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3화. 내명부 수장의 일 (2)
“왜 즐겁게 잘 크고 있는 우리 아기씨를 부족한 아이로 만드는 것입니까? 평소 우리 금아를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정 귀인을 사납게 노려보던 유 소용의 눈이 불현듯 붉어졌다.
유 소용은 벌써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눈으로 윤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오나, 중전마마. 제가 오늘은 중전마마 안전임에도 금아 어미로서 정 귀인한테 한마디 하려 하오니, 부디 용서하시어요.”
“······!”
평소 허구의 세계에 빠져 있느라 대개의 일에 무신경한 유 소용이 저리 강하게 나올 때는 그만한 일이 있을 터.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의 허락을 얻은 유 소용은 앞에 놓인 다례((茶禮) 상에서 차갑게 우려낸 작설차를 벌컥 마시고는 작정한 기세로 입을 떼었다.
“정 귀인께선 열흘 전 윤리 수업에서 우리 금아가 지은 시를 두고 감히 유교를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불교를 찬양하였다며 혹평하셨다지요? 그게, 그리 평할 일입니까?“
학당 운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움츠려있던 정 귀인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학당 일에 왈가왈부하냐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우리 조선이 유교를 국시로 세워진 것도 사실이고, 또 그때 그 수업이 삼강오륜을 가르치는 시간이었네.”
“이래서 당신처럼 말로만 경전을 외우고 다니는 족속이 안 된다는 거야. 그 시가 누굴 그리워하며 우리 금아가 지은 것인데! 그것이 왜 삼강오륜의 효가 아니란 말이오!”
여러 일로 공사다망한 윤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문 소용이 종종걸음으로 윤서에게 와 작은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고하였다.
“상왕 전하께서 설순을 시켜 지으신 삼강행실도를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부모님에 대한 효심을 써오는 작문 과제가 있었다고 하옵니다. 그 때 우리 금아 아기씨께서 시를 짓고 곡을 붙여 부르셨는데,”
그 동시의 제목은 <웃는 보살>이었다고 하였다.
[웃는 보살
빡빡 깎은 머리통도
어여뻐라 계란 같아
날 보며 웃었어요
우리 아가 건강해졌구나
매일 부처님께 기도한단다
뚝뚝, 이슬 같은 눈물로
울며 웃으며 날 위해 기도하는
웃는 보살]
“이 시를 두고 부모님의 사랑을 점잖은 말로 표현한 것도 아니고, 지극한 효심이 표현된 것도 아니면서 하필 부처를 섬기는 이단의 신앙을 논하였다고 정 귀인이 다른 소저들 앞에서 금아 아기씨를 혹평하셨다고 합니다.”
문 소용은 저 시 속의 ‘웃는 보살’이 금아의 생모인 전날의 홍 승휘, 지금은 망아(忘我)란 법명을 가진 비구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유 소용이 금아를 데리고 망아 보살이 있는 보현암에 종종 가 두 모녀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고, 또 유 소용이 바쁠 땐 자신이 금아를 데리고 종이모인 망아 보살을 만나러 가기도 하는 까닭에, 문 소용은 정 귀인의 처사에 유 소용 못지않게 분개하고 있었다.
윤서는 정 귀인의 몰인정한 처사보다, 금아가 이리 귀엽고 애잔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어릴 때 윤씨가 건넨 약물로 인해 발달이 느린 아이였는데.
약물을 해독하는 탕약과 음식을 계속 먹이고 유 승휘가 매일 책을 읽어주고 글을 쓰게 하고, 희아가 가끔 악기를 가르쳐 주고, 이향이 이따금 무릎에 앉히고 숫자와 셈을 가르쳐주는데.
‘금아가 정말로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부른다고!?’
윤서는 놀라고 기쁜 시선으로 유 소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 소용은 정 귀인에게 보였던 성난 표정을 풀고 우물우물 답하였다.
“···제가 좀, 표현 몇 개는 도와주었지요. 하오나, 중전마마! 공주 자가께 악기는 제대로 배워서 곡조는 잘 만듭니다!”
“그렇지요. 금아 아기씨께서 악기 잘 다루시고 노래하시는 목소리도 참 고우시지요.”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유 소용 편을 들어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한 양 소용도 열렬하게 금아의 악기 솜씨를 칭찬하였다.
‘이향이 참 기뻐하겠구나.’
늘 마음 쓰이는 딸의 건강이 이리 좋아졌으니, 이향은 무척 안도할 것이다.
윤서도 기뻤다.
언어 치료는 유 소용이 충분히 하고 있으니, 윤서는 심리적으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금아를 도와주면 될 것이다.
