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97화 (97/255)

제 97화. 감춰두었던 윤서의 속내

눈을 감은 채 윤서의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카락을 내맡기고 있던 이향이 문득 속삭였다.

“순행 나가면 이 빗질이 무척 그리워요. 부인이 머리를 빗겨줘야 개운하게 잠이 드는데.”

“홍 내관더러 빗겨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에이. 그리운 것은 부인이지 어찌 빗질이겠소.”

“······.”

눈물이 나도록 다정한 말이었다.

윤서는 등 뒤에서 가만가만 이향의 목에 팔을 두르고 널따란 등에 얼굴을 묻었다. 코끝에 훅 이향의 살냄새가 끼쳐 들었다. 사랑하면 발꿈치도 어여뻐 보인다더니 비누 향 섞인 이향의 땀 냄새마저 윤서는 좋았다.

“···고마워요.”

윤서가 속삭이자 이향이 등을 떼어냈다.

“이리 누워요. 이제 내 차례니.”

이향은 윤서를 조심스럽게 요 위에 눕히고 흰 침의 자락을 풀었다. 그리고 넓적한 도자기의 뚜껑을 열어 부드러운 제형의 연노란 색 연고를 듬뿍 덜어내 천천히 윤서의 봉긋 솟은 배에 발라주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부풀기 시작하는 배의 튼살을 방지하기 위해 윤서가 동백기름과 여러 한약재를 넣어 만든 연고였다.

윤서가 이향의 머리를 빗겨주면 이향은 윤서의 배에 연고를 발라주며 두런두런 하루 일과를 나누는 것이 이들이 밤에 서로를 위해 가지는 의식이었다.

“이 연고, 광평 대군의 부인께도 드렸는데 대군께서도 저하처럼 부부인의 배에 연고를 발라주신다지요. 그래서 튼살이 하나도 안 생겼다고 좋아하셔요.”

“응, 광평이 내게도 그리 말하였소. 참, 요새 두창에 걸린 말의 환부에서 딱지를 떼어내 사람에게 묻혀 보는 실험하고 있다고 하던데. 조만간 성과가 있으려나?”

“예, 엊그제 전순의가 맥을 짚어보러 와서 말하길, 말에게서 떼어낸 딱지 말린 것을 두창을 앓지 않은 의원 셋에게 실험해 보았는데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중이랍니다.”

“오오, 금똥아, 너는 엄마와 삼촌 덕에 두창 걱정은 없게 되겠구나.”

이향이 윤서의 배에 대고 속삭이자, 배 속의 아이가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발로 뻥 이향의 손을 찼다.

너무 거센 움직임이어서 윤서는 깜짝 놀라 배를 쓰다듬었다.

이향은 윤서의 손에 손을 겹쳐 여기저기 불쑥불쑥 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아이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어허! 우리 금똥이는 엄마를 닮아 아주 말귀도 잘 알아듣고 총명하구나. 금똥아, 아버지 없는 동안 어머니 말씀 잘 듣고 형이랑 누이랑 사이 좋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

“이제 그만 바르고, 자요. 내일 일찍 출발하시려면 지금 주무셔야 합니다.”

매일 함께 잠이 드는데도 할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 이향은 자정이 넘게까지 윤서에게 두런두런,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때는 몰라도 말을 타고 온종일 움직여야 하는 순행 길에 그렇게 늦게 자는 것은 무리다.

윤서는 이향의 손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켜 촛불을 훅 불어 끈 후 함께 누웠다.

그런데 마음이 심숭생숭,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 헤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들어 윤서는 이향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주로 들어주던 다른 날과 달리 아까 홍위와 희아가 똥싸개 아기라고 서로 투닥거렸던 이야기를 속삭였다.

그러다가 다른 때 같으면 전하지 않았을 천추전에서의 대화까지 말하게 되었다. 세종께서 윤서에게 일본과 수양 대군의 동향을 파악할 겸 방박량진(나가사키)에 무역을 할 상점을 내라 명하신 말씀이었다.

“···그래서, 아바마마가 또 무서웠소?”

이향이 윤서를 바싹 끌어안으며 물었다. 윤서가 세종을 무척 존경하면서 동시에 또 두려워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에 묻는 것이었다.

