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이준은 게이트에 들어온 내내 무극자 사부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무극창법은 형식이 없느니라. 찌르기와 베기. 이 두 가지 공격으로 네가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서 쉽고, 어려움이 정해지느니라.]
‘제 머릿속에 그려지는 형식은 뭐예요?’
[사부가 생전에 썼던 경로니라.]
‘그러면 이대로만 휘두르면 되지 않아요? 고금제일의 사부가 사용한 게 제일 강하잖아요.”
[크흠. 당연한 말이긴 하나 제자의 발전을 위해 사부가 조언을 하는 것이니라.]
무극자 사부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고금제일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진중하던 게 없어진다.
생전에 많이 들어봤을 텐데 왜 저럴까.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에 들어온 2차 관문.
첫 번째는 몬스터를 해치우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장애물 넘기였다.
게이트에서 장애물 넘기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이곳의 장애물은 보통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강, 작은 돌다리가 이어진 수평선 너머.
도착지점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넓은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거뿐이라면 수공을 배운 이들이 건너면 될 터.
하나, 이곳의 물은 보통 물이 아니었다.
이름하여 천중수.
물의 무게가 천근(600kg)은 되었다.
소문으로는 많이 들었으나, 이준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손을 얕은 물에 담갔다.
안으로 쑥 빨려 들어 간 어깨.
어느새 물에 담근 손이 모래 바닥에 닿아 있었다.
[호, 여기도 천중수의 물이 있구나.]
무극자 사부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부님이 살았던 곳에도 천중수가 있었어요?’
[아무렴. 천중수는 내가 키운 만년금구의 서식지이기도 했다.]
‘만년금구라면 영물이죠?’
일반 거북이는 파란색.
만년금구는 몸 전체가 황금색으로 뒤덮인 자라였다.
[그래. 영약으로 먹으려 했다가 너무 귀여워서 키우게 된 녀석이었지.]
무극자 사부가 만년금구를 그리워했다.
괜히 마음이 찡했다.
사부의 표정이 웬일로 굳어 있었다.
사부도 누군가를 생각할 때도 있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녀석을 찜 쪄 먹었다면 근 100년은 더 살았을 건만, 쩝.]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하. 사부를 생각해준 내가 바보지.’
다신 사부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준이었다.
“자, 다들 준비하시오. 현원단주는 수속성에 강한 진을 그려주게.”
“그리하겠습니다.”
2차 관문에선 신기지가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의 진은 사람을 가두거나, 살상하는 용도만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버프와 디버프 능력.
진을 이용해 각성자의 능력을 상승시켰다.
현원단이 수속성에 강한 진을 펼쳤다.
[수보진이 형성되었습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30% 상승합니다.]
[지속시간: 00:30:00]
무려 30%의 저항력.
지속시간도 30분이나 됐다.
천중수의 바다를 건너기엔 필수적인 진이었다.
“먼저 가실 분 계시오?”
최대웅이 다른 이들을 보며 말했다.
선뜻 먼저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2차 관문부턴 지옥의 난이도.
수속성에 강한 수보진이 펼쳐졌다지만, 머뭇거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제가 먼저 나갈게요.”
박정연이 손을 들며 앞으로 나왔다.
“누구를 먼저 보낼 거냐?”
“직접 건너려고요.”
“허허. 우선 다른 이들을 보내 놓고….”
“가문 사람들은 실험용 쥐가 아니에요.”
그녀가 최대웅의 말을 딱 잘랐다.
어찌 보면 괘씸하고 버르장머리 없었다.
한참이나 웃어른인 그였으니까.
박정연은 계속 말했다.
“2차 관문이 어떤지 보려면 대표가 직접 나서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리고 저희 할. 아. 버. 지께서는 저한테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박정연이 할아버지란 말을 강조했다.
풍사도 최대웅은 그녀의 할아버지인 일제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최대웅이 다른 이들을 이용해 천중수의 물이 어떤지 보려고 한 걸 대놓고 저격한 것이다.
풍파를 겪은 늙은 여우답다고 할까.
박정연의 저격에도 최대웅은 물 흐르듯 흘려버렸다.
