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중간고사 당일이 되었다.
학년 전체가 운동장에 모였다.
“선배님. 꼭 1등 하시길 기원합니다.”
“허수 너도 잘해. 높은 등수 따면 내가 선물 줄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우리 조가 갈 게이트도 다 너 때문에 정한 게이트야 임마. 그러니까 열심히 해.”
이준의 말에 허수는 감동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의가 가득 담긴 표정을 한 채 허수가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이준이 뒤를 돌아보자.
“왜?”
한지유가 째려보고 있었다.
“꼭 그곳으로 가야 해? 우린 몰라도 얘들은 위험해.”
그녀가 박은비와 서혜지, 그리고 남선호라는 남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만 믿고 따라와. 그러면 학년 전체 1등 시켜 줄게.”
이준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을 때, 뒤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1등? 내가 지금 개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맞냐?”
3학년인 이신이 귀를 후비며 시비를 걸어왔다.
“잘 듣고도 못 들은 척은.”
“이 새끼가 저번부터 뭘 잘못 처먹었나. 유령살귀 좀 이겼다고 깝치는 거냐?”
“너만 보면 면상 갈겨 버리고 싶으니까 꺼져. 성질나게 생긴 상판때기를 어디서.”
“큽!”
주위 학생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신은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밟으면 꿈틀대지도 못했던 버러지가 이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막말을 해대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이신이 정신을 못 차리자 옆에 있던 최태민이 대신 나섰다.
“그래. 우리 페어플레이하면서 잘해 보자. 이 형이 응원하마.”
최태민의 응원에 이준이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이신은 단순해서 상대하기 편한데 최태민은 저 자식은 음흉해.’
[너보다 말이냐?]
‘사부님. 전 쟤에 비하면 순수한 편이에요.’
[제자보다 음흉한 놈이라니. 저놈 상당히 위험하구나.]
‘굉장히 기분이 나쁩니다. 사부님.’
무극자 사부가 돌려까는 것 같았다.
“네. 뭐 감사합니다.”
이준이 퉁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신. 우리 자리로 돌아가자.”
“큭. 저 새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최태민이 이신을 끌고 돌아갔다.
3학년 선배가 나타나서 그런가.
박은비를 비롯한 조원들의 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짝짝.
이준이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이 풀렸다.
딱딱하던 표정도 자연스러워졌다.
“후우우우.”
“3학년 선배는 역시 다르구나.”
“보통 선배들이 아니지. 권룡과 도룡 선배니까 저 정도의 위압감을 풍기는 거야.”
박은비와 서혜지는 가슴을 쓸어냈다.
삐이이 소리가 나며 마이크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사장인 한민성이었다.
“아아, 다들 준비됐나?”
“네에에!”
학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긴장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서 이사장은 기쁘다. 오늘은 여러분께 위험한 날이 될 수 있다.”
이사장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덩달아 학생들도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난 여러분께 조심하라는 말 밖에 못 한다. 대신 두 개는 확실히 준비해 놓겠다. 너희들이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나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전체 순위에서 1등한 조에게는 특전을 줄 테니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하길 바란다.”
“와아아아.”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전의를 불태웠다.
학교 전체 1등을 향한 흥분과 기대였다.
“그럼 각자가 선택한 게이트로 출발하시길 바란다.”
한민성 이사장의 말이 끝난 순간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변이 속출하는 중간고사의 서막이었다.
* * *
이준네 조가 선택한 곳은 요정의 꽃밭.
블루 존 게이트였다.
특이사항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장소기도 했다.
“후. 네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
한지유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던전 브레이크는 공략대가 들어갔다가 전부 죽고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온 현상을 말한다.
그만큼 안쪽의 몬스터는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나만 믿고 따라와.”
학년 전체의 1등은 한지유를 포함한 조원들에게 상당히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랭킹 10위인 그녀도 학년 전체 1등은 꿈에도 못 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3학년 때문.
학교 운동장에서 봤던 권룡과 도룡이 같은 조였다.
그뿐인가.
그동안 등교를 하지 않았던 검화와
독화도 같은 조에 속했다.
랭킹 10위 안에 든 이들이 네 명이나 속한 조.
그들을 이기기엔 하늘의 별따기였다.
잘해 봐야 2등.
1등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준은 1등을 시켜 주겠단다.
냉철한 한지유도 그 말에 호기심이 생겨 홀라당 넘어갔다.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이준이 모든 조원의 동의를 구한 상태.
하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라야만 했다.
마지못해 따르는 건 이준의 실력을 믿어서다.
유령살귀를 찜 쪄 먹는 무위.
그때의 실력을 다시 한번 눈으로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위험하다 싶으면 게이트를 포기할거야. 알았지?”
“그렇게 해. 이제 들어가자.”
이준이 블루존 게이트인 요정의 꽃밭으로 들어갔다.
뒤를 따라 조원들도 게이트로 사라졌다.
[블루존 게이트인 요정의 꽃밭에 입장하였습니다.]
우득, 우두둑.
이준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을 풀었다.
그가 이곳을 고집한 이유는 허수 때문이다.
무극자 사부가 말하길 요정의 꽃밭에 패왕도가의 심법이 나온다고 들었다.
건곤미허신공. 패왕도가의 가주조차 익히지 못한 상위 신공이 블루존에 떡하니 있는 것이다.
패왕도가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절초풍할 터.
신력권가만이 아니라, 이신의 외가인 패왕도가에 빅 엿을 먹일 생각에 짜릿했다.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이신의 엄마가 분노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기분이 너무 좋아.’
