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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91화 (91/255)

제 91화. 한확에 맞서는 윤서의 막후 정치

“우리 가문 외에 어느 가문의 가솔이 잡혀갔느냐?”

한확이 다급하게 물었다.

“운성군 박종우의 가노, 지충추원사 윤번의 가노, 영천군 윤사로의 가노 등 내로라하는 가문의 가노들이 여럿 잡혀 들어갔고, 용산과 마포 등지에서 세곡선을 운행하는 선주와 이를 통해 물품을 대납하던 상인들 여럿이 다 잡혀 들어가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난 또 뭐 큰일이라고.”

노복의 말에 한확은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박종우는 정혜옹주의 남편이고 영천군은 정현옹주의 남편이 아니냐? 윤번은 또 수양 대군의 장인이고. 보아하니 임금께서 왕실 인척을 손을 좀 보시려나 본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더냐? 대충 상인과 선주 몇 물고하고 끝내시겠지.”

“그렇지는 않은 듯하옵니다. 지금 명년부터 세법이 바뀐다고 하고, 그를 위해서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어허! 대납을 하는 자들이 어찌 왕실 인척뿐이더냐? 하사받은 궁방전이며 노비도 많으면서도 암암리에 결탁하는 종친도 여럿이거늘 그들은 모두 그냥 놓아두고, 무슨.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로 대납의 관행을 뿌리 뽑으려고 한다 해도 나를 건드릴 수 있다더냐? 내가 명나라 황실의 인척으로 그간 조선에 세운 공이 얼마인데, 감히, 우리 가문을!”

정말로 원래 역사였다면 한확의 말이 맞았을 것이다.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사신과 조선에서 보내는 사신과 통사에 주로 의존해 명의 조정과 황실의 사정을 알아내던 기존의 정보망이었다면 대명 외교에서 차지하는 한확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세종도 이향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 외교에서 외교관 사이의 많은 뒷거래와 블러핑과, 심지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파는 매국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윤서의 존재가 대명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었다.

윤서는 황제의 조서와 칙서 외에 구두로 전하는 사신의 말에 개인적인 이해 관계와 탐욕이 얼마든지 섞여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고, 또한 황제의 칙서조차 위조될 수 있다는 것을 임진왜란 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례를 읽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확의 누이 공신부인 한씨가 세조의 즉위와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과 그것을 빌미로 한씨가 너무 많은 물품을 요구하여 훗날 조선에 큰 골칫거리였다는 것도 잘 알았다.

무엇보다 한확이 한명회와 한계미의 일족으로 모두 다 수양 대군의 계유정난을 적극 뒷받침하는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윤서는, 홍위의 앞날을 위해 한확을 제거하는 데 총력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

날이 풀려 다시 비현각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이향에게 윤서가 찾아와 종이를 펼쳤다.

지난 닷새간 동서의 역사서, 시대극 드라마와 영화 등 모든 매체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뒤져가며 한확이 꾸몄을 일의 전모를 추측해 본 시나리오였다.

“첫째, 정말로 황제의 칙서에 세자빈을 한씨 가문에서 맞이해서 명 황실과 우리 조선의 왕실이 공통의 인척 관계로 묶이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쓰여 있는 경우.”

“그건 별로 가능성이 없소, 부인.”

이향이 뒤에서 윤서를 안고 종이를 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공식 외교 문서인 황제의 조서와 칙서는 예부에서 공식 작성된다. 아무리 왕진 등의 태감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다고 해도 이처럼 사사로운 혼인 관계 따위를 칙서에 넣을 리가 없다는 것이 이향의 판단이었다.

“예, 그래서 아마 의복을 하사하면서 두리뭉실하게 ‘너희의 한결같은 사대를 어여삐 여겨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정도의 한 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걸 한확이 상호 인척 관계를 맺고 싶다고 했다 우기겠지요. 그 누이의 서신도 곁들여서 말이에요.”

“그렇게 온다면 정확한 의중을 묻는 사신단을 파견할 것이다. 어디까지가 황제의 본심이고 어디까지가 한씨 일가의 윤색된 요구인지.”

