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화. 수양 대군과 한명회의 유구국 행 (2)
“지금 대군 자가께서 하셔야 할 일은 한확의 가문에 암암리에 맺었던 혼인 약조를 반드시 지킬 것이라 확인해주는 서신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절을 올린 후 자리에 앉자마자 한명회가 말했다.
“···왜, 그러한가?”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오명을 단 가문과 왜 혼인해야 한단 말인가.
수양 대군의 물음에 한명회가 결연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환난의 시기에 내미는 손길이 참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한확의 누이 공신 부인은 어쨌거나 살아서 명 황실 내에 제법 괜찮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조선 팔도에 명 황실과 그만한 끈을 가진 가문이 있습니까?”
수양 대군이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자네 가문이라서 이렇게,”
“아이고, 대군 자가. 권력 앞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도 남보다 못해지는데, 그깟 9촌이 무슨 대단한 인연이라고요.”
“······.”
“세상의 평이란 허망한 것이라, 권력 앞에선 이슬처럼 사라질 것들입니다. 공신 부인이 명 황실 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되면 오늘 손가락질 하던 것들이 한확의 발이라도 핥으려 들 것입니다. 게다가 대군 자가껜 명분이 있습니다.”
“무슨, 명분?”
“한번 맺은 혼약의 약조를 지키겠다는 명분 말입니다. 명분을 가지고 움직이니 전하께서도 내심 기특해하실 일이고, 한확 측에서는 감읍할 일이고, 또 장차 공신 부인이 힘을 가질 때 대군 자가 측에 기꺼이 힘을 실어줄 일이지요.”
“오호!”
수양 대군은 눈앞이 불현듯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세손 홍위가 태어난 후 그 아이가 십 대에 절명한다는 점괘만을 믿고 홀로 더듬거리며 보위를 향해 나가는 막막한 기분이었는데, 한명회의 몇 마디를 듣는 순간 유방이 장량을 얻은 것처럼 든든해졌다.
“여봐라, 이리 귀한 손이 오셨는데 어찌 술상을 내오지 않는 게야?”
수양 대군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곧 싱싱한 생선구이와 해물을 그득 올린 주안상이 배에 싣고 온 향온주와 함께 나왔다.
몇 번의 술잔이 돌고, 흥이 오른 수양 대군이 한명회에게 물었다.
“내가 자네를 만나려고 이리 험한 곳까지 쫓겨왔나 보오.”
“맞습니다. 소인은 앞으로도 몇 년 더 외방을 떠돌아야 할 팔자지요. 그래서 평소 대군 자가를 흠모하였어도 뵈올 수 없었습니다.”
수양 대군이 사대문 안 한양에만 머물렀다면 만날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새옹지마라더니, 정말로 혜민국에서도 쫓겨나 이리 국외로 내몰린 것이 전화위복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자네가, 운세를 보는가?”
“예. 운세를 읽을 줄 압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큰 나무 밑에 평생 머물 팔자라 금상 전하의 그늘 아래 옷깃 한번 제대로 풀지 못하고 사시다가, 그늘이 사라져 햇살 아래 서게 되면, 으흠······.”
무슨 뜻인지 아시지 않느냐는 듯 말끝을 흐리며 한명회가 술을 마시는 척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세자 저하의 사람들은 거의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로 책상머리 서생들입니다. 흔히들 말 타고 세상을 얻었으나 말 등에 앉아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는 말로 나라가 세워진 후 학문과 학자를 키워내야 한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말 등에서 내려선 자들, 그래서 말 타는 법조차 잊어버린 자들은 언제든 말 탄 자들의 발굽에 짓밟힐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 흥망성쇠의 원리입니다.”
“오오!”
세자 형님의 학문적 깊이와 안평 대군의 빼어난 예술적 조예에 깊은 열등감을 가져온 자격지심을 교묘하게 위로하는 말에, 수양 대군의 등이 저절로 꼿꼿하게 힘을 얻었다.
그러다 문득 수양 대군은 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나눴던 권가의 말을 떠올렸다.
누구와 비교하여 더 잘나길 추구하지 말고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성취 속에서 기쁨을 찾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되라고 서늘한 눈빛으로 말하던 권가의 말이, 왜 하필 이 순간에 떠오르는가.
권가를 얻은 후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듯 단정하던 형님의 옷차림이 때때로 느슨해지고, 늘 눈치를 살피던 조카 홍위도 늠름한 왕재를 뽐내고 있다!
