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화. 벽서를 보신 세종께서는 (2)
“그 지문이란 것으로 벽서를 써 붙인 무리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벽서의 배후를 찾아내기 위해 여기 왔음을 숨기지 않으시는 세종을 부축하고 사무실 문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짧은 순간, 윤서는 전하의 복잡한 심정을 재빨리 읽어냈다.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애민 군주이신 세종은 자신이 만든 문자로 고충을 호소하는 벽서에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시면서도,
‘처음에는 위대하였으나 절대 권력에 취해 점차 독선적으로 변해간 수많은 위대한 군주들처럼, 감히 군주에게 공식적으로 요구를 하기 시작한 백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편으로는 곤혹스러우실 것이다.’
더구나 세종께서는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을 거칠게 몰아쉬신다. 신체가 건강하고 활력이 있어야 새로운 사상과 세태를 포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는데.
‘홍위더러 할바마마께 승마를 가르쳐주십사 조르게 해야겠네.’
생각하며 윤서는 세종의 팔을 더욱 단단히 부축하고, 공손하게 답을 올렸다.
“벽서를 쓴 자들을 찾아내긴 어려울 것입니다.”
“왜, 어렵겠느냐?”
세종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윤서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으셨다. 백내장 끼로 백태가 낀 각막에도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벽서를 쓸 때 종이에 닿을 만한 부분에 모두 천을 두르라고 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윤서는 세종의 시선을 흔들림 없이 받아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추론을 말씀드렸다.
“벽서가 전하의 새 문자로 써졌습니다, 전하. 배우기 쉽다고 소문이 난 글자니 글자를 모르는 자들조차도 신기해하며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해서, 무수히 많은 손자국이 찍혔을 것이니 설사 지문을 뜬다 하더라도 누구 것인지 일일이 대조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하냐?”
“예, 전하.”
“권가 너는 매사에 다, 답을 가지고 있구나.”
세종께서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을 때 마침 문 앞에 다다랐다.
내관 둘이 문을 열자 오후 햇살이 길게 사무실 안으로 쏟아졌다.
햇살 속 부유하는 뿌연 알갱이들 속으로, 그간 의자와 책상을 만들면서 기록한 연구 장부, 재료 구입 장부와 물품 판매 장부, 직공에게 월봉을 지불한 지출 장부 등을 모두 펼치고 상세히 살피고 있는 내관 셋과, 그 앞에 놓인 세 장의 벽서가 보였다.
“저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답을 가지고 있느냐?”
세종께서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기시며 윤서에게 하문하셨다.
윤서는 여전히 세종의 팔을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평온한 어조로 고했다.
“예, 전하.”
“!”
“전하께서 만들고자 하시는 세상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해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조 내관, 전하를 모시세요.”
윤서는 서너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대전 내관 조창의에게 세종의 부축을 맡겼다. 그리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내관들이 살피고 있던 장부들 중 직원에게 지불한 월봉 기록 장부를 가지고 세종 앞에 섰다.
“전하, 이 장부를 보십시오.”
내관들 앞에 놓인 벽서는 아예 보지 못한 것처럼 장부만 들고 와 펼치는 윤서를 세종께선 그저 무표정하게 지켜보셨다. 네가 무슨 말로 어떻게 해명하는지 지켜보시겠다는 태도였다.
윤서는 노비들에게 나간 월봉을 하나씩 짚어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모지리(毛地里)는 우리 공장에서 제일 솜씨가 좋은 목공 장인입니다. 모지리는 여기서 받은 쌀 한 섬을, 계산하기 쉽게 가정하겠습니다, 몽땅 이웃 혼자 사는 과부에게 주고 푸성귀와 찬거리를 사서 먹었습니다. 이웃집 아낙은 받은 쌀 한 섬을 건넛집 총각에게 몽땅 주고 한 날 내내 나무를 받아서 썼습니다. 나뭇꾼 총각은 받은 쌀 한 섬을 포목점 주인에게 주고,”
“그만, 그만. 말하고 싶은 요지만 밝히거라, 권가야.”
