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계획을 변경한다고 하자 조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플랜대로 움직이는 걸 선호한 한지유가 인상을 찡그렸다.
“계획대로 안 할 거야?”
“조금 전 말한 이야기가 시크릿 루트인 것 같아.”
“확실해?”
시크릿 루트는 말 그대로 다른 공략 방법이다.
일반적 루트가 아닌 비밀스러운 길을 발견해 깨는 것.
완전히 새로운 공략법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이트.
시크릿 루트는 위험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엄청났다.
깨기만 하면 노다지.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확실해.”
이준의 눈은 단호했다.
긴급 퀘스트가 알려 주지 않았던가.
두 개의 루트를.
여기서 페어리의 천적을 없애는 게 시크릿 루트라고 확신을 가졌다.
이준의 눈을 본 한지유가 조원들에게 의견 구했다.
“너흰 어때? 괜찮겠어?”
“응 난 준이의 의견에 따를게.”
“나도.”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돌아갈 순 없지.”
모두의 의견이 모였다.
“나만 믿고 따라와. 신세계를 보여줄 테니까.”
이준이 자신감 넘치게 앞장섰다.
조원들도 은밀히 뒤를 따랐다.
꽃밭이 풀밭으로, 풀밭에서 생기를 잃은 땅으로 변했을 때.
드디어 목표를 포착했다.
* * *
이신은 신들린 것처럼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광쾅쾅-
붉은 권기가 사방에 폭사하며 몬스터를 격살했다.
그가 들어온 곳은 블루존 게이트였다.
하위 난이도가 아닌 중간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
도봉구에 위치해 있는 쌍둥이 늪지대였다.
“실력 발휘 제대로 하는데?”
“동생한테 자극받았나 봐.”
“우리 준이 말하는 거야?”
콰과광!
권기에 맞은 리자드맨의 시체가 터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주변의 나무들이 터져나갔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가 진동하며 바닥까지 흔들렸다.
“내가 그 버러지 새끼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했지?”
“준이 이름만 나오면 왜 이렇게 흥분해.”
검화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서자 주제에 아득바득 기어오르니까 그렇지. 무엇보다….”
“아아.”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신이 혼자 짝사랑하고 있는 후배.
신기지가의 한지유가 이준의 옆에 있으니 더 화가 난 것일 터다.
“한지유는 네가 싫은 것 같은데 그거 집착이다?”
“박정연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으. 나 같으면 소름 끼쳐서 더 싫어질 것 같아.”
검화가 오돌오돌 떠는 시늉을 하자 이신이 버럭 소리쳤다.
“뭐야?”
“그만. 두 사람은 만나면 싸우냐. 그러다 정분난다?”
“그럴 일 없어.”
“너까지 왜 그래.”
이신과 박정연이 격렬하게 부정했다.
으득-
이신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버러지 자식. 그 자식이 유령살귀를 이겼다니, 말도 안 돼. 분명 숨기는 게 있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테다.”
몬스터에게 화라도 푸는 듯 이신의 주먹은 가차없었다.
이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름과 동시에 중간고사 순위에도 집착했다.
“뭐 하고 있어. 게이트 안 깰 거야?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승해서 2등의 고개도 들 수 없게끔 만들어야지.”
“그건 인정.”
“맞아. 몇 점 차이 안 나면 내 자존심이 허락 못해.”
이신의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도룡의 도가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수십 갈래의 도기가 리자드맨을 쓸어갔다.
단숨에 전멸.
독화도 이에 질세라 독공을 뿌려댔다.
리자드맨이 모여들기 전에 전장을 휩쓰는 천재들.
검화의 검은 강맹하기 짝이 없었다. 권기와 도기보다 더 말이다.
그녀는 중검의 묘리를 담으면서도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이준을 떠올렸다.
‘귀엽네, 짜식. 언제 그렇게 컸데?’
그녀는 철혈검가의 장녀.
쭉 뻗은 팔다리에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환상적인 건강미가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털털하고 가식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교내에 그녀의 팬들도 꽤나 있었는데 상당수가 여학생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박혁진과는 연년생으로 누나가 된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준과도 꽤 친한 사이였다.
갑과 을의 관계랄까?
그녀가 갑의 입장에서 이준을 무척 귀여워 해 줬다.