그리고 대군이 너무 큰 정치적인 쓰임새를 가지면 안 된다는 신하들의 염려에도 아랑곳없으시던 아바마마께선 나와 안평, 임영을 다 외방으로 내치셨다.
“자네, 형님께 후궁 하나가 새로 들어온 것을 아는가? 그 여인이 왕손을 잉태한 것도?”
“!”
여유 만만하게 풀어져 있던 한명회가 갑자기 신중하게 얼굴을 굳히고 손가락을 짚어보면서 무엇인가를 따져 보았다.
“그래서 진성이 갑자기 빛을 발하고 달에 흰 서기가 서렸던 것이로군요. 세자 저하께선 본시 마음 나눌 여인이 없이 고독하게 사실 운명이었는데 작년 봄부터 갑자기 자미원 안에 제왕의 여인을 상징하는 진성이 반짝거리더이다.”
“···그럼, 그 여인이?”
형님과 홍위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는 말인가.
수양의 물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한명회가 너털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최근의 일이 그럼 그 여인의 솜씨겠군요. 허나 대군 자가. 타고난 팔자를 바꾸는 일은 심대한 원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저들이 반짝거리는 빛에 취해 있을 때 자가께선 납작 엎드린 척하면서 사람을 사면 되는 일입니다. 먼저 유구국과의 교통을 이뤄내고, 그를 통해 무역 규모를 늘리면서 선단을 키우십시오. 또 여기 일본의 여러 세력과도 더욱 관계를 공고히 하시고요.”
“그러면?”
“그러면, 십 년 안에 자가의 때가 올 것입니다. 제가, 이 한명회가, 자가의 때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때가 온다! 마침내, 나의 때가!
수양 대군은 벅찬 설렘으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한명회에게 귀한 술을 가득 따른 잔을 건넸다.
과거를 급제하지 못해 자력으로는 도저히 중앙 권력에 접근할 수 없어 울분에 찬 사내와, 출생의 한계로 꿈을 이룰 수 없어 원통한 사내가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
“또옹?”
윤서가 뱃속 아기의 태몽이 똥 싸는 아기였다는 사실을 말해주자 홍위는 붓을 놓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곤 이내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똥따개가 동생이 되는 거야?”
(똥싸개가 동생이 되는 거야?)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아지 이씨 부인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똥싸개가 아니고요. 부자 아기가 태어나는 태몽이랍니다. 그래서 세자 저하께서 태명도 ‘금똥’이라고 지어주셨잖아요.”
“···정말니야?”
(···정말이야?)
홍위가 윤서에게 다시 물었다.
“예, 이 아기는 장차 크게 무역하면서 우리 세손 각하의 치세를 재물로 뒷받침할 것입니다. 평소에는 얌전한데 돈 들어온 장부 계산할 때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거든요.”
“휴우, 다행이다, 건 승위. 똥따개 동생은 시져!”
(휴우, 다행이다, 권 승위. 똥싸개 동생은 싫어!)
“하지만 아기들은 다 똥을 싸는 걸. 홍위 너도 어렸을 적에 기저귀에 똥을 쌌어.”
한참 집중해서 칠정산 역법 문제를 플고 있던 희아가 불쑥 말했다.
“안냐. 나는 똥따개 안냐.”
“똥싸개였다니까. 우린 모두 다 똥싸개였다고!”
“안냐! 눈난는 똥따개였떠도 나는 안냐!”
둘은 서로 똥싸개였네 아니었네 입씨름을 하며 투닥거리기 시직했다.
아지 이씨 부인이 둘을 보고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군주 자가도, 또 우리 세손 아기씨도 정말 많이 밝아지셨네. 전에는 서로 멀뚱하니 쳐다만 보고 말도 애들답지 않게 너무 격식을 차려 말하더니. 요새는 눈만 마주치면 아주 말싸움을 해대시니.”
“예, 정말 다행입니다. 자, 두 분 아기씨들! 그만 말다툼하시고, 푸시던 문제 얼른 마저 풀고 주무셔야지요. 일찍 자야 키가 쑥쑥 큰답니다.”
윤서가 말하자 희아는 홍위에게 메롱 혀를 쑥 내밀어 보이고는 윤서에게 말했다.
