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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98화 (98/255)

제 98화. 왕실 단오제 (1)

“궐에서는 정 승휘처럼 노골적으로 싸늘한 이보다 홍 상궁처럼 간이라도 빼줄 듯 샐샐거리는 이가 더 위험하다.”

오랜만에 동궁 윤서의 거처에 든 박 상궁이 충고했다.

엄자치가 은광에서 동궁으로 돌아온 후 박 상궁은 동궁전의 궁인을 감독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내수사로 근무처를 옮겼다. 윤서가 벌리는 사업 규모가 날로 커지자 이향이 이재에 빼어난 안목을 가진 박 상궁을 아예 동궁전 사업 총괄 특별 상궁으로 임명하고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근무하라 명했기 때문이다.

동궁전의 이름으로 벌이는 사업 외에도 윤서와 개인적으로 합작해 운영하는 사업체에, 사업을 빙자해 각처에서 은밀하게 모아오는 기밀 정보까지 윤서와 함께 관리하느라 박 상궁은 머리가 새하얗게 셀 지경으로 바빴다.

물론 박 상궁은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 재미에 흠뻑 빠졌고, 덕분에 한동안 윤서에게 가졌던 서운함은 싹 잊어버리고 다시 친정어머니처럼 살가워졌다.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자도록 바쁜 와중에도 임신으로 윤서의 눈 밑에 기미가 낄 조짐이 보이자 진주 가루를 듬뿍 넣은 특별 미백 화장품을 만들어 들고 동궁에 들어왔다가, 단오 연회 준비 중인 윤서가 홍 상궁의 딸 금아의 손을 잡고 희아의 삽살개 몽몽이 머리를 쓰다듬게 해주는 광경을 본 것이었다.

“!”

박 상궁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권 승휘 마마님, 장부 관련해 여쭐 것이 있습니다.” 하고 윤서를 빼내 거처로 온 다음 다시 예전의 박 상궁으로 돌아가 눈부터 매섭게 치켜떴다.

“조 상궁, 자네 대체 윗전을 어찌 모시는 겐가?”

박 상궁은 우선 조 상궁부터 혼을 내었다.

“우리 권 승휘 마마님이야 본시 홍시처럼 물러터진 양반이라 오만 군데 오지랖 넓게 친절하다지만, 자넨? 자네, 그 현주 아기씨 옆에서 샐샐 웃던 홍 상궁이 갑자기 비틀거리는 척하며 개새끼 발이라도 밟는 경우를 생각도 안 해 본 게야? 개새끼가 놀라서 아기씨 얼굴 물어 뜯으면. 그럼 그게 다 누구 탓이 되는 것인가?”

“아, 아이고 마마님!”

서슬 퍼렇게 추궁하는 박 상궁의 기세에 어디 가서 좀처럼 쫄려 본 적 없는 조 상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홍 상궁 마마님께서 지난 여름 백분 때문에 현주 아기씨가 저리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고 난 후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그래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조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며 거듭 사죄를 올렸다.

박 상궁이 궐 안에서 가지는 권위에, 조선의 십 대 부자 반열에 오르게 된 엄청난 재산의 위세에 눌린 것이었다.

“자네, 윗전이 사람 가려서 가까이 하시게 하는 것도 아랫사람이 해야 할 일 중 하나야. 여기저기 사람 심어 동태를 살피는 것만이 자네 할 일이 아니네!”

그렇게 조 상궁을 혼내면서 윤서도 덩달아 마구 혼낸 박 상궁은 조 상궁을 내보낸 후, 매화 무늬 고급 청화 도자기에 든 화장품을 슬그머니 내놓았다.

“이거, 밀랍과 진주 가루 넣어 만든 미백 화장품이오. 얼굴이 거칠어졌지 않소. 여시 같이 어여쁜 것들이 천지인 궐인데! 사내 다 똑같습니다. 피부 곱고 몸 늘씬한 여자 좋아하는 거, 저하라고 다르시겠소? 아니, 대체, 왜!”

젊잖게 윤서의 피부를 걱정해주던 박 상궁의 말이 점점 더 높아지며 짧아졌다!

“대체, 왜, 하필 그 홍 상궁 같은 것하고 말을 섞는 것이냐? 그 덜 떨어진 현주 아기씨 달래 개새끼 쓰다듬게 할 시간에 네 얼굴 피부나 좀 가꾸거라. 검은깨 뿌린 것처럼 기미 생기면! 그럼, 저하가!”