금아에 대한 기쁨을 충분히 만끽한 후, 윤서는 마침내 정 귀인을 바라보았다.
“정 귀인, 왜 그러셨는가?”
금아의 생모가 폐서인되어 보현암에 망아 보살로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왜!
윤서의 책망에도 정 귀인은 당당하였다.
“금아 아기씨의 적모(嫡母)는 중전마마시고, 양모(養母)는 유 소용입니다. 길러주는 어머니가 따로 계시는데 허물로 폐해진 이를 모친이라고 기리는 것이 어찌 올바른 예이겠습니까? 또한 유교의 예를 배우는 시간에 불교의 보살이라니요. 수업의 취지에도 어긋나는 행위셨기에 가르침 차원에서 그리하였습니다.”
윤서는 물끄러미 정 귀인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였다.
저리 몰인정하고 오만하니 새벽이 낳을 때 저주물을 던지게 한 것이겠지.
증거를 잡지 못한 점과, 유학 이론에 조예가 깊은 점을 고려하여 학당의 책임자 직위는 유지하게 해주었는데,
유학의 훌륭한 가르침을 저렇게 교조적으로만 해석하는 인사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바람직한 지식을 전수할 수 없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정 귀인은 오늘부터 학당 운영에서 물러나시게. 양 소용, 자네가 학당을 맡아주시게.”
“소첩은 성현께서 가르치신 예법을 따랐을 뿐입니다!”
정 귀인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낳아준 부모를 그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그를 가엾게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의 마음이네. 게다가 양육을 담당하는 어머니가 생모를 그리는 딸의 마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는데, 왜 자네가 나서서 양모에 대한 예인지 아닌지를 구분한다는 말인가?”
“하오나 종법에 따르면!”
“그 종법에 낳아준 부모를 부정하라는 가르침은 없네. 마음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예이거늘. 그대의 예법에는 마음은 없고 겉껍질인 형식만 있으니. 그런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오. 그리고, 맡은 바 임무가 변하였으니 작위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네.”
“아, 아니. 주, 중전마마.”
작위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니.
내명부 일도 다 빼앗기게 되어 그나마 학당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거늘.
“중전마마께선 어째 그리 오만하고 무정하십니까!”
마침내 정 귀인은 원망의 말을 쏟아놓았다.
그러자 유 소용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중전마마께서 무정하시다고요? 오만하고 무정한 것은 당신이에요. 어머니를 그리는 어린아이의 마음마저 예법 운운하며 짓밟고, 그리고 학습에 좀 더디다고 직위를 이용해 시험 문제나 먼저 빼내서 애 망치려고 하는 당신이, 무정하고 오만하다고요.”
문 소용은 한술 더 떠서 아예 정 귀인을 무시하고 윤서에게 허리를 굽혔다.
“양 소용이 처음으로 큰 조직 일을 맡게 되었으니, 신첩이 잘 돕겠습니다.”
“문 소용과 협력하여 학당 일을 잘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배움이 얕아 직접 수업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대신 좋은 선생을 많이 확보하는 것에 총력을 다하겠습니다.”
중전마마가 보내주신 이에게서 궁방전의 재산 관리법을 익히고, 불어난 재산을 포목 유통업에 투자하여 제법 수익을 내면서 조직 관리에 눈을 뜬 양 소용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학당의 새 책임자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재빨리 선언하였다.
마침내 윤서가 정 귀인의 실패를 확정지었다.
“정 귀인, 자신이 가지게 된 것은 늘 당연하다 여기면서 왜 갖지 못한 것은 다 나나 다른 이를 탓하시는가. 왜 늘 음침한 적의를 품고 세상을 대하시는가. 오늘 정 귀인이 몰락하게 된 것은 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네.”
정 귀인은 이를 앙다물었다.
‘전하를 혼자 꿰차고 있으면서 날더러 음침하다니! 다들 합심하여 나를 이리 괴롭히면서 남 탓이라니!’
그러나 같은 후궁의 처지이면서도 자신을 편들어주는 이가 하나 없다는 걸, 정 귀인은 사무치게 깨달았다.
“소첩은 이만 물러가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 한 가닥이라도 지키기 위해 정 귀인은 먼저 교태전에서 물러나길 간청하였다.
꼿꼿하게 등을 세운 채 나가는 정 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문 소용이 큰 소리로 쯧쯧 혀를 찼다.
“자손도 없으면서 귀인 봉작을 받았으면 넙죽 엎드려 감사하면서 견마지로를 다하였으면 될 것을. 그리 좋아하는 예법에는 분수를 깨우쳐 늘 행동을 삼가란 가르침이 없던가요?”
