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화. 벽서를 보신 세종께서는 (1)
‘세자가 주동했거나 방조하고 있다.’
방납 업자들과 식리(고리대) 업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한 답을 유보한 채 천추전으로 돌아왔던 세종은 천 상궁이 내온 차가 식기도 전에 아들의 개입을 확신했다.
잡고자 하면 벽서를 붙이는 자들을 못 잡을 리가 없었다. 세자 향은 지난 해 여름부터 금군과 도성 수비군의 질을 높이고 무기를 개량하는 데 힘을 쓰는 동시에 내관으로 구성된 친위 호위대의 숫자를 늘리고 있었다.
‘대리청정을 한 지 불과 한 해가 가기도 전에 세자는 벌써 이렇게 탄탄하게 국정을 장악하고 있구나.’
사정전 안에서 세자는 벽서에 대해서는 전하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공손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만 달리 말하면 입을 열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황희를 비롯한 신하들이 세자의 의중을 대신하여 열심히 고하고 있었으니까.
날로 삐걱거리는 몸과 침침해지는 눈으로 밤낮없이 정사를 보는 것이 힘겨워 아들에게 조정을 넘길 때 이렇게까지 빨리 자리를 잡을 줄 몰랐다. 그래서 대견하면서도,
‘청명 전에 따서 덖은 차일 텐데도 어째 이리 맛이 쓰다더냐.’
여러 복잡한 심사가 햇차의 상큼한 맛을 가린다는 사실을 외면하며 세종은 마포 나루와 광나루, 운종가에서 뜯어왔다는 벽서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또 확신했다.
‘문자의 힘을 아는 자가, 배후에 있다!’
배움이 짧은 자들의 선동은 파급력을 높이는 데 급급해 무턱대고 센 말부터 지른다. 이를테면 훗날을 어떻게 감당할지에 대한 정교한 계산 없이 일단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같이 강렬한 말로 가슴에 불을 질러 사람을 끌어모으고 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경계심을 품은 권력자에게 떼죽음을 당하고야 마는 것이 대개의 수순이었다.
그런데 이 벽서의 내용은 상당히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다. 처음부터 고발하는 대상이 방납 업자로 특정되어 있고, ‘지난해 요역의 대가로 전하가 나눠주신 쌀과, 구휼미인 환곡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굶어 죽었을 것이다.’ 라는 말을 넣어 임금의 은혜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벽서만 내걸리고 따로 소요가 없는 것 또한 이 벽서의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
새 문자가 홍위 같은 꼬마들도 며칠 만에 깨칠 정도로 쉬운 것은 맞으나 반포된 지 고작 삼 개월, 이 짧은 시기에 방납의 수탈 대상이 되는 농부들이 문자를 배우고, 또 배운 문자로 제 생각을 만천하에 밝히는 대담한 일을 벌일 리 없다고 세종은 확신했다.
새 문자를 배워 생각을 문자로 표현할 만한 이들은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조정 대신들과 그 가족, 여기에는 여학당을 다니는 반가의 여식도 포함된다.
그리고 의서를 정음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혜민국의 의녀들. 또 최근 공무 문서에 권가가 만든 도표와 표식을 도입하기 위해 하급 서리들과 내수사 소속 공노비들이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직은 날이 서늘한지라 따스하게 데운 구들 위 바닥에서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누가 이 벽서를 기획하고 붙이고 있는가를 따져나가던 세종께서는 뻣뻣해진 등을 펴기 위해 잠시 허리를 들썩거렸다.
“!”
이 의자.
권가가 ‘인체 공학’을 도입해 만들었다면서 새해 선물로 바친 이 앉은뱅이 의자!
보통의 의자는 밑판과 등받이를 기역자를 거꾸로 한 각진 형태로 붙인다. 그런데 권가가 운영하는 목공장에서 만드는 이 의자는 오동나무에 습기와 열을 가한 상태에서 허리 곡선에 맞게 등받이를 구부려서 만든 까닭에 앉으면 등이 등판에 딱 닿으면서 허리가 아프지 않고 아주 편안했다.
그리고,
“아바마마, 권 승휘가 운영하는 목 공장의 공정이 상당히 체계적입니다. 도자기를 굽듯 커다란 진흙 가마를 만들고 그 안에 얼마만큼 물을 뿌려 습도를 높이고, 또 석탄으로 얼마만큼 온도를 높여 오동나무 판을 찔 때 가장 단단하게 나무판을 구부릴 수 있는지를 실험하여 의자를 만듭니다. 그 실험 결과를 아바마마의 문자와 권 승휘의 도표로 일일이 기록해가면서 여러 시제품을 만들길 거듭하며 키와 체형에 따라 여러 종류의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소자 또한 여기 군기시에서 톱니바퀴나 무기를 제작하는 방식도 같은 방식으로 실험하고 개선할 수 있게 야장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달 전 군기시에서 시찰을 나갔을 때였다.