박 상궁의 말이 거칠어질수록 윤서는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아 언제 보아도 사람은 많으나 정말로 믿고 의지할 이 드문 이 궐에서, 대놓고 노골적으로 윤서를 아끼는 이는 박 상궁 마마님뿐이었다.

“뭘 잘했다고, 웃으시는 게냐? 예전의 네가 아니지 않느냐? 곧 지존의 자리에 오를 분이 아니신가 말이다!”

“금아가 산삼과 도라지 달인 해독 탕약을 꾸준히 마시면서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서 홍 상궁이 고맙다고 살갑게 굴기에 말 몇 마디 받아주며, 겸사겸사 강아지 한번 만져보게 해 준 것입니다.”

“하! 네가 전순의를 시켜 금아를 나아지게 한다고 홍 상궁이 네게 진심으로 고마워할 것 같으냐?”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마운 거 아닌가요?”

“사람! 애초에 제 새끼 아픈데도 왜 아픈지 자세히 캐볼 생각도 안 한 것이, 사람이냐?”

“마마님!”

역시, 박 상궁 마마님이시다.

지난 여름 즐겨 발라주던 백분 속에 수은과 납이 많이 들어 있어 금아가 발달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후, 홍 상궁은 사흘을 곡기를 끊고 울었다. 그리고 난 후 갑자기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확 달라져서 금아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런 홍 상궁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는 사람은 이 넓은 궐에 윤서 혼자뿐이었는데, 사람 보는 눈 정확한 박 상궁도 홍 상궁을 여전히 의심스럽게 본다는 사실에 윤서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권가 너 보면서 내 새삼 알았다. 넌 우리 세손 아기씨 대할 때도 그러하지만 네 뱃속 아기씨 대할 때도 말도 표정도 저절로 부드럽게 펴지고, 평소 먹는 것도 조심스럽게 다 가리고, 예뻐진다고 해도 그 귀한 사향 들어간 화장품 한 방울도 쓰지 않는데. 홍가가 어땠는지 아느냐?”

“어땠는데요?”

“배가 남산처럼 불러서도 저하 앞에 얼쩡거렸다고 반반한 나인들 반송장이 되도록 패고, 부푼 배를 하고도 피부 거칠어지지 말라고 백분을 처덕처덕 바르고 탕약을 마구 마신 여인이다. 그런 생각 없는 것이, 사람? 하!”

“알아요. 그래서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중이에요.”

“으응? 뭘 지켜봐?”

“나중에,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 게요.”

윤서는 홍 상궁이 금아를 부러 더 아프게 하여 관심을 받고자 하는, 일종의 뮌하우젠 증후군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수은과 납 중독 증상에 시달리는 금아가 온갖 약재가 들어간 탕약을 먹고 좀 나아져서 적극적인 치료를 중단할라치면 때마침 다시 아파진다는 전순의의 말 때문이었다.

“아이고 우리 현주 아기씨가 자꾸 배가 아프셔서, 홍 상궁 마마님이 잠도 못 주무시고 병구완 하시는데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진지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전순의가 애달프게 안타까워할 정도로 홍 상궁은 지극정성으로 딸을 간호했고, 그 때문에 금아를 자주 보러 가는 이향도 홍 상궁을 점차 가엾게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윤서는 선아 현주를 앞세우고 야시야시한 옷을 입은 채 이향의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양 사칙보다 홍 상궁을 예의 더 주시하고 있었다.

이향이 홍 상궁을 다시 안을까 봐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서 홍 상궁은 후궁 중 가장 많이 이향의 관심을 받았지만, 이번 역사에서 이향은 기존의 후궁 모두에게 혐오감 비슷한 거부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홍위의 죽음에 가담하였거나 방조한 후궁들.

이것이 이향이 대사헌을 지낸 세도 가문 출신 정 승휘나 이조참의를 지낸 홍 상궁 등 명문가 출신 후궁에게 은밀하게 품고 있는 혐오감이었다.