윤서는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무섭다기보단 어쩐지 그 심정이 잘 이해가 가서 좀 슬펐어요.”

“응? 무슨, 심정?”

“아들을 경계해야 하는 그 기막힌 심정이오. 아들을 마음껏 아끼시지 못하고, 또 당신한테도 차마 말씀을 못 하시고, 그래서 겨우 말씀을 하시는 대상이 저잖아요. 제가 그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아시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 생각해 보면 참 가여우시더라고요.”

“······.”

이향은 아무 말 없이 윤서를 바싹 당겨 안고 배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아무 말이 없어서 이제 그만 잘 생각인가 하는 찰나, 이향이 무거워진 말투로 속삭였다.

“···윤서 네가 그리 말하니 나도 아바마마의 심정을 알 것 같구나. 이담에 나도, 우리 금똥이를 두고 같은 고민을 하게 될까, ···두렵기도 하고.”

“이향!”

이리 다정한 남편이 내 아이에게.

왈칵 두려운 마음에 윤서는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이향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오뚝한 콧날과 긴 수염이 와 닿았다.

수염 아래 입술을 어루만져 이향의 애정을 확인하며 윤서는 심중에 품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이향, 나는, 이 아이가, 우리 금똥이가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살면 좋겠어요. 왕손이라 감당해야 할 부분이 분명 있지만 중앙 권력과 멀리 떨어져서 살게 하고 싶어. 자식들을 마음 놓고 사랑할 수도 없는 그런 자리, 난 원하지 않아요. 이기적인 마음이죠.”

“으응? 어째서 그 마음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냐?”

“우리 홍위는 당신을 이어 오래도록 왕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홍위는 전하처럼, 또 당신처럼 고되고 복잡한 제왕의 삶을 살게 되겠죠. 복잡한 조정의 업무 외에도 또 자식이 없으면 없어서, 많으면 또 많아서 근심일 터이고. 그걸 뻔히 알면서 나는 또 우리 금똥이 만큼은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바라는 거, 이게 몰래 감춰 놓은, 제 이기적인 마음이에요.”

“···부인, 윤서야.”

방 안에 어둠이 침묵으로 더 짙어졌다.

왕가의 일은 이렇게나 한마음으로 힘껏 사랑하는 이에게도 다른 입장에 서게 한다는 걸, 두 사람은 검어진 어둠 속에서 새삼 무겁게 실감했다.

윤서는 더욱 가까이 이향의 옆구리를 파고들며 속삭였다.

“이향. 내가 조선에서만 살았다면 내가 낳을 아이가 당신처럼 되길 꿈꾸었을지도 몰라요. 인간은 자기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니까. 그러나 나는 다르게 살다 온 사람이에요.”

“알아. 그리고 다른 시대에서 온 너로 인해 나도, 홍위도 변했지. 그 변화가 나는 기쁘다. 그리고 홍위도 그로 인해 다르게, 즐겁게 오래오래 살 것이고.”

“응, 그러니까. 난 지금 마음이 변할 것 같지 않아요. 왕관을 쓴다는 것의 무게가 어떠한 것인지 잘 아니까. 권력이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물들이는지 많이 읽어 보았으니까요. 그러니까 훗날에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에요.”

“알아. 안다, 윤서야.”

이향이 윤서를 품에 당겨 안았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아바마마께서도 네 마음을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니 결국 네게 수양의 일도 맡기시는 것이 아니겠느냐. 믿지 못한다면 지키고 싶은 아들을 어찌 넘겨주겠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세종께선 수양을 통해 윤서에게 헛된 야망을 품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의미가 더 컸다. 그러나 그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진실로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니.

어릴 적부터 세자로, 확고한 후계자로 살아온 이향은 윤서가 가지는 미묘한 위치를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 깊숙이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윤서가 세자로서 이향이 품는 다양한 생각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우리는 끝까지, 죽는 날까지 서로를 이해하려 애를 쓸 것이다.

윤서는 이향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속삭였다.

“예. 먼 훗날 전하께서도 제가 우리 홍위를 얼마나 간절하게 지키길 원하는지 알게 되시겠지요.”

그러나 세종이 윤서의 진심을 알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

사월 중순부터 궐 전체는 5월 5일에 있을 단오 연회 준비로 분주해졌다.