근래 들어 바빠서 얼굴을 못 봤는데, 중간고사가 끝나면 이준에게 한 번 들려야겠단 생각을 했다.
* * *
이준은 페어리의 천적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본 드라고니?”
“헉!”
“저, 정말이야.”
“교과서에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본 드라고니는 뼈만 남은 이무기였다.
드래곤이 되기 위해 천 년간 숨을 죽이며 승천하기를 기다리는 녀석.
승천 못한 한 때문에 마기에 사로잡힌 몬스터였다.
종족으로 따지면 언데드에 가까웠다.
페어리들과는 상극인 존재였다.
“저 녀석만 잡으면 되겠어.”
“잡을 수 있겠어?”
“못할 것도 없지. 네가 서포터만 해준다면.”
퀘스트2를 깨려면 페어리가 한명이라도 죽으면 안됐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조건.
누구를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힘들었다.
페어리가 자신을 공격하면 그것대로 힘들었고 말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조원들과 페어리를 지켜 줄 수 있지?”
다 놀라는 눈치였다.
이준의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생김새는 저래도 몬스터.
무려 던전브레이크를 일으킨 원흉이었다.
한지유가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우리가 페어리에게 공격당하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구나?”
“정확한 건 아니야. 내가 직접 페어리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해.”
“그게 가능해?”
“해 보려고.”
마침 본 드라고니의 꼬리에 치여 날아가는 페어리가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앳된 페어리가 몸을 일으켰다.
다른 페어리가 도와줄 법도 한데 그들은 애써 무시를 했다.
이준이 몰래 접근해 녀석을 안아 들었다.
-이, 인 읍!
“쉿!”
이준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렸다.
“우린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 인간은 믿을 수 없어! 여기 좀….
어린 페어리가 손을 들어 동족을 부르려는 찰나.
이준이 녀석에게 슬쩍 품을 보여 줬다.
그곳에 파랑이가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러면 믿겠어?”
-처, 청호가 왜 인간의 품에?
“나랑 친구야.”
-거짓말! 인간과 몬스터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뀨뀨.”
파랑이가 페어리를 향해 울었다.
그러자 어린 페어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 이 인간이 당신의 주인이에요?
“뀨.”
파랑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어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준을 보았다.
“그럼 대화를 나눠 볼까?”
-또 저희에게 요정의 꿀만 가져가려는 건 아니죠?
페어리가 갑자기 이준에게 존댓말을 했다.
마음이 50%는 넘어왔다는 증거였다.
“아.”
이준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시기였나?
던전 브레이커가 일어나고 여러 공략대가 더 들어갔다.
공략은 물론 실패로 돌아갔으나, 소득이 있었다.
그건 바로 요정의 꿀.
게이트를 클리어하진 못했지만 요정의 꿀이란 걸 구해왔다.
그것도 아주 많이.
처음에는 사람들이 게이트를 공략하러 갔는데, 이상한 것만 잔뜩 들고 왔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뒤늦게 밝혀진 효능 때문에 난리가 난다.
젊음의 묘약.
그 어떤 피부과 시술보다, 뛰어난 피부 재생 능력을 지녔다.
이런 효능 때문에 게이트 공략은 뒷전.
페어리의 뒤통수를 치고 요정의 꿀만 가져갔었다.
“인간들이 너희를 속였구나?”
-네. 저 괴물을 처치해 준다고 해서 요정의 꿀을 줬는데, 괴물을 보고 요정의 꿀만 가지고 도망쳤어요. 저흰 꿀이 없으면 괴물에게 죽기 때문에 인간들을 따라가 죽이고 요정의 꿀을 되찾은 거예요.
페어리는 순진했다.
특히 남을 잘 믿는 성격이었다.
그게 인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난 그런 파렴치한 짓 안 해. 그리고 본 드라고니도 죽여야 할 이유가 있고. 나랑 거래하자.”
-어떤 거래요?
“내가 본 드라고니를 죽일 동안 쟤들이 너희를 보호할 거야. 우리의 뒤만 공격하지 않으면 돼. 본 드라고니를 죽이면 그때 요정의 꿀을 대가로 받아 갈게. 어때?”
앳된 페어리의 눈이 흔들렸다.
이대로 계속 노예 짓을 할 순 없었다.
고된 노동으로 인해 동족들도 점점 지쳐만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명씩 죽는 동족들.
