쉬에게서 나온 재료.
천중수라는 극한의 지역에서 산 몬스터답게 녀석에게 뿜어져 나온 투명실은 굉장히 튼실했다.
이걸로 방어구를 만든다면, 세상에서 제일 질기다는 천잠사 못지않았다.
나락의 독액은 어떤가.
한 방울만 마셔도 죽는다는 극독이다.
독에 미친 만독암가에서 환장한 물건이다.
굳이 그들에게 안 팔고 가지고만 있어도 든든하다.
마지막으로.
[요정의 꿀]
“이, 이건!”
안티에이징의 끝판왕.
요정의 꿀 하나면 피부 고민은 해결이다.
부잣집 사모님들에게 불티나게 팔리는 물건.
10년을 더 젊게 해주는 묘약이니 안 팔릴 수가 없었다.
아니,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다.
물론 등급별로 효과는 상이하게 달랐다.
높은 등급이 측정될수록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이게 끝일까.
안티에이징이 다면 살짝 아쉬운 효과겠지만.
치료술로 회복할 수 없는 화상이나 흉터 자국도 깔끔히 해결해준다.
치료 포션으로도 이용할 수 있으니.
굉장히 쓸모가 많은 요정의 꿀이었다.
“이것도 저에게!”
“안 됩니다. 경매에 올려 주십시오.”
“제가 비싸게 사면….”
“나락의 재료도 그냥 경매에 올릴까요?”
“아, 아닙니다.”
한상인이 요정의 꿀을 포기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그는 무조건 나락의 재료였다.
요정의 꿀도 좋았지만, 감정사이자 재봉사인 그에게 이만한 물건은 없었다.
“그런데 굳이 경매에….”
“경쟁을 붙여 볼까 합니다.”
“예?”
“그래야 나중에 제 물건이 불티나게 팔리지 않겠어요?”
“아.”
한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경매장은 익명으로 물건이 팔린다.
신분 보장이 철저한 곳.
닉네임의 값이 높아지면, 아이템을 비싸게 올려도 사는 사람이 있다.
이준은 파천자의 닉네임 값을 올리려는 것이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아닙니다. 물건은 다 내놓았으니, 전 이만 가 볼게요.”
“최저 경매가는…?”
“5000만 원으로 걸어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지하 경매장을 이용하면 그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는 최저가였다.
경쟁을 부추기에 좋은 가격.
이 물건들이 얼마나 팔릴지 기대가 됐다.
이준이 후드를 쓰고 가려는데 한상인이 뒤에서 불렀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시죠?”
“저희를 찾아주신 보답으로 이걸 드리겠습니다.”
한상인이 하나의 껍질을 내밀었다.
“뭡니까?”
“인피면구입니다.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아 준비해봤습니다.”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감사합니다.”
이준이 인피면구를 받아 착용했다.
얼굴에 쓰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이준과는 아주 거리가 먼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 * *
다음 날 암상의 어플이 불타올랐다.
-우로간의 왕관 15억에 팔린 거 실화냐?
-와씨 그 가격에 팔렸으면 내가 살걸.
-게이트 돌고 있었는데, 쉬는 시간에 어플 좀 볼걸.
우로간의 왕관을 못 샀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이용자들.
그때, 이용자들과 다른 반응을 보인 댓글이 등장했다.
-B등급 아티팩트를 15억에 샀다고? 제정신임?
-형… 뉴비인 척 하지 마
-2222ㅋㅋㅋㅋㅋㅋㅋ
-판매자가 누군지 모름?
-누군데?
-ㅋㅋㅋㅋㅋㅋㅋㄹㅇ찐뉴비?
-아 그냥 냅두라고ㅋㅋㅋㅋㅋ 지더러 찾으라고 해.
-우리는 뉴비를 강하게 키운다.
모두가 지하 경매 초짜 티를 낸 댓글러를 한심하게 여겼다.
-아 좀 가르쳐 달라고;
-잘 들어라. 판매자의 이름은 파천자야.
-그게 왜?
-지하 경매는 구매 포인트란 게 있어.
한 사람의 물건을 제일 많이 사는 사람에게 그 판매자의 다음 물건을 처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고작 구매 포인트 얻자고 15억을 써댐?
-내가 이런 놈한테 설명해 줘야 되냐?
-가르쳐 줘도 모른다고 했잖아.
-아휴, 저 빡대가리. 판매자가 파천자라 투자 개념으로 물건을 사는 거다. 아가야.
지하 경매장에 혜성같이 등장한 존재.
단 6개의 물건만 팔았는데, 그는 지하 경매장의 네임드가 되었다.
투마의 건틀렛, 위락의 가죽조끼, 위락의 핏빛 양날 도끼.
모두 미공략 게이트에서 나온 아티팩트. 거기다 동급 중 최상에 속했다.
몇십억을 투자해서 아이템을 선점할 수 있다면, 파천자가 판 경매에 도전 안 할 이유가 없다.
-다음은 우로간의 부러진 창이던데.
-ㅅㅂ 사냥 접고 도전한다.
-20억 장전 완료.
-난 경매 컨설턴트까지 붙여서 대기 중이다. 다 꺼져라.
어찌 보면 등급이 높은 각성자들에겐 20억은 껌값이었다.
목숨을 걸고 사냥한 대가라지만, 일반 회사원이라면 평생을 만져보지 못할 돈.
각성자에겐 블루 존 게이트를 1년간 돌면 나오는 돈이다.
아니면 가문이나, 길드에 계약금으로 땡기든가.
그것도 아니다 싶으면 은행에서 빌리면 된다.
탑스타가 건물을 사려고 80억, 100억 은행에서 빌리는 것 같이 이제는 각성자가 그러고 있었다.
탁.
한상인이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경매로 아주 불타오르고 있네요.”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인 금전노 한금만이었다.
“전부 보통 물건들이 아니니까.”
“AA급과 겨뤄도 밀리지 않은 고등학생. 파천자란 닉네임을 쓸 때, 또 어중이떠중이라 생각했는데, 별명이랑 상당히 닮았어요. 파격적인 게.”
“그러니 금전의 복수를 대신해 주겠다고 자신하는 거겠지.”
한금만의 손자인 한상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래서 조건이 뭐래요?”
“남산타워 땅을 달라는구나.”
“통도 크네요.”
남산타워 땅을 달라는 대도 한상인은 놀라지 않았다.
패왕도가 가주의 몫으로는 그마저도 작았으니까.
황금만이 이룬 암상 전체를 달라고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주 싸게 먹힌 거다.
이건 어디까지나 부동산만 있을 때의 이야기.
남산타워가 있는 게이트만 세 개.
그것도 레드존 게이트가 둘.
다른 하나는 블랙존 게이트였다.
가치로 따지면 1 뒤에 붙은 동그라미가 셀 수 없이 많아진다.
그럼에도 한금만의 얼굴엔 아쉬움이 없었다.
“줘야겠지?”
“그럼요. 아버지의 복수치고는 대가가 작아요. 무엇보다 레드존은 몰라도 블랙존 게이트에서 일이 터지는 날엔….”
“우리 힘으로는 대응할 수 없지. 가지고 있기에는 현재 암상의 전력으로 버겁긴 하구나.”
두 사람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이준에게 남산타워 일대를 주기로.
“그에게 전화 걸어라. 계약금으로 레드존 게이트 하나를 넘기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