올해의 궁중 단오 연회는 종전의 연회와 완전히 다르게 준비하라는 전하의 어명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우리 조선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여 나는 우리 조선의 발전상을 온 백성과 함께 즐기고자 한다.”

그래서 종전에 궐의 근정전과 사정전, 중궁전에서 차일을 치고 다양한 음식을 즐기며 기생의 춤과 노래를 본 후 제호탕을 마시고 부채를 나눠 가지는 궁중 연회 대신, 용산 앞 한강의 백사장에서 색다른 연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수륙군이 한강에서 수영 솜씨를 선보인 후 배에 올라 나무 창을 가지고 수전을 선보인다. 그 후엔 군기시에서 금성 대군이 밤낮없이 심혈을 기울여 새로 개발한 화포의 위력을 선보인 후, 어둑한 밤이 찾아오면 백사장을 따라 설치한 불꽃놀이를 구경하도록 짜여졌다.

백사장은 구획을 나눠 전하와 조정의 문무백관이 자리할 곳, 그 옆으로 중전마마와 내외명부 여인들이 자리할 곳, 세손을 비롯한 명문가 자제들이 자리할 곳, 평창 군주를 비롯하여 명문가 여식들이 자리할 곳, 그리고 그 뒤로 백성들이 자리할 곳으로 나눠서 배치가 정해졌다.

“발전상을 보고자 하는 백성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부표 다리를 더 설치하라!”

전하의 명에 따라 한강 이남권에서 구경을 오는 백성들을 위해 기존에 양재에서 한강진을 향해 놓아진 부표 다리 외에 양화진에서 시작되는 부표, 그리고 광나루 쪽에서 놓아진 부표 등 다리가 두 개 더 생겨났다.

가장 큰 구경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한강진 앞에 스무 자(약 6m)의 높이로 세워지는 괘종시계였다. 열 자(3m) 가까이 되는 거대한 추가 좌우를 왕복할 때마다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맞물려 돌아가는 무수히 많은 톱니바퀴는 우리 조선이 이전과 근원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선언하는 징표였다.

물론 실제로는 시계가 곧잘 멈춰서서 옆에 세워진 누대에서 밤낮으로 수리공 셋이 번갈아 상주하며 지켜야 했지만, 이 모습은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윤서는 유 승휘, 작은 권 승휘와 함께 여성 측 단오 행사의 진행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다. 동궁의 다른 승휘는 모두 신빈 김씨나 양 귀인 휘하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나 상화(종이꽃) 등의 장식을 준비하는 일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단오 행사 준비로 후궁들이 함께 모이는 일이 잦아지자 감춰져 있던 동궁 내궁의 갈등이 조금씩 표면으로 불거졌다.

“와, 시기와 질투에 이글거리는 저 눈빛을 보라. 눈빛에 실체가 있다면 권 승휘, 그대의 부푼 배는 벌써 만신창이로 찢겼을 것이니, 매금아!”

유 승휘가 연극 배우가 된 것처럼 과장되게 말하며 윤서의 본방 나인이자 호위인 매금이를 불렀다.

“너, 권 승휘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말고 지켜야 한다.”

“응!”

“응?”

대답했는데 왜 그러냐는 듯 매금이가 유 승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유 승휘가 윤서에게 말했다.

“장차 귀하게 되실 분이신데, 본방 나인 짧은 말은 좀 고치셔야 하지 않나요?”

“우리 매금이는 본시 그러하오.”

“본시······, 본시라. 그래 뭐. 다들 제 나름으로 사는 것이지요.”

창작에 열중하면서부터 다양한 인물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폭 빠진 유 승휘는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매금이를 보다가 고개를 흔들고 작은 권 승휘를 불렀다.

“작은 권 승휘. 그대는 의술을 좀 아니 권 승휘가 마시는 물, 받아드는 부채 하나까지, 다! 모두 다! 챙겨야 할 것이오.”

“흥, 의술을 ‘좀’ 안다니! 조선 팔도에 나만큼 의술을 아는 여인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렇게 투닥거리면서도 셋은 즐겁게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준비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윤서가 아닌 홍위를 향해 날아갔다.

홍위를 향한 윤서의 진심을 시험하는 위기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