밀려난 정 귀인을 대신해 자신이 후궁 중 최고의 직위로 올라서고 싶다는 강력한 어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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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더위가 한창 시작된 6월.
세종과 소헌 대비는 이향과 윤서의 간곡한 청에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셨다.
한여름에도 북악산의 서늘한 기운이 내려오니 여름 동안 더위를 피해 피접하러 오신다는 명목이었다.
상왕 전하의 이어를 앞두고,
윤서는 경혜 공주 희아부터 막내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향의 모든 자식에게 재롱 잔치를 준비하게 하였다.
세종께서 우울하신 것이 이향의 때 이른 죽음과 홍위의 비극을 알게 되신 것에서 기인하였으니, 이향의 직계 후손이 얼마나 총명하고 건강한지를 확인시켜드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교태전에 두 분이 오신 날 오후.
사방의 문을 모두 걷어 올린 가운데, 상석에 앉으신 세종과 소헌 대비 앞에 경혜 공주 희아와 영양위 정종, 경숙 옹주 선아가 가야금을 들고 나왔다.
“할바마마, 할마마마. 저희 셋은 합주곡을 준비하였어요. 중전마마께서 가르쳐 주신 곡을 제가 가야금 세 대를 위한 연주곡으로 보완하였습니다.”
금동이 돌잔치 때 아이들 모두 함께 여러 악기를 연주한 것을 보시며 대비마마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을 기억하는 희아는 이번에는 좀 더 수준 높은 연주를 보여드리고 싶어하였다.
좀 더 우아하고 특색 있는 운율을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윤서는 이따금 피아노로 연주했던 곡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야금 연주에도 적합한 파헬벨의 캐논을 기억해 내고 가야금으로 기본 음계를 뚱뚱 뜯어 들려주었다.
수학을 잘 해 음악 이론에도 조예가 깊은 희아는 바로 가야금 세 대를 위한 곡으로 편곡하고, 윤서에게 맞는 조합인지 확인을 받은 후, 선아까지 함께 맹연습을 하였다.
맨 중앙에 앉은 선아가 따다, 다당 시작하는 캐논의 첫 마디를 뜯기 시작했다. 이어 희아가 함께 다음 마디를 시작하고, 이윽고 정종까지.
열세 살 희아와, 열두 살 정종과, 열 살 선아의 손끝에서 유려하고 아름다운 가야금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소헌 대비는 흐뭇하게 또 눈물을 글썽이시고,
세종은 나란히 앉은 손녀 둘과 손주 사위가 서로 시선을 맞추며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동쪽 편으로 주상과 나란히 앉은 윤서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대청마루에 서서 다음 차례를 준비하고 있는 홍위를 바라보셨다.
오늘 홍위는 열 치 길이의 짧은 단검으로 검무를 선보일 예정이었다.
거문고와 피리 등 여러 악기에 능숙하고, 한시와 경서 낭독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등의 두루두루 재주가 빼어나면서도 홍위는 스스로 검무를 추겠다는 안을 내었다.
“할바마마께서 경서를 가르쳐주시다가도, 또 같이 보행 격구를 하시다가도 수시로 절 안으시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우리 홍위 강건하게 커야 한다’ 하세요. 그래서 어머니, 전 이번에는 악기 말고 검무를 보여드릴래요.”
홍위는 매금이에게서 장식적인 동작이 배제된 채 오로지 상대의 급소를 찌르고 막아내는 데 특화된 실전 검무를 배웠다.
가야금의 우아한 선율이 여운을 남기며 끝이 난 후.
“할바마마, 할마마마, 소손은 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외친 홍위는, 두 발을 벌리며 역수로 칼을 잡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다음 순간 자객 역할을 맡은 매금이의 일격을 타닥, 경쾌한 소리와 함께 쳐 낸 홍위는 바로 매금이의 목으로 목검의 칼날을 들이밀었다.
“와아, 우디 헝님은 못 하는 것이 없다, 해벽아.”
(와아, 우리 형님은 못 하는 것이 없다, 새벽아.)
금동이의 찬탄 속에 빠르게 타다다닥 공격과 수비가 이어지는 백여 합의 검무가 끝이 난 후.
홍위는 매금이에게 목검을 넘기고, 안으로 들어와 두 손을 모으고 세종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세종의 손을 잡으며 자신 있게 고하였다.
“할바마마, 소손 강건하게 클 것입니다. 할바마마, 할마마마, 소손이 제 아들과 함께 검무를 보여드리는 날까지, 부디 오래오래 강녕하오소서!”
세종께선 웃는 듯 우는 듯 입술을 꽉 앙다문 채 홍위의 눈만 강렬히 응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