“허허. 내 생각이 짧았어. 난 너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괜한 헛수고였군.”
최대웅은 사람 좋은 척하며 뒤로 빠졌다.
마치 손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친근한 할아버지의 느낌이었다.
박정연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패왕도가 자체가 싫었다.
모두 다 가면을 쓰고 있는 인물들.
겉으로는 착한 척했지만, 실상은 아주 구역질이 났다.
최태민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모든 게 본심을 감추려는 껍질이라는 것을.
“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앞으로 나서자.
“아가씨. 저희가 먼저 가겠습니다.”
“맞습니다. 위험합니다.”
창궁검단에서 그녀를 말렸다.
“아저씨들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잔말 말고 제 뒤를 따라오세요.”
그녀는 단호했다.
19살 소녀라고 할 수 없는.
사위를 휘어잡은 위엄이 있었다.
여장부, 괜히 일제의 손녀가 아니다.
박정연이 긴장된 표정을 한 채 움직였다.
[저대로 두고 볼 거냐? 너랑도 친하다 하지 않았더냐. 천중수의 물은 상당히 위험하느니라.]
‘알고 있어요.’
이준은 2차 관문의 패턴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박정연에게 집중했다.
돌을 밟고 앞으로 이동하는 그녀.
디딤발을 한 발이 돌에 오래 닿아 있자, 돌이 물 밑으로 들어갔다.
2초만 발이 돌에 닿아 있으면 바로 천중수에 빠진다.
그러니 재빨리 발을 돌에서 떼어내야 했다.
이준이 앞으로 나아가는 박정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1/3지점에서 위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돌이 있을 거야. 그곳에서 멈춰.]
이준의 전음에 박정연이 뒤를 돌아봤다.
이준이 그녀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죽고 싶어? 돌아보지 말고, 빨리 내가 말한 곳을 찾아. 곧 물기둥이 솟아오를 거야.]
2차 관문이 무서운 이유는 물기둥 때문이었다.
천중수의 물로 이루어진 물기둥이라 옷깃이라도 닿으면 가차 없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물 안으로 들어가서 살아나온 사람은 전무.
물의 압력으로 인해 빨려 들어간 사람은 뼛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용암 필드보다 무서운 곳이 천중호수였다.
그녀는 이준의 말에 따라 위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돌을 찾았다.
제자리 뛰기를 하며 찾는 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이 말한 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뾰족하게 솟아오른 돌에 도착한 순간.
쿠후웅!
그녀의 뒤로 선을 그은 듯 물기둥이 위로 치솟았다.
마치 그녀를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누나!”
박혁진이 놀라 뛰어가려고 할 때, 이준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을 거야. 저기 정연 누나의 모습이 보이잖아.”
물기둥이 아래로 사라지자, 박정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토끼 눈이 되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더 웃긴 건 그곳에서도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풉!”
이준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너 뭐야?]
박정연은 많이 놀란 듯, 목소리가 커져 있었다.
[뭐긴, 천중호수를 건널 방법이지. 뒤에 따라오는 창궁검단도 같은 방법으로 건너게 해. 내가 방법을 알려 줄게.]
[무, 무슨.]
이준이 능글맞게 박정연을 보며 웃었다.
그가 싱글벙글 웃고 있자, 한지유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과 박정연을 번갈아 봤다.
[허허. 공략 방법을 알고 있었더냐?]
‘그러니까 제가 태평하게 있었겠죠?’
[음흉한 놈. 이 사부한테도 말하지 않다니.]
‘심심할 사부님을 놀라게 해 줄 제자의 재롱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이준도 무극자 사부와 똑같이 뻔뻔해지고 있었다.
[방법을 알면 저들 모두와 공유하지 그러냐.]
‘날 죽이려는 놈들하고요? 저 중에 절반은 이곳에서 묻어버릴 겁니다.’
이준은 무시무시한 말을 태연스럽게 말했다.
자신을 버린 신력권가.
그것도 작은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신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의 밑에 있는 투신단도 똑같았다.
어차피 적이 될 사이.
그런 이들을 뭐 하러 구해 줘야 하는지.
이곳에서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적을 최대한 없앨 것이다.