“예, 전하. 제가 내준 것은 쌀 한 섬인데 그 한 섬이 돌고 돌아서 몇 섬처럼 되었는지, 그것으로 몇 집의 생계가 해결되는지 보십시오.”
“아!”
무엇인가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세종께서 눈을 크게 뜨셨다.
“예, 전하.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그러한 것입니다. 제가 내주는 월봉 쌀 한 섬이 돌고 돌아 쌀 다섯 섬이 되는 것처럼,"
"재화가 돌고돌면 더 많은 재화가 생겨난다!"
"예, 전하. 이것이 상공업의 힘입니다. 전하께서 사마천의 사기 제후편을 읽고 군주의 심리와 성공과 실패에 대해 쓰라고 명하였던 바는 자료 부족으로 유보하였지만, 대신 열전(列傳) 속의 여러 빼어난 신하의 기록에서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 중 관중은 곳간이 풍족해야 예의를 알고 의복을 갖춰 입을 수 있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고 하며 상공업의 발전을 강조하였습니다.”
윤서는 백성들이 예의와 명예를 알아야 사회 규범을 지킬 수 있고, 그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공업과 상업을 통해 부가 흐를 수 있어야 함을 상세히 말씀드렸다.
실은 이것이 윤서가 조선에 심고 싶은 자본주의였다.
“저와 같이 물품을 만들어 팔면서 임금을 주는 이들이 많아야 전하께서 추진하신 화폐의 유통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입니다. 이전의 화폐 유통이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로 살만한 물품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만한 물품만 많다면 가지고 다니기 어려운 쌀과 포목 대신 간편한 화폐를 모두 반길 것입니다.”
“으흠. 권가, 너는······.”
말씀을 하시려던 세종은 입을 꾹 다물고 조 내관을 돌아보았다.
조 내관이 낮은 목소리로 재빨리 고했다.
“필체가 일치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전하.”
윤서는 조 내관의 말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세종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아는데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해 놓을 리가.
벽서를 쓴 자들 셋은 박 상궁의 조직 사람들로 모두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명나라 사신단을 따라 귀국 중인 노산대 일행에 합류하기 위해 의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오백 명이 넘는 거대한 사신단이 한양에서 북경까지 험한 길을 왕복하는 도중 병이 나고 심지어 객사하는 자까지 수시로 생겨난다. 그러니 존재감을 감추는데 능숙한 자 셋이 슬그머니 휘하 상단에 끼어들면 언제 어디서부터 함께 했는지 알기가 어려운 점을 노린 것이었다.
“······.”
세종께서는 조사를 멈추고 허리를 조아린 내관 셋과,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으나 실은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듯 수를 쓰는 권윤서를 바라보았다.
“하! 권 승휘.”
“예, 전하.”
“문서를 좀 보자. 어찌 일을 하고 있는지.”
전하께서 말씀하시며 허리춤에 매단 붉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사슴 가죽 속에 들은 안경을 꺼내셨다. 거북이 등껍질로 테를 만들고 알은 수정을 갈아서 만든 돋보기 덕에 세종께선 요새 한결 글 읽으시기가 수월해지셨다.
습도와 온도를 조절해가면서 오동나무의 휘어짐 정도와 강도를 실험한 기록을 읽으며, 세종은 권가가 가슴이 뻐근하도록 대견하면서 한편으로는 등줄기가 서늘하도록 섬찟하기도 하였다.
권가는 여러모로 지나치게 치밀하고 지나치게 총명하였다.
같은 편이라면 더없이 든든한 신하이자 가족이겠으나, 입장이 갈려 적이 된다면······!
“공장을 좀 안내하겠느냐?”
“예, 전하. 나무를 갈아서 매끄럽게 하는 작업도 있어서 먼지가 많이 나니, 여기 고운 천으로 용안을 가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윤서가 건넨 천을 조 내관이 세종의 얼굴에 둘러드렸다.
