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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54화 (254/255)

제 254화. 세종의 위안

“···그래.”

연신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슬픔과, 눈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삼켜내고 세종은 평온한 한 마디를 마침내 만들어 내셨다.

“너의 아들이 또 너의 손주와 함께 네 앞에서 이렇게 검무를 보여줄 때까지, 우리 홍위도 오래오래 강녕하거라.”

“예, 할바마마. 소손 내년에는 조금 더 우아하고 절제된 검무를 할바마마께 보여드리겠습니다.”

홍위는 싱긋 웃고는 금동이와 새벽이가 앉아 있는 옆의 자리로 돌아왔다.

“우아 헝님, 내년에는 나앙 해요. 나도 매금이한테, 열딤히 배우 꺼야.”

(우아, 형님, 내년에는 나랑 해요. 나도 매금이한테, 열심히 배울 거야.)

“금동이 넌 골격이 더 커야 할 텐데. 그래도 천천히 하는 건 괜찮으려나.”

“그엄요, 전 뭐든 빠이 배워요.” (그럼요. 전 뭐든 빨리 배워요.)

금동이는 으스대고, 새벽이는 싱긋 웃고는 이따 차례가 오면 선보여야 할 것을 중얼중얼 외웠다.

이제는 금아 차례.

유 소용 옆에 앉아 있던 금아가 손에 금경(金磬)이라 불리는 휴대용 타악기를 들고 일어났다.

전에 윤서가 서양의 나무 실로폰을 참조해 울림통까지 만들어 붙인 큰 타악기는 목경(木磬)이라 불리며 궁중 음악에서도 종종 쓰이게 되었다.

이와 별개로 금속 실로폰을 참고해 만든 휴대용 타악기는 쇠 조각으로 만들었다고 금경이라 불리며 학당의 음악 수업에 주로 쓰인다.

“으음, 저는, 으음, 시를 지었떠요.”

홍위와 같이 여덟 살인데도 겨우 다섯 살 금동이 정도의 키에 깡마른 금아는 궁중에서 아픈 손가락이었다.

겉으로 화려하고 존엄해 보이는 왕실 내에서 어린 왕손의 탄생을 막아서라도 차기 보위를 노리고자 했던 모략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금아의 일이 밝혀진 후,

왕실 내에서 복용하는 모든 약재는 내의원의 철저한 검수를 거쳐야만 하도록 바뀌었다.

내의원의 검수 과정도 셋 이상의 어의와, 혜민국의 의녀 둘이 함께 참여하고 탕제나 바르는 연고에 들어가는 약재는 반드시 사전에 쥐나 토끼 등의 짐승에게 먼저 적용해 본 후 약으로 만들게 되었다.

수은이나 납 성분의 해독을 돕는 음식과 탕약을 꾸준히 복용해도 금아의 눈 밑은 아직도 옅게 그늘이 져 있고 안색은 파리하다. 창백한 낯빛을 연노랑 색동 저고리와 환한 진분홍 금박 치마로 오히려 새침한 아기씨의 도도함으로 가린 금아는, 교태전 동온돌 중앙에 놓인 방석에 사뿐 앉아서 나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긴장이 되었는지 치맛자락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슬쩍 양모 유 소용을 바라보았다.

유 소용이 “힘내!”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금아야, 언니가 같이 해줄까.”

선아가 슬그머니 도움을 줄 뜻을 보였다.

“안니야. 혼자 할 뚜 있떠.”

금아는 정수리에 앙증맞게 붉은 산호 장식을 올린 머리통을 흔들어 보이고는, 함께 노래를 만들어준 큰 언니 희아를 보고 배시시 웃고 동그란 머리가 달린 나무 채를 두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동동동 금속성의 맑은 악기 소리와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다.

쟁그랑 쟁그랑

종소리 울릴 때

푸드덕 푸드덕

새 떼가 날아요

햇살은 산 너머

수줍게 숨는데

금아야, 울 애기

다정한 목소리

혀가 둔해서 발음은 온전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소박하게 마음을 울리는 아가의 노래가 교태전을 채웠다.

‘이향이 보았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시큰하게 젖어드는 눈으로 윤서는 정무에 바빠 사정전에 있는 이향을 떠올리고, 이따가 이향이 오면 금아가 한 번 더 노래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깜빡여 눈물을 지워낸 윤서는 상석의 세종을 바라보았다.

때때로 상심하시는 세종께 “광평 대군도, 평원 대군도, 그리고 무엇보다 금아도 살아 있습니다, 전하. 그들이 이미 바뀌기 시작한 역사의 증인이니 부디 회한을 거두소서.” 위로한 적이 있다.

세종께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금아의 노랫소리에 박자를 맞추고 계셨다.

아까 홍위 때는 기어코 참으셨던 눈물을 결국 흘리시는 채로 손녀의 연주를 들으신 세종은 노래가 끝나자마자 그 누구보다 힘차게 박수를 치셨다.

“참 귀여운 노래로구나. 금아 네가 만든 곡이더냐?”