금성 대군이 희아가 발견한 그 ‘서로소’로 톱니 개수를 정하는 것과, 철과 황동을 얼마의 비율로 배합해 바퀴를 만들고 있는지 설명하면서 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권가는 늘 내 문자를 이야기할 때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감격하곤 하였다.’
배우기 쉬운 표음 문자인 정음이 무엇을 가져올지 이미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문자는 상상하고 성찰하게 하는 힘이 있어 백성들에게 지혜를 줄 것이며, 또한 전하의 치세를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던 권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이 문자를 만들고자 마음 먹었을 때 가졌던 바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듯하던 자가 바로 권가였다!
“여봐라, 동궁에 가서 권 승휘더러 건춘문 앞으로 나오라고 이르거라. 함께 가 볼 곳이 있으니 편하게 차리고 오라고 하고.”
명하신 전하께서는 또 대전 내관 조창의를 불러들였다.
“너는 지금 필적을 잘 살피는 내관 몇을 데리고 돈의문 밖 권 승휘의 목 공장으로 달려가거라. 문서를 보관하는 곳을 봉쇄하고 내관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서와 이 벽서의 필체를 대조하여 같은 자가 쓴 것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또한 내관을 넉넉히 데려가 목공들이 하던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외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거라.”
*****
“마차가 참 평안하지 않느냐? 전에는 이 속도로 달리면 꽤 흔들렸는데 지금은 훨씬 덜 해. 왜 그런지 아느냐?”
점심을 먹고 나서 희아에게 구슬 주머니에 든 빨간 구슬과 파란 구슬 개수를 추론하는 확률 문제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대전에서 내관이 왔다.
갑자기 건춘문 앞으로 부르신 전하께서는 이향과 금성 대군이 만들어 바친 마차에 오르라고 명하셨다.
아무리 시아버지시라고는 하나 밀폐된 마차 안에 대각선으로 마주 앉아서 가려니 굉장히 어색했다. 그나마 옆에 희아가 함께 앉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전에는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서른두 개의 살을 박아서 바퀴를 만들었는데, 지금 바퀴는 살을 중심에서 엇갈려서 이중으로 대었다 들었습니다.”
이향이 얼마 전에 홍위와 희아와 함께 마차를 태워주면서 설명해 준 대로 윤서가 읊었다.
사실 윤서는 그 원리가 힘을 분산한다는 것 외에 어떤 원리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문송한 심리학도니까. 아직 어린 홍위도 폴짝폴짝 뛰어보며 마차의 평안한 승차감을 즐길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를 가르치면 가르치지 않은 것까지 홀로 연관지어 깨닫는 수학 천재 우리 희아는 눈을 빛내며 “살을 이중으로 엇갈려 끼우면 바퀴에 연결된 축에 전달되는 힘이······.” 어쩌고 하면서 기물 덕후인 아버지와 신이 나서 한참 이야기를 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할바마마, 살을 이중으로 엇갈려 대면 바퀴가 받는 무게가 골고루 분산되어서 축에 전달되기 때문에 흔들림이 적은 것입니다.”
바퀴로 동력을 전달하는 분야에 천재가 되어가고 있는 희아가 열심히 설명하자 세종께서는 흡족하게 눈이 파묻히도록 웃으셨다.
“그래, 그래. 희아야. 그러한 원리란다.”
“예, 할바마마.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희아가 문에 바람을 막기 위해 드리운 천을 들추며 물었다.
“지금 육조 거리를 지나 동쪽으로 틀었으니, 할마마마, 태평관에 가는 것이옵니까?”
“아니다. 우리 권 승휘가 만들어준 의자가 너무 편하고 좋아서 제작 공정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금성 대군 삼촌이 할아비한테 목 공장 칭찬을 많이 했거든.”
“!”
윤서는 소녀를 향해 하회탈처럼 웃어 보이시는 세종께서 벽서의 배후를 알아차리셨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옳았다.
“공장의 직공들이 서른 명이 좀 넘는다고 들었다. 승휘로 책봉될 때 받은 노비들인데 일반적인 새경 외에 따로 월봉을 준다지?”
“예, 전하. 신참 궁녀의 월봉과 같이 계산하여 쌀 한 섬과 콩 한 말, 소금 한 되씩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따로 쌀 다섯 되씩을 적립해주고 있다고 들었다. 원래 노비들에게 줄 쌀 두 되에 권가 네가 석 되를 얹어서. 그걸로 나중에 양인으로 속량을 시켜 줄 예정이라지?”