“그러나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지요. 태감의 말에 놀아나는 허수아비 황제라고 해도 훗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오이라트를 대적하겠다고 친정을 나서는 엉뚱한 면이 있는 황제니 ‘네가 정말로 그랬어?’ 하고 물으면 기분이 상해서 ‘그래, 내가 그리하였다’ 하고 나오면 오히려 더 골치입니다.”

“아이, 우리 부인 표현이 참으로 찰지구려.”

이향이 웃기는 했지만 실은 이것이 세종과 이향이 내심 우려하는 바였다.

명 황실에 누이를 후궁으로 둘이나 보낸 한확의 주장에서 진의를 따져 보기 위해 명 황제에게 정식으로 따져 묻는 행위는 당시 외교 관행에서 무리라는 점이.

“그렇지만 이는 앞으로도 우리 조선의 주권과 관계있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바로 세워야 할 문제입니다. 다만, 일의 해결이 명나라 측에서 되기보단 국내에서 먼저 해결이 된 후, 추후 명나라 조정에 해명하는 통보식이어야 할 것이에요.”

“그래, 그에 대해서 아바마마와 대명 외교에 깊게 관여해온 인사들과 함께 대응안을 논의 중이다. 단순히 세자빈의 일에 한씨 가문이 관여하려 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내정에 명나라의 입김이 미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한씨 가문이 가진 특수한 위치 때문에 완전히 벌하지는 않으면서도 정치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는 미묘한 일이긴 하지.”

이향은 대명 외교에서 한확과 그의 누이의 효용이 아주 없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 정치적으로 팔다리를 자르되 적당히 체면은 세워주는 안을 고심하고 있다고 상세하게 설명한 후 윤서를 뒤에서 안고 속삭였다.

“절대로 한씨 가문의 여식이 세자빈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부인.”

다른 후궁의 일에는 한발 물러서 느긋하게 무관심한 윤서가 이 일에 이렇게 열성적으로 대응을 하는 것이 미모가 출중하기로 유명한 한씨 집안의 여식을 경계하는 마음도 섞여 있어서인가 걱정한 이향이 위로라고 하는 말이었다.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명 때문에 내가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이향!’

윤서는 속이 터졌지만 일단 여기까지 하고 말을 멈췄다.

한확의 음모를 미리 알아낸 후 벽서 건으로 방납 비리를 공론화하여 한확 가문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고, 또 세종께 무조건 농업과 검약만 강조하는 조선의 경제관이 그릇된 것임을 깨우쳐 드린 것으로 당분간 이향과 세종 앞에서 조심하기로 한 터였다.

여기서 더 목소리를 높이며 전면에 나서면 목 공장 방문 이후 윤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시면서도 "너무 영민한 너를 어이할꼬"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시는 세종께 경계심을 살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윤서는 더욱 다정하고 농염한 목소리로,

“저하를 믿어요.”

속삭이며 이향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남긴 후 비현각에서 물러 나왔다.

그리고, 밖에서 시립하고 있는 조 상궁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양 귀인께 가서 지금 꼭 뵈어야 한다고 여쭙게.”

조 상궁을 먼저 보내 방문을 통보한 후 느긋한 걸음걸이로 양화당으로 향하며, 윤서는 지금 조정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혼맥으로 어지럽게 얽혀 있는가를 다시금 복기했다.

윤서가 놀란 점은 계유정난에 참가한 이들과 나중에 사육신으로 칭해지며 단종을 위해 죽은 자들의 가문이 서로 혼맥으로 무척 가깝게 얽혀 있다는 점이었다.

놀랍게도 성삼문의 고모가 한명회의 오촌인 한혜와 혼인했는데, 한혜는 수양대군 부인 윤씨의 형부인 한계미의 부친이었다. 이토록 가깝게 얽혀 있는 이들이 서로 죽이고 그의 처와 딸을 노비로 받은 야만은 무엇인가 곱씹으면서, 윤서는 양화당의 문을 들어섰다.

오늘 양 귀인을 만나는 것 또한 이렇게 배운 혼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향이 세종과 군주로서 정치를 한다면 윤서는 왕실 여인으로 양 귀인과 함께 막후 정치를 할 것이다.

양 귀인은 홍위를 위해 죽었었고, 윤서는 홍위를 살려야 할 임무를 가지고 이 땅에 온 여인이므로.