“어, ···으응?”

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유 소용을 바라보았다.

“제가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 좋게 글자 수는 조정해 주었습니다, 상왕 전하. 하오나 기본 표현은 모두 금아 아기씨께서 만든 것입니다.”

“녜에, 소용 어머니가 그짜(글자) 빼 주시고, 또 희아 언니가 음 정해 주었떠요.”

“그래, 잘하였구나! 잘하였어! 참으로 장하구나, 우리 금아. 약 열심히 먹고 또 잘 뛰놀아야 한다.”

“녜에, 함마마마.”

칭찬을 많이 받아서 기분이 아주 좋아진 금아는 일어나서 깡총거리며 유 소용에게 달려갔다.

이제 금동이 차례다.

“우리 금동이는 무엇을 준비하였느냐?”

세종께서 물으셨다.

그러자 금동이는 붉은색 비단 보자기를 들고 일어섰다.

“저는, 노애도 잘하고, 또, 금아 누나처염 금경도 연주할 뚜 있는데요. 그애서 저만 할 뚜 있는 거, 고민을 아주 많이 많이 해서, 선무을 준비했더요.”

(저는, 노래도 잘하고, 또, 금아 누나처럼 금경도 연주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저만 할 수 있는 거, 고민을 아주 많이 많이 해서, 선물을 준비했어요.)

사각의 비단 보자기 꾸러미를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세종과 소헌 대비 앞에 나간 금동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보자기를 풀었다.

“오호!”

붉은색 보자기 안에서 나온 것은 색동의 종이함 안에 가지런히 들은 가죽 안경집이었다. 소가죽을 솜씨 있게 무두질한 위에 금색 실로 壽(목숨 수)를 수 놓은 안경집 안에서, 금동이는 거북이 등껍질로 테를 만들고, 황색 수정을 갈아 알을 만든 색안경을 두 개 꺼내보였다.

“제가 생이 때앙, 또 평소에 받은 거 다 합쳐더, 저번에 박 상궁이앙 저기 경주 근처에 옥 광단을 샀떠요. 거기서 나온 옥을 깎아서 만든 색안경이옵니다. 해가 쨍쨍해더 눈부싯 때 쓰찌옵소서.”

(제가 생일 때랑, 또 평소에 받은 거 다 합쳐서, 저번에 박 상궁이랑 저기 경주 근처에 옥 광산을 샀어요. 거기서 나온 옥을 깎아서 만든 색안경이옵니다. 해가 쨍쨍하서 눈부실 때 쓰시옵소서.)

“!”

“!”

“!”

세종과 소헌 대비는 물론 문 소용과 양 소용, 유 소용까지 입을 떡 벌리며 일제히 윤서를 바라보았다.

‘다섯 살 애가 옥 광산을 사고, 또 유색 옥을 깎아서 색안경을 만든다고?’

경악한 시선은 그리 묻고 있었다.

“박 상궁이 저와 함께 상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광산업이 일정 세금만 내면 민간에서도 개발하도록 허가된 지라, 박 상궁이 광산을 여러 개 사들이고 있는데, 그 중 옥 광산에 금동이도 가진 것을 다 털어 투자하였습니다.”

옥 광산에서 금동이 지분은 3할이었다.

나면서부터 받은 여러 선물에, 생일 때마다 받은 모든 선물을 다 투자해도 실은 지분을 일 할 가지기도 어려웠는데, 금동이를 친손주처럼 생각하는 박 상궁이 자신의 재산을 합쳐서 이 할을 더 채워준 것이었다.

“저번에 매금이랑 같이 운종가에 나갔는데, 세상에 길에서 파는 호떡 하나, 만주 하나도 손을 벌벌 떨면서 안 사먹으시더라니까요. 그렇게 살뜰하게 철전 한 푼까지 모아서 투자하시겠다는데, 어떻게 소인이 안 보태드려요. 죽으면 싸가지고 갈 재산도 아니고.”

너무 큰 선물이라고 말리는 윤서에게 박 상궁은 주름 가득한 얼굴로 활짝 웃으면서 말했었다.

금동이는 선물을 드리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포부를 밝혔다.

“소손은 앞으오도 투자할 곳이 많습니다. 그어니까 하바마마, 함마마마, 소손에게 평소에 심부음 많이 시키시고 또 음, 심부음 시키실 때, 음, 저기,”

“심부름을 시키고 그 대가로 돈을 달라고?”

“예! 그엄 그거 모아더 또 더 좋은 거 많이 많이 만드어 드이겠습니다!”

(예! 그럼 그거 모아서 또 더 좋은 거 많이 많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좋다! 그럼 앞으로 심부름 열심히 해야 한다.”

“예에! 시켜만 주세요!”

조선 제일 부자인 상왕 할아버지께 심부름을 해드리고 많은 돈을 받을 생각에 신이 난 금동이는 함빡 웃으면서 통통 뛰어와 홍위 옆에 털썩 앉았다.

“형한테는, 색안경 안 만들어 줘?”