[사부는 이미 알았느니라. 네 변태 적인 취향을 존중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제부터는 이상한 말하시면 무시할 겁니다.’
[사부에게 말하는 꼬라지하곤.]
이준이 조원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요정의 꽃밭에 대해 설명했다.
“대충 설명은 했는데 다시 말할게. 여긴 페어리가 나오고, 지역이 두 군대로 나뉘어져. 동쪽에는 요정의 꽃밭, 서쪽에는 요정의 안식처가 있어. 우리가 향할 곳은 꽃밭이 아닌 안식처가 될 거야.”
조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의 말에 따르면 페어리들이 꽃밭에서 딴 꿀을 들고 있을 때는 공격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때를 노려 공격하면 쉽게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원들은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준이 직접 해 본 것처럼 자세히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꿀을 나르는 곳은 안식처.
목적지에 다다르면 경계가 풀린다.
그때를 노려 기습하면 쉽게 페어리를 처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다 알아들었지?”
“응.”
“긴장하지 마. 나와 지유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흰 보조만 해 줘.”
“알았어.”
이준이 창을 쥐고 앞장서서 걸었다.
그때였다. 알림음과 함께 두 개의 퀘스트가 떴다.
[긴급 퀘스트1 - 몬스터는 인간의 적]
난이도: B
설명: 요정이라도 몬스터는 몬스터. 저들은 인간의 적입니다. 모두 소탕하십시오.
완료 조건: 페어리 전멸
보상: 페어리 적대도 상승, 테크트리 포인트 850,000p
[긴급 퀘스트2 - 페어리의 천적]
난이도: B
설명: 요정들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꿀을 가져다 바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해치워 준다면 요정은 당신에게 호의를 가질 겁니다.
완료 조건: 페어리 천적 퇴치
실패 조건: 페어리가 한 명이라도 죽을 시
보상: 페어리 친화도 상승, 요정의 꿀, 테크트리 포인트 850,000p
이준은 똑같은 등급의 퀘스트를 두 개 보았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요정의 꿀을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다는 차이뿐.
이준이 팔짱을 꼈다.
‘요정의 꿀이 개꿀이긴한데.’
일반인에게조차 인기 있는 건강식.
수량이 적어 시중에 나오면 무조건 매진이었다.
요정의 꿀은 피부 미용에 탁월한 항산화효과를 지녔다.
탁월하다는 것도 표현이 부족한 효능.
각성자는 내공으로 늙어가는 걸 억제한다면 일반인들은 요정의 꿀로 유지한다.
40대 여자가 먹으면 30대로 보일 정도.
여자들은 요정의 꿀이 성수보다 더 중요했다.
뿐이랴.
모든 탈모인들에게 빛과 같은 존재.
빠진 머리털도 다시 자라게 했다.
시중에 나오면 1초만에 전량 매진됐다.
이준이 꿀이라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원래라면 퀘스트1로 밀고 갔을 텐데, 퀘스트2가 되게 땡기네.’
이미 마음은 후자로 기울였다.
한지유가 허공을 보고 히죽대는 이준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이준은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앞장서서 걸었다.
“이상해.”
“뭐가?”
박은비가 한지유의 옆에서 걸으며 물었다.
“이준은 항상 무언갈 숨기는 것아.”
“그래? 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너희도 자세히 관찰해 봐. 그리고 이상한 게 있으면 말해 줘.”
“알았어.”
조원들은 한지유와 친해질 기회가 생겨 눈에 불을 켜고 이준을 살폈다.
이준은 뒤가 따끔거렸다.
두 개였던 시선이 여덟 개로 늘어난 순간이었다.
그들의 집요한 눈빛.
이준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움직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게이트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페어리를 볼 수 있었다.
“와.”
“꺄. 귀엽다.”
사람 팔꿈치만 한 크기에 등에 날개가 달린 페어리.
예쁘고 귀여운 건 덤이다.
박은비와 서혜지가 게이트인 것도 잊은 채 좋아했다.
무방비 상태로 페어리에게 다가가자, 이준이 두 사람을 제지했다.
아니었으면 페어리의 어그로가 끌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긴급 퀘스트2는 날아갔을 터.
큰일 날 뻔했다.
“여기서 더 나갔다간 페어리들한테 공격당할 거야.”
“미, 미안.”
“귀여워서 몬스터인지 모르고 깜빡했어.”
박은비와 서혜지가 서둘러 사과했다.
사실 그들만의 잘못이라 할 순 없었다.
페어리는 매혹 스킬을 가지고 있다. 낮은 등급의 각성자는 홀리기 십상.
심지어 여긴 그린 존 게이트도 아닌 블루 존 게이트였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모두 죽은 목숨이다.
자신들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두 사람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원래 페어리에겐 매혹 스킬이 있어. 너흴 데려온 건 나니까 내가 너흴 지켜 줄게.”
이준이 두 사람을 달랬다.
이준의 해맑은 웃음을 본 박은비와 서혜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준은 이미 등을 돌린 후였다.
그가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때.
[허허. 사람은 일관적이어야 하느니라.]
‘갑자기 말입니까?’
[네가 여자와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라서 그런다.]
‘이게 다 학년 전체 1등을 위한 제 노력이라고 해 두십시오.’
무극자 사부와 이야기를 끝낸 이준이 페어리를 살폈다.
녀석들이 나르고 있는 작은 단지.
요정의 꿀일 것이다.
어디로 나르는지 알아야 한다.
이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페어리의 어그로를 끌지 않고 녀석들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자.”
“안쪽에서 기습하게?”
한지유가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안쪽에 페어리한테 해가되는 몬스터가 있는 것 같아. 우린 그놈을 죽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