싸우지 않고 승리할 방법.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릴 순 없었다.
이준이 다시 박정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누나 앞에 작은 돌 있지? 띄엄띄엄 있을 거야.]
[어… 있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만 밟고 앞으로 나가. 2/3지점에 뾰족한 지점이 또 있을 거야 그곳에서 멈춰.]
이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앞으로 빠르게 나갔다.
그녀의 뒤를 창궁검단이 따랐다.
이준이 말한 대로 그녀가 창궁검단에게 전음으로 전해준 듯 잘 따라왔다.
의외로 잘 건너고 있는 철혈검가에 의아해한 최대웅이었다.
“저럴 리 없을 텐데?”
무작위로 나오는 물기둥에 의해 곤욕을 치른 1, 2차 공략대였다.
1차 때보다 2차 때는 더욱 물기둥이 거셌는데, 지금은 괜찮아 보였다.
최대웅은 창궁검단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패턴이 있었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2차 관문을 건널 패턴이 있다는 것을.
창궁검단은 물기둥 패턴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으득. 일제 그 빌어먹을 늙은이! 천중호수 공략법을 알고 있었어.”
최대웅이 이를 갈았다.
그는 일제가 천중호수 공략법을 알고 있다고 여겼다.
이준이 박정연에게 공략법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건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최대웅은 최태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창궁검단 다음에 우리가 건널 거다. 준비하거라.”
“네. 작은할아버지.”
최태민이 당차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이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 늙은이라면 걸릴 줄 알았지. 곧 패턴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제 발로 지옥으로 들어가려고 하네.’
이준이 박혁진의 등을 밀었다.
“누나한테 들었지?”
“너 진짜.”
박혁진의 눈에 궁금증이 일어나는 걸 보자, 곧바로 받아쳤다.
“사부가 알려준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하고 네가 가문 사람 다 보내고 마지막으로 가.”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자칭 무신이라는 분 있어. 빨리 가라.”
박혁진이 마지막으로 돌계단을 밟은 것을 보자, 이준이 계속 입을 뻐끔거렸다.
[이제 곧 화살이 날아올 거야.]
이준의 말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기를 가르고 화살이 빗발치는 게 아닌가.
슈슈슈슉!
하늘에 무수히 많은 비의 화살이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마. 창궁검단한테도 그대로 전해.]
화살이 쏟아지는데 저항도 하지 말라니.
이준의 말은 그냥 죽으란 소리와 진배없었다.
하지만 박정연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모두 검을 내려놓고 가만히 있어요. 제자리에 뛰지도 마세요.]
19살. 고등학생의 말.
그럼에도 철혈검가의 인원은 박정연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단 한 명의 이의제기도 없었다.
모두 다 검을 내려놓고 멈췄다.
돌계단이 물 아래로 잠기든 말든.
그들의 눈은 화살만 직시하고 있었다.
화실 비가 박정연과 창궁검단을 덮으려고 하는 순간.
푸화아악!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물기둥이 하늘로 뿜어졌다.
화살 비는 하늘에 펼쳐진 물의 장벽에 막혀 힘을 잃었다.
기적과 같은 장면.
모두가 넋을 잃고 있을 때도 이준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이때야. 물기둥이 내려오기 전에 앞으로 뛰어 들어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철혈검가의 인원이 물기둥 안으로 달렸다.
“저 미친!”
“자살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최대웅과 이민욱이 기겁했다.
저 거대한 물의 장벽은 천중수의 물.
천근(600kg)의 위력을 지녔다.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수압이 아닌데,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모두가 미친 짓거리라고 생각했는데, 물기둥이 사라지고 그들의 생각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럴 수가 있나.”
물보라조차 일으키지 않고, 물기둥을 뚫고 들어간 것은 물론, 저 멀리 철혈검가 전원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것도 물 위에 말이다.
“일제 빌어먹을 늙은이! 나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동안 천중호수를 깨려고 얼마나 많은 패왕도가의 인원을 잃었던가.
그런데 처음 참가한 철혈검가는 공략 패턴을 알고 있었는지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었다.
이 모두가 일제 그 늙은이의 농간이라 생각한 최대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