“헝님은, 떼자잖아요. 동생한테, 투자하데요! 많이 불여 드리께요.”

(형님은, 세자잖아요. 동생한테 투자하데요! 많이 불려 드릴께요.)

셈은 확실한 금동이었다.

이제 막내 새벽이 차례이다.

두 돌이 지난 새벽이는 말수가 적고 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또래 친구들에게 별 흥미도 안 보이고 늘 누나 희아를 따라다니며 산술 배우기를 좋아했다.

세종은 그런 새벽이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아주 비슷하고, 이향의 어린 시절과도 유사하다고 하셨다.

“우리 새벽이는 무엇을 준비하였느냐?”

“소손은, 노애(노래)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또 무예도 잘 못합니다. 작은 형님처엄 투자에도 관심이 많이 가지 않습니다.”

금동이보다 더 또렷한 발음으로 자신의 재주 없음을 밝힌 새벽이는, 바닥을 짚고 엉덩이부터 쑥 일어나서 옆에 놓인 종이 상자를 안고 세종 앞으로 갔다.

“오호, 새벽이도 금동이처럼 선물을 준비한 것이냐?”

“예. 하지만 귀중한 것은 아니고 누님이앙 같이 아음다움에 대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새벽이는 아름다운 비율에 관심이 많습니다, 할바마마.”

희아가 슬쩍 새벽이의 선물에 대해 귀띔하였다.

그 사이 삼등신 짧은 다리로 비척비척 세종과 소헌 대비 곁으로 간 새벽이는 함을 내밀었다.

종이 함 안에는 꽃잎이 세 장인 붓꽃, 꽃잎이 다섯 장인 채송화, 꽃잎이 여덟 장인 모란, 그리고 꽃잎이 열세 장인 금잔화가 시들지 않도록 얼음 위에 놓여 있었다.

“이엏게, 삼, 오, 팔, 십삼으로 나가는 꽃들이 아음다움의 공식이에요. 소손은 앞으오 이언 아음다움을 가진 건축물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렇게, 삼, 오, 팔, 십삼으로 나가는 꽃들이 아름다움의 공식이에요. 소손은 앞으로 이런 아름다움을 가진 건축물을 만들고 싶습니다.)

“으응? 나는 도통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대단하구나, 우리 새벽이. 전하는 알아들으셨지요?”

“수열이오. 꽃잎의 비례를 응용해 건축에 적용하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비례를 얻어낼 수 있다는, 그런 말이더냐, 새벽아?”

“예, 할바마마. 시멘트가 만드어지면(만들어지면) 지금과 다른 거를 만들 수 있다고 누나가 말해주었더요.”

“그래, 우리 새벽이가 시멘트로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 때까지 이 할아비가 오래 살아야겠구나.”

“예에. 오애오애(오래오래) 만수무강 하세요.”

새벽이는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절을 올리고, 다시 짧은 다리로 물러나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윤서에게 와 덥석 안겼다.

어린 나이에 아름다움과 장래 포부를 설명하는 것이 버거웠단 뜻이었다.

교태전 안에 잔잔한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세종은 제 어미의 품에 고개를 묻고 하품을 하는 막내 새벽이와, 또 나란히 앉아 있는 홍위와 금동이, 그리고 남편 정종과 함께 다정하게 앉아 있는 희아와, 양 소용 곁에서 그린 듯 새초롬하게 앉은 선아와, 유 소용의 무릎에서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고 있는 금아를 차례로 눈에 담았다.

‘이리 총명한 아이들이 여섯이로구나. 원래 역사에서는 하나도 손이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여섯이나 되는 자식이 향이에게 있어.’

그리고 향이는 며칠 전 자신을 경복궁 북쪽 약 공장에 모시고 가 짙은 색의 고약을 보여주었었다.

어의 전순의가 허리를 깊게 굽히고 고하길

“이것은 종기를 도려낸 후 도포하였을 때 추가 감염을 막아주는 약이옵니다, 상왕 전하. 아직 복용약은 만들지 못하였으나 염증을 줄여주는 탕약제는 제법 만들고 있으니 종기 때문에 심려는 하지 마옵소서.”

전순의의 설명을 듣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추전으로 돌아오는 길,

아들은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근심을 위로하였었다.

“역사에서 저는 등에 커다란 종기가 나서 급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종기 치료는 우리 조선에서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아바마마께서 만드신 국경선이 윤서의 시대까지 지켜내졌고, 아바마마께서 만드신 문자는 저 먼 서역에까지 그 탁월함으로 이름을 날린다지요.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으시는 분이 아바마마십니다. 소자가 오래도록 살며 아바마마의 치세를 이을 것이니, 이제 그만 회한과 자책을 내려놓으소서.”

오래도록 건재할 아들과 그 아들의 여섯 아이가 지금 내 눈앞에 이리 있다.

세종은 슬그머니 소헌 대비의 손을 잡으셨다.

“대비, 부디 기력을 찾으세요. 우리 손주들이 증손을 안겨줄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이 또 이렇게 우리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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