“그닥 반기시는 낯빛은 아닙니다.”

먼저 와 뜰에 서 있던 조 상궁이 넌지시 귀띔했다.

그럴 만도 했다.

수양 대군이 대마도와 유구국으로 항해를 나가는데 함께 나가게 된 것이 양 귀인의 장자 한남군이었기 때문이다.

윤서로서는 수양 대군의 동향을 감시할 이로 가장 적합한 이가 한남군이어서 함께 보내도록 이향에게 넌지시 암시를 한 것이었지만, 양 귀인은 그 위험한 바닷길에 아들이 가게 된 것을 윤서가 적극적으로 말려주지 않았다고 원망이 대단했다.

그 후 양 귀인과 한남군이 소유한 신안과 서해 바닷가 어장에 지금 한창 도자기를 굽듯 매끈한 벽돌을 구워 염전을 조성하는데 윤서가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어서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전하께서 상공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시겠다고 공표하시면 포목 공장을 함께 운영하기로 약속을 한 덕에 지금 얼굴을 보게 허락하는 것이었다.

“무슨 바람으로 우리 귀한 권 승휘께서 예까지?”

특유의 매운 혀로 이죽거리면서도 양 귀인은 임신을 해서 더워하는 윤서를 위해 오미자에 얼음과 잣을 넣은 차를 내오도록 신경을 써주었다.

감사히 잔을 비운 후 얼음까지 오도독 씹어 먹고 윤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박팽년의 가문과 혼담이 있지 않습니까?”

최근 양씨의 셋째 아들 영풍군이 박팽년의 셋째딸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혼담 이야기가 나오자 양 귀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양 귀인은 충주에서 제법 세력이 큰 토호 가문 출신의 양반으로 후궁이 되었다. 그런데도 내자시 여종 출신 신빈 김씨의 아들들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가문과 혼사를 맺게 된 것이 늘 한이었다. 이를테면 신빈의 아들 계양군의 처 한씨는 양 귀인도 탐을 내던 처자였다. 그 아비가 한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확이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자신은 명문가이자 재산도 아주 많은 박팽년 가문에서 며느리를 보게 되었으니 음지가 양지 되는 기쁨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으응? 그 애가 부친을 닮아서 아주 참하고 학식도 깊지.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영풍군의 처가를 말하는가?”

“박팽년과 집현전의 학사들을 움직여주세요.”

“으응?”

양 귀인이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집현전의 그 꼿꼿한 학사들을? 무슨 수로?”

“한확이 가져올 칙서나, 혹은 칙서가 아니라면 그 명나라 후궁인 누이의 서신에 불경한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윤서는 양 귀인에게 가까이 다가앉아 지금 의주에서 정주, 영변을 거쳐 개성으로 달리고 있을 한확이 가져올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양씨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하! 한씨 가문이 미쳤구나. 전하께서 천하의 개망나니 양녕 대군까지 포용하신다고 해도 태종의 아드님이시거늘. 이씨 왕실이 누구의 피 위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지 벌써 잊었단 말이냐.”

양 귀인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에 윤서는 앞으로 있을 역사적인 사실 하나를 미리 끌어와 귀띔했다.

“한확의 막내딸과 수양 대군 아들 도원군과 암암리에 혼사가 약조되어 있다고 하지요.”

“정, 정말이야?”

“예.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귀인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알지, 내 알다마다.”

정치적인 감이 뛰어난 양씨가 이를 앙다물었다.

“이번 기회에 한씨 쪽의 싹을 도려내야겠구나.”

“예, 그래서 학식이 깊으면서 꼿꼿하고 전하의 총애를 깊게 받는 집현전의 학사들이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얼로?”

“명분이 있습니다. 한확이 감히 국내 정치에 불가근불가원인 명의 황실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대역무도의 의도를 내보였다는 명분!”

“!”

“그리고 한확이 변명하지 못하게 몰 수 있는 사안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집현전의 학사들이 바른 명분을 가지고 한확을 매섭게 비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어도 왕궁 내에 불당은 안 된다고, 불교는 절대 안 된다고 끝까지 물어뜯듯 집요한 전투력으로 말이지요.”

윤서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하나하나 다 적어보면서 몇 날을 고심해 드디어 찾아낸 회심의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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