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2화. 내명부 수장의 일 (1)
“어떻게 그렇게 대화까지 상세하게 알아낸단 말인가?”
교태전 집무실.
간밤 함녕군의 사랑채에서 오고 간 대화 내용을 상세히 보고받은 윤서가 놀라 조 상궁에게 물었다.
그간도 정보를 수집하기는 했다.
수양 대군의 궁과 한명회의 집에는 박 상궁 조직에서 전문적으로 키워낸 간자들이 시녀와 유모, 재산 관리인, 마부 등으로 들어가 있어 동향을 훤히 보고 받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정보는 의원 순덕이 방문 진료를 하는 의녀를 통해 모아들인다. 그래서 주로 어느 대가댁 부인이 어느 대가댁 부인과 주로 어울리는지, 그리고 기녀 진료를 통해 어느 대감들이 누구와 어떤 잡소리를 하는지를 대략 모아들이는 정도였다.
그리고 최근 조 상궁과 엄자치가 기존의 정보 조직을 더 보강해 왕족의 동향을 모아들이는데, 이것은 세종께서 명하신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 두꺼운 담장 안 사랑채 안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까지 상세히 엿들을 수 있단 말인가.
윤서의 놀란 표정에 조 상궁이 그 출처를 밝혔다.
“노비들입니다, 중전마마.”
“노비들이라니? 노비들까지 정보를 캐내는 조직원으로 포섭했다는 말인가?”
“노비들이 자발적으로 주인의 동향을 모아서 저희 쪽에 제보하지요. 저들도 절박하게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자발적으로, ···노비들이?”
최근 한양에는 장차 주상 전하께서 세습 노비 제도를 폐지할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중전께서 자신에게 하사된 노비 모두를 속량할 조치를 이미 취하셨고, 전하께서도 전농시 소속 노비 일부를 벌써 속량하셨으니 다음 수순은 왕실 소유 공노비 전부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저들로서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여 주인들 말을 적극 엿듣고 제보하고 있습니다.”
사정을 고한 조 상궁이 슬쩍 윤서의 심기를 살폈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소인 사촌들 모두 내자시의 여종으로 있습니다.”
조 상궁 본인은 양인이라 할지라도 무슨 사정에 의해서인지 사촌은 모두 노비란 소리였다.
조 상궁이 왕실 종친 주요 인사의 집 노비들로 구성된 정보 수집망을 이리 탄탄하게 구성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왕족들이 사사로이 불만을 털어놓는 거야 별문제가 아니니, 계속 동향을 살피게.”
노비가 우마(牛馬)처럼 재산으로 치부되고, 또 그간 농본주의에 화폐조차 유통되지 않던 조선에서는 재산을 불릴 방법이 토지를 확보하고 노비를 늘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노비 세습제를 폐지하는 것은 새끼 잘 낳고 있는 우마를 거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반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윤서는 이해한다.
하지만 이제 화폐도 본격 유통되고 있고, 공업과 상업이 날로 발전하고 있고, 또 해외까지 진출하고 있고.
무엇보다 한 번 정하신 바는 꾸준히, 끝까지 밀고 나가시는 세종께서 세습제 폐지를 결심하셨으니, 북방의 대업이 이루어지고 나면 시행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윤서는 일단 상황을 정리하고 조 상궁을 물리고 박 상궁을 불러들였다.
왕실과 내수사에서 운영하는 각종 공장의 운영을 책임지고 밤낮없이 매입, 매출 장부와 씨름하느라 눈 밑이 시커멓게 된 박 상궁이 들어서서 윤서 옆부터 살폈다.
예전에는 금동이가, 요새는 새벽이가 윤서 일하는 동안 앉아 노는 자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비어 있다.
“막내 아기씨는요?”
새벽이 안아볼 기회를 놓친 박 상궁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요새 새벽이는 눈만 뜨면 희아한테 가요. 누나한테 배우는 것이 많다고 종일 따라다니다가 사나흘에 한 번은 잠까지 누나 궁에서 자요.”
“아니, 아직 어리신데. 아니 그보다도!”
박 상궁은 목소리를 낮췄다.
“공주 자가께서 밤마다 영양위 머리를 빗겨주신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막내 아기씨가 방해되는 것 아닙니까?”