윤서는 다시 세종을 부축하고 목 공장 여기저기를 안내하였다.
“윤서야, 네 생각에는 벽서를 쓴 자들이 누구인 것 같으냐?”
높은 온도에서 쪄낸 오동나무 등판을 등의 굴곡에 맞게 구부러지도록 틀에 넣다가 임금을 보고 엎드린 직공들 사이를 지나며 전하께서 지나가는 말처럼 물으셨다.
“잘은 모르겠으나, 방납이 가져오는 폐해를 근심하는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왜 하필 지금 방납 업자와 고리대를 놓은 자들을 고발하고 나섰다고 생각하느냐?”
“무엇인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슨, 위기감?”
두 사람은 서로가 뻔히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그러면서도 빠짐없이 공장 곳곳을 눈에 담으며 사이좋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나 장차 다가올 일이 전하께서 백성을 위해 이룩하신 일에 반하는 반동적인 것이라 예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으흠.”
윤서의 대답에 세종은 명나라에서 돌아오고 있는 한확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자가 가져오는 것이 황제가 하사했다는 옷 몇 벌뿐만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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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공장에서 돌아와 온양에서 공수해 온 온천물 목욕탕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그신 전하께서 세자를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한확이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냐?”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가정하고 물으시는 물음이었다.
이향은 윤서의 사람을 통해 파악한 내용과, 자신이 따로 파견한 내관을 통해 파악한 내용을 함께 전하께 고했다.
“선덕제의 붕어 후 어린 황제가 즉위하지 않았습니까? 어린 황제는 왕진이라는 이름의 태감에게 휘둘려 조정 일을 제대로 돌보고 있지 못하고, 저 위쪽 달단과 마시(馬市)를 둘러싸고 긴장이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명과 달단이 충돌하게 되면 우리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소자가 이번에 사신단을 들여보내면서 우리 조선 출신으로 명의 환관이 된 정동 등을 접촉하여 명 황실 내부의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이향은 정동을 통해 한확의 누이인 선덕제의 후궁 공신부인 한씨가 명 황실과 조선 왕실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싶다는 서신을 한확 편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고했다.
“하! 그래서, 권가가.”
세종은 일의 본말을 바로 눈치 했다.
“이미 계양군을 사위로 주었거늘 뭘 더 욕심을 낸다더냐.”
“계양군은 서자니 이제 왕실의 적통을 욕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 감히 죽은 황제의 후궁 따위가 조선 왕실의 일에 입을 보태다니, 한씨 일족의 방자함이!”
왕의 외척이 발호하면 무슨 일이 생겨나는지 일찍이 태종으로부터 배운 바가 많은 세종께서 크게 진노하였다.
“방납 비리에 관여된 자들을 모두 다 철저히 색출하거라. 수족 노릇을 한 말단의 상인 무리뿐 아니라 지방 수령에게 알력을 넣어 방납 업자들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위의 대가리들도 철저히 색출하거라.”
“거의 다 관여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럴 것이야. 그러니 본보기를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예, 전하. 신하들도 오랫동안 요구해 온 사안이니 명분도 있습니다.”
새봄, 한양의 세도가들이 바싹 긴장하게 되었다.
벽서에서 고발한 방납 비리에 대해 신하들이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주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곧 방납으로 거대한 부를 쌓아온 방납 업자들이 줄줄이 의금부에 소환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마포 나루를 중심으로 세곡선을 운행하는 조운업자와 중앙의 세도가들을 대리하여 활동하는 재산 관리 노비와, 또 이들과 결탁한 상단주들이었다.
압록강을 넘어 의주 성으로 들어온 한확을 기다리고 있는 건 한양의 본가에서 달려온 청지기였다.
황제가 하사한 면복 두 벌, 상복 한 벌과 함께 누이의 서신을 바쳐 딸을 세자빈으로 만들 단꿈을 꾸고 있는 한확에게 청지기가 희게 질린 얼굴로 고하였다.
“대감 마님, 외방에 나가 있는 노비들이 줄줄이 잡혀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