“···예. 그것도 아셨습니까?”
“그럼 대략 얼마 동안 모으면 속량을 할 수 있겠느냐? 요새 사내 노의 가격이 면포 이백 필, 그럼 쌀로는 일백 섬인데. 희아야, 계산해 보겠느냐?”
그러자 희아가 잠깐 윤서를 보더니 불쑥 말했다.
“쌀 한 섬은 열 되니, 쌀 백 섬은 일천 되에요, 할바마마. 일천을 권 승휘가 한 달에 모아주는 다섯으로 나누면 총 이백 개월이 나옵니다.”
“그래, 그럼 사내 노가 몇 년이 걸려야 양민이 되는 것이냐?”
“16년하고 6.6개월, 대략 16년 7개월이 걸립니다.”
희아가 암산으로 답을 하자 세종께서 “아이고, 똘똘하구나.” 칭찬하시고 다시 윤서에게 물으셨다.
“권가 너는 그들에게 17년이 거의 걸려서 양민이 되게 해주는 것이냐? 그 전에 그들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들은 노비냐, 양민이냐?”
“전하, 저는 전하께서 노비의 수를 규제할 방법을 과거의 시제로 내실 정도로 노비 신분이 세습되며 숫자가 느는 것을 염려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하의 고귀하신 뜻을 따라 승휘로 책봉되면서 받은 노비를 시세에 따라 양민으로 속량하고, 그 사이에 아이를 낳더라도 노비로 삼지 않을 계획입니다.”
“그으래?”
“예, 전하.”
“노비가 재산이 되는데도?”
“노비를 팔아 재물을 쌓는 것보다 그들에게 월봉을 주면서 만들어 파는 물품이 훨씬 더 큰 재물을 벌어주기 때문입니다. 양민이 되면 잡과를 비롯하여 나라에서 시행하는 여러 종류의 과거도 볼 수 있고, 그래서 그들이나 그 자손이 관원이 되면 제가 하는 일에, 전하의 조선에 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래. 원래 과거는 양민이라면 누구나 치를 수 있지.”
이 말씀을 끝으로 세종께서는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셨다.
원래라면 말을 달리는 것과 비슷하게 속도를 낼 수 있는 마차지만 마차의 앞뒤로 말을 탄 금군이 빼곡하게 서고 그 뒤로 또 걸어서 따라오는 내관과 궁인들이 있어 마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거의 삼 각(45분)이 지나서야 마차는 돈의문 밖 윤서와 박 상궁 소유의 목 공장에 다다랐다. 그 옆의 작은 공장은 희아가 명목상 주인으로 있는 조립품 공장이었다.
“!”
조 상궁과 매금이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서니 공장 주변을 대전 소속 내관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먼저 내관을 보내 살피게 하셨구나.‘
윤서는 전하께서 벽서의 배후가 윤서의 공장 직공들이라는 것을 아신 후 어떻게 말씀하시든 이 모습을 어린 희아가 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자가, 매금이랑 자가의 공장을 돌아보시겠습니까? 저는 전하께 목 공장 곳곳을 안내해 드려야 합니다.”
“응! 매금아, 가자! 내가 새로 설계한 조립 마차가 어떻게 나오고 있는지 봐야겠다.”
늘 온몸으로 놀아주는 매금이는 유독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희아는 매금이의 손을 잡고 뒤에 자신의 상궁 안씨와 나인 둘을 거느리고 먼저 자기 소유의 조립품 공장으로 달려갔다.
윤서는 서너 번 깊게 호흡을 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전 내관 조창의의 부축을 받고 서 계시는 세종을 향해 공손히 걸어갔다.
“전하, 제가 공장을 안내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나무판을 구부리는 실험을 아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고 금성 대군이 아주 극찬을 하더구나.”
“예, 실험 결과를 기록해 둔 문서가 있는 곳부터 안내 드리겠습니다.”
윤서는 세종의 팔을 부축하고 나무판으로 작업하는 공장과 별도로 지어진 건물로 향했다.
내관 둘이 출입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세종을 보고 깊게 허리를 굽혔다.
“일전에 네가 그 허위 빚 문서로 곤욕을 치를 때 지문이란 걸 조사하는 방법이 있다고 향이에게 말했다지?”
“예, 전하. 어디선가 보니 사람마다 손끝에 잡힌 주름이 고유한 무늬를 가지고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늬를 채취해 대조하면 종이를 만진 사람, 물건을 훔친 사람 등을 찾아낼 수 있다고 저하께 고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고운 흑연 가루를 뿌려 찾아내기도 한다고?”
“예, 전하.”
“벽서를 쓴 자들도 그것으로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전하는 늘 이렇게 훅훅 들어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