“희아가 정종 머리 빗겨주고는 새벽이 머리도 빗겨준답니다. 그러면 또 정종이 빗을 받아서 우리 희아 머리를 아주 다정하게 빗겨준다네요. 그러고 나서 정종이 새벽이 데리고 사랑채로 건너간다고 합니다.”
상상만 해도 흐뭇한 광경인지라, 윤서의 입꼬리가 저절로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긴, 아직 관례 올리기 전이라 뭐 밤에 하실 것도 없긴 하지요.”
박 상궁이 허허, 의뭉스럽게 웃다가 윤서의 눈길을 받고는 웃음을 뚝 그치고 윤서가 펴 놓은 서신을 가리켰다.
“아니 그런데 어째서 한씨가 직접 중전마마께 서신을 다 보내셨을까요?”
윤서는 이틀 전 북경의 예서 상단을 통해 분이의 보고를 받으면서 동시에 공신부인 한씨의 서신도 받았다.
[조선국 지존 중전마마께 상국의 황실 여인 한모가 안부를 여쭙습니다.]
화려한 빨간색 비단 종이에 금색으로 쓰인 서신의 주요 내용은 의례적인 안부 인사, 조선의 비누와 화장품, 연고 등의 의약품의 탁월한 효능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우리 홍위의 영민함이 칙사의 입을 통해 명 황실에도 전해졌다는 칭송의 말이었다.
“분이가 여의로 황실 여인들에게 인정을 받으니 덩달아 자신의 위상이 올라가게 된 감사 인사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홍위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 보인 것은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했다.
한씨 가문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넣고 싶은 모양이지만, 나이 차이가 맞는 한확의 막내 여식은 이미 도원군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윤서는 홍위를 원래 역사에서 중전이었던 송씨 아이와 혼인시키거나, 아니면 홍위가 좋다는 처자와 혼인시킬 예정이었다.
“그보다도, 마마님. 상왕 전하 내외를 다시 경복궁으로 모시는 것이 어떠할까요?”
“아니! 아니, 왜? 왜, 대체, 고생을 사서!”
시부모도 그냥 시부모가 아닌 상왕 내외 시부모시다.
그 어려운 분들이 지금은 마차 달리는 시간만 일각(15분) 이상이 걸리는 창덕궁에 계신지라 그나마 편하게 경복궁에서 지내는데, 왜!
딸처럼 윤서를 생각하는 박 상궁이 격하게 반대 의견을 표했다.
그러나 윤서는 날로 쇠약해지시는 대비마마의 환후와, 그리고 단계적으로 조선의 체제 전반의 개혁을 추진하고 계신 세종 대왕의 우울감이 걱정이었다.
이향은 처음부터 역사의 비극에 관련된 인물에 대해서 함구하라 명하였기에 지금까지도 몇몇 스스로 짐작한 인물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세종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윤서는 아는 모든 바를 말씀드렸고, 그 결과 세종께서는 지금 믿었던 인물 대부분, 특히 효령 대군에게까지 배신감을 느끼고 계셨다.
그리고 그 배신감은 왕족의 특권 폐지와 여러 제도의 개혁을 흔들리지 않고 추진하는 추동력으로도 발현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짙은 우울감으로도 발현되어 나날이 수척해지고 계셨다.
이에 대해 윤서와 이향은 근심이 깊었다.
“두 분 다 마음이 울적하신 것 같아서, 홍위와 금동이, 새벽이를 매일 보시게 하고 싶어요. 물론 상왕 전하께선 거의 매일 홍위를 천추전으로 불러서 경서를 가르쳐 주시고 계시지만, 대비마마께선 손주들을 며칠에 한 번 잠깐씩 보시는지라.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대비마마만 뫼셔 오고 다른 후궁들은 그대로 창덕궁에 남아도 궐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요.”
“그거야 상왕 전하 마음이지요. 하긴 요즈음, 상왕 전하께서는 어쩐 일이신지 도통 후궁 처소를 찾는 일이 없으시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 이천에서 떠온 온천물로 목욕하실 때 혜빈 자가의 시중을 받긴 하시지만.”