종래엔 자신을 포함한 모든 페어리가 죽을 것이다.
‘그럴 바엔 인간을 한 번 더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정말 마지막이었다.
이번에도 거짓말하면 저번같이 쫓아가 죽이고, 다신 인간을 믿지 않으면 됐다.
-믿어 볼게요.
“잘 생각했어. 다른 페어리들은 네가 설득해 줘.”
-저 괴물만 죽일 수 있으면 뭐든지 해 드릴게요.
이준이 페어리를 데리고 조원들에게 돌아왔다.
“이 아이를 치료해 줘.”
이준이 치료 무공을 가진 서혜지에게 부탁했다.
“치료만 하면 돼?”
“어. 이 아이가 다른 페어리를 설득할 거야. 너흰 페어리가 다치지 않게만 해 줘. 본 드라고니는 내가 알아서 끝낼 테니까.”
“나도 옆에서 보조할게.”
이준이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페어리들이 다치지 않는 것도 중요해. 그 임무를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어. 꼭 다치지 않게 해줘야 해.”
한지유가 이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눈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페어리를 걱정하는 마음.
유령살귀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페어리에 대한 동정심이야?’
한지유가 시선이 이준에게서 페어리로 옮겨갔다.
그들은 멀리 있었지만, 모두가 지쳐 보였다.
밥도 못 먹었는지 날아가다가 쓰러지는 페어리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이동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저 멀리서 본 드라고니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페어리에게 동정심을 느꼈는지, 이준이 몬스터를 구하려고 했다.
‘어떤 모습이 진짜인 거야, 이준.’
한지유가 이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보호해 볼게.”
이준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됐다. 이제 남은 건 본 드라고니를 해치우는 일만 남았다.
그때였다.
[꿈의 정원 주인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꿈의 정원의 주인이 왜? 아!’
이준이 앳된 페어리를 보았다.
아마도 녀석 때문일 거다.
꿈의 정원은 레드존 게이트였다.
페어리 왕이 보스 몬스터로 존재하는 곳.
게이트 중앙에 거대한 나무가 우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숲이다.
미래에는 미공략 게이트로 있었으며 현재로부터 1년 후에나 열렸다.
‘퀘스트가 두 개로 나온 이유도 꿈의 정원 주인이 주시하고 있어선가?’
확실하진 않지만 근거는 되었다.
이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꿈의 정원 주인이 원하는 건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종족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을 터.
시크릿 루트로 가서 페어리를 구하는 게 정답이었다.
‘애들이 위험할 때를 대비해 파랑이도 데려왔는데 다행이네.’
한지유가 있어서 걱정할 필욘 없었으나 위험의 여지는 남기지 않는 게 좋았다.
파랑이는 그 여지를 아예 없애 주는 요소였다.
“기본적인 조치는 다 했어.”
서혜지가 치료제도 먹이고 가진 무공으로 기운을 북돋웠다.
덕분에 페어리가 금방 기운을 찾았다.
-고맙습니다.
배꼽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몬스터치고 참 예의가 바랐다.
“내가 나가서 시선을 끌게. 본 드라고니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이준이 혈전창을 쥐고 앞으로 뛰어갔다.
콰앙!
일부러 발에 힘을 가득 담아 땅을 박찼다.
이준의 어그로에 요정의 꿀이 담긴 단지를 옮기던 페어리가 화들짝 놀랐다.
-인간이다!
-요정의 꿀을 지켜!
-모두 전투 태세!
페어리가 꿀단지를 왼쪽에 끼고 자기 몸만 한 도검을 들어올렸다.
녀석들의 경고에도 본 드라고니는 구덩이에서 나오지 않았다.
페어리만 있는 것 같이 보이게 하려는 심산이다.
“내 목표는 너거든.”
이준이 페어리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땅에 안착하자 군림보를 펼치며 혈전창을 뒤로 힘껏 당겼다.
[홀홀. 어디 한 번 제자의 창술이나 구경을 해야겠구나.]
군림보와 동시에 펼치는 무극창법.
그의 머릿속에 전반부 2초식인 투경이 그려졌다.
웅웅-
혈전창이 울렸다. 창두와 창대가 점점 하얀빛 무리로 감싸였다.
창의 떨림이 극에 달했을 때!
“이거나 처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