“돈을 잘 벌려면 수학을 잘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럼, 내가 아기에게 수학 가르쳐 줄게.”
“예. 그런데 아기씨처럼 금방금방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친절하게 가르쳐주셔야 해요.”
“···응. 아기니까?”
“눈나는 친져하지 않아.”
(누나는 친절하지 않아.)
희아가 자신 없게 말하자 홍위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윤서에게 일렀다.
“눈나는 나한테 수학 못 한다고 ‘밥보’라고 했져.”
(누나는 나한테 수학 못 한다고 ‘바보’라고 했어.)
“아니, 내가 곱셈을 가르쳐 주었잖아. 그런데 홍위 네가 올림수를 못 하잖니. 몇 번을 가르쳐주었는데. 십이 넘어가면 그 위의 자리에 일을 더해 주어야 한다니까.”
“나는! 아직, 아기야서 그래. 아기!”
(나는! 아직, 아기라서 그래. 아기!)
“흥, 이제 권 승휘 아기 태어나면 이 아기가 아기고 너는 형님인데. 형님이 되어서 올림수도 못하면!”
“···헝님 되믄, 할 뚜 있떠.”
(···형님 되면, 할 수 있어.)
홍위가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자가. 우리 세손 아기씨는 이제 고작 네 살이신데 세 자리 곱셈을 틀릴 수도 있지요. 자가께서는 아홉 살이시잖아요.”
윤서가 위로하면서 두 팔을 벌리자, 이번에는 홍위가 희아에게 메롱 혀를 내밀고 윤서에게 달려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불룩한 배에 손을 올리고 속삭였다.
“아기야, 수학, 헝님이 친져하게 가이켜 두께.”
(아기야, 수학, 형님이 친절하게 가르쳐 줄게.)
“혹시, 태어나는 아기가 현주님이면 어쩌지요?”
윤서가 장난스럽게 묻자, 홍위는 진지한 얼굴로 답을 했다.
“그염, 옵빠가, 옵빠가 친져하게 가이켜 두꺼야. 나는, 여동댕이 더 이쁫거 가타.”
(그럼, 오빠가, 오빠가 친절하게 가르쳐 줄 거야. 나는, 여동생이 더 예쁠 거 같아.)
“안 돼. 똥을 많이 싼 아기는 여자애면 좀 그래. 난 남동생이 더 좋아. 권 승휘보다도 훨씬 더 돈을 많이 버는 남동생. 수학 잘하는 남동생.”
“눈나!”
“자, 두 분! 내일 새벽에 강원도에 순행 나가시는 저하 배웅하시려면 지금 주무셔야 합니다.”
윤서는 다시 투닥거리는 아이들에게 말하자, 홍위는 짐짓 아쉬운 듯 “아유, 수학 내일 해야게따.” 말했다.
희아는 풀던 책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군주 아기씨. 그만 풀고, 주무셔야지요.”
“세 문제만 더 하면 돼. 내일 스승님께 여쭤볼 것이 있는데 먼저 좀 풀어보고.”
희아는 윤서가 안 된다고 말할까 봐 먼저 일어나 유모 백씨를 부르며 재빨리 방을 나갔다.
홍위는 윤서의 배에 대고 속삭였다.
“아기야. 코 자고, 뚝뚝 크고. 내일 보자.”
(아기야. 코 자고, 쑥쑥 크고. 내일 보자.)
그리고 몸을 일으켜 윤서의 귀에 또 속삭였다.
“사질은, 씩찍한 남동댕도 죠아.”
(사실은, 씩씩한 남동생도 좋아.)
혹시 예쁜 여동생만 좋다고 해서 윤서 마음이 상할까 봐 남동생도 좋다고 속삭인 후에야, 우리 홍위는 아지 이씨 부인의 손을 잡고 거처로 돌아갔다.
그날 밤.
이향은 삼경이 거의 다 되어서야 윤서의 거처로 왔다. 경기도와 강원도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상태를 점검하고, 새로 판 저수지와 보를 둘러보는 닷새 일정의 순행을 나가기 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왜, 먼저 자지 않고? 피곤할 터인데.”
“깜빡깜빡 졸고 있었어요. 어서 이리 앉으세요.”
윤서는 앞에 앉은 이향의 머리에서 정자관을 빼고 상투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빗을 들어 천천히 이향의 긴 머리카락을 빗겨주기 시작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윤서가 이향에게 해주는 의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