윤서가 홍 상궁을 주시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금아가 아이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비정하고 잔혹한지라 가까워지면 질수록 필연적으로 타인의 피를 손에 묻히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나의 피가 상대의 손에 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1세기의 보편적인 도덕 윤리와 심리 상담가로서 직업윤리를 엄격하게 준수하며 살던 윤서는 여기 15세 조선에서 후궁이 되고자 할 때 타인의 피를 손에 묻힐 각오를 이미 했었다. 이향과 홍위, 희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제 뱃속에 든 이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서 기필코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제거하는 데 지켜야 할 원칙이!’

원칙이 없으면 윤서 또한 윤서가 제거하고자 하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괴물과 싸우다가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기 위해 윤서가 세운 원칙은 단 하나였다.

‘아이는 해치지 않는다.’

권력 투쟁은 어른의 영역이지 아이의 영역이 아니다. 어른들의 싸움에서 아이가 희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윤서가 권력의 마수에서 끝까지 사람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었다.

‘그리고 금아는 아이다. 무해하고 연약한 아이.’

이향의 아이인 금아를 해치는 이라면, 그것이 어미인 홍 상궁이라도 그냥 둘 수 없다.

이것이 윤서가 지나치게 친절해진 홍 상궁을 주시하는 이유였다.

이런 윤서의 의심을 눈치라도 챘는지, 홍 상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신하고 겸손하게 만인을 대했다.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 매질하던 궁인들에게까지 친절해지고, 유모에게 맡겼던 금아도 밤낮으로 몸소 돌보고, 윤서에게도 늘 금아를 위해 애써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야기를 짓느라 매사 냉철하게 인간을 분석하는 유 승휘마저

“역시, 어머니의 은혜는 하늘 같다더니, 아이의 존재가 이런 기적을 낳는군요.”

감탄하며, 자신은 끝내 그런 심오한 모정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음을 한탄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인간의 인정 욕구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식의 건강한 성장을 막아서라도 비련한 여인으로 남편의 관심을 끌고자 한 여인도 보았던 윤서는 홍 상궁의 변화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삼십 년이 넘게 궐에 살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아온 박 상궁도 홍 상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것이 고마워서, 자신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는 듯해 기뻐서 윤서는 박 상궁의 손을 슬그머니 잡고 말했다.

“홍 상궁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금아 현주를 위해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으니까요. 그보다 말이에요.”

윤서는 세종께서 나가사키에 면포점을 내고 일본과 수양 대군의 동향을 살폈으면 하신다는 말씀을 전했다.

“면포와 더불어 일본 사람들이 차를 즐겨서 고급 찻잔을 아주 아낀다고 해요. 그러니까 찻잔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고급 도자기도 판매하도록 해요. 서책도 많이 없어 왜의 사신이 늘 금강경 같은 것을 청하니 여러 불경과 논어, 주역 등의 성리학 책도 유통하기로 하고요. 이 모든 초기 작업에 필요한 자금은 모두 다 내수사에서 빌려주신답니다.”

윤서의 말에 박 상궁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으응? 빌려준다고? 나라를 위한 일인데? 그럼, 나중에는?”

“내수사에 초기 자금 다 갚고 난 후에 그쪽 상단의 소유주는 이 아이로 해요.”

윤서가 부른 배를 쓰다듬어 보였다.

“변기가 넘치도록 황금 똥을 싼 이 아이가 대일 무역을 거대하게 키우는 상단주가 될 것이에요.”

“······.”

박 상궁은 부푼 배를 쓰다듬는 윤서의 손을 물끄러미 보시다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갑자기 윤서의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그래. 그게 낫겠다. 아기씨가 사내아이라면 기반을 해외에 두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지. 내 그리될 수 있도록, 나중에 우리 애들도 다 거기서 아기씨 모시며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각별하게 신경을 쓰마.”

윤서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안다는 듯 토닥거리는 박 상궁의 손길은, 지아비 이향의 손길과는 또 다르게 윤서를 지탱하는 따스함이었다.

*****

마침내 단오 연회 날이 되었다.

열흘 전 큰비가 내린 후 흙탕물로 변했던 강물도 다시 맑아졌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부시게 푸른 화창한 날이었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는 조선의 백성들은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날부터 거적을 쓰고 밤을 새웠고, 또 새벽부터 십 리 길, 이십 리 길을 꼬박 걸어 와 다리를 건너 백사장과 한강진 위의 언덕까지 그득 메웠다.

“와, 정말로 사람이 많군요. 제 손 꼭 잡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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