“좋아요. 그럼 후궁은 차차 옮겨오기로 하거나 그냥 창덕궁에 계시게들 하고 우선 상왕 전하와 대비마마를 여기 교태전으로 모셔야겠어요.”
두 분이 이리로 오시면 홍위, 희아, 새벽이랑 금동이, 그리고 금아와 선아, 매일 놀러 오는 수복이와 계동이, 그리고 도원군과 오산군까지 여러 손주들이 북적거리면서 곁을 지킬 수 있다.
그러면 세종께서도 역사 속 비극 때문에 마음 끓이시는 비감에서 벗어나실 것이고, 대비마마께서도 수양 대군과 평원 대군에 대한 염려를 덜으실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북방의 일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는 이향의 근심을 덜어줄 방법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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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럼 창덕궁의 궁인들이 다 오지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그럼 대비마마를 모시는 최 상궁과 함께 적절한 궁인 목록을 뽑도록 하겠어요.”
후궁들이 중전께 문후를 든 자리에서 윤서가 상왕 전하 내외를 다시 경복궁으로 모시고 싶다고 말하였을 때였다.
정 귀인에게서 넘겨받은 경복궁의 살림을 이제 능숙하게 처리할 정도로 역량이 출중해진 문 소용은 상왕 전하 내외를 시중들 궁인부터 챙겼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옷차림이 화려해지는 양 소용에게 말했다.
“교태전 행각만으로는 궁인을 다 수용할 수 없으니, 북쪽 비어 있는 전각들을 궁인 처소로 내어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은 양 소용이 맞아주겠어요?”
“예, 그렇게 하지요, 문 소용. 침방에 일러 이부자리도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무엇을 할까요?”
요새도 연일 글을 짓느라 눈 밑이 팬더 곰처럼 시커멓게 변한 유 소용이 물었다.
문 소용이 윤서를 바라보았다.
유 소용이 쓰는 종이가 하도 많아서 (유 소용은 이야기가 안 풀리면 종이를 갈기갈기 찢으면서 괴성을 지르는 버릇이 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종이 소모가 많은지 의심한 문 소용은 마침내 유 소용이 그 유명한 세우(細雨) 작가란 사실을 알아낸 참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가장 열성적인 후원자가 되어서 세우 작가의 책을 내수사에서 운영하는 제지 공장의 종이로 낼 수 있게 은밀히 손을 써주고 있기도 하다.
‘저리 너구리처럼 애쓰는데, 유 소용은 그냥 궐의 행사에서 면제해 주시죠!’
문 소용의 강렬한 눈빛이 그리 말하고 있다.
“자넨 금아 옹주나 잘 돌보시게. 학당 진도 따라가기 위해 그 작은 몸으로 요새 애 많이 쓴다면서.”
윤서가 말하자 문 소용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입 모양으로 “잘하셨어요, 중전마마!” 외치고,
“맞습니다. 우리 전하의 따님이신데 학당에서 뒤처지면 아니 되시지요. 우리 선아 옹주는 전과목에서 다 일 등하는데요.”
양 소용은 눈치 없이 선아 옹주를 자랑하고.
명목상으로는 새벽이 출산 때 저주물을 막아내지도 못하고, 또 추후 범인을 잡아내지도 못한 과실로 경복궁의 살림을 모두 문 소용에게 넘기고 왕실 여학당 일만 맡고 있는 정 귀인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 유 소용만 괜찮으면 내가 금아 옹주님을 따로 가르쳐 드릴 수 있네. 시험 성적이 영 안 좋으신 것이 걸리면 따로 손을 쓸 수도 있고.”
“!”
“!”
“!”
“아, 아니. 제 말은 중전마마. 뭐 시험지를 미리 유출한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예상되는 문제를 비슷하게 미리 만들어서 풀어드리고 하는 것 정도만······.”
모두 한심하단 듯 바라보자 정 귀인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침내 유 소용이 말하였다.
“우리 금아 아기씨는요. 맨날 맞춤법도 틀리고 손가락, 발가락 개수 넘어가는 덧셈 뺄셈 못하지만요. 얼마나 다정하고 즐거운데요. 여러 소저들과도 매일 서간도 주고받고요. 동요도 얼마나 잘 짓는데요.”
유 소용의 말소리가 점점 위험하게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