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 조금만 더 있다가. (80/146)


#80. 조금만 더 있다가.
2022.06.06.


16583989479656.jpg

 
올리비아는 차가운 책상에 뺨을 비비며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16583989479664.jpg

“이렇게 되면 없던 죄라도 만들어야 하나. 아니야, 섣부르게 덤비다간 오히려 이쪽이 위험해질 거야. 쯧. 그 쓰레기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 물어봤어야 했나.”

16583989479668.jpg

“그쪽은 후작이 일을 시킨 여자를 잡아다 물어보는 게 빠를 거다.”

16583989479664.jpg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묻지 않았는데.”

보니타가 숨을 죽이고 딱 하인데르 후작의 의무만을 하고 살아왔다고 해도 절대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다.

16583989479664.jpg

“아니지. 고대신을 모시고 있으니 후작으로서의 업무만 하는 것도 아니잖아? 분명 마법, 아니 그레타와 연관되어 있겠지?”

올리비아가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크라이어는 잔뜩 구겨진 그녀의 미간을 살살 눌러 펴주었다.

16583989479664.jpg

“어때? 그럴 거 같아?”

16583989479668.jpg

“노르덴 국의 외교관을 바꾸자고 한 것도 후작이었지.”

16583989479664.jpg

“아, 맞아. 그러네. 설마 외교관으로 그레타가 오는 거면 가관이겠는…….”

실없이 웃으며 말을 하던 올리비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로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발을 동동 굴러 생각을 떨쳐낸 올리비아는 다시 하인데르 후작에게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이전의 생에서 올리비아가 단 한 번도 그녀가 고대신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을 만큼 용의주도했지.

16583989479664.jpg

“지난 생에서 전쟁 직전에 연기처럼 사라진 것도 결국 고대신과 연관이 있는 거였겠네.”

16583989479668.jpg

“전혀 몰랐나.”

16583989479664.jpg

“전혀. 사실 그 전의 생에서도 하인데르 후작이 딱히 제국에 해악을 끼친 건 아니었거든.”

차라리 그랬다면, 지극히 비밀스러웠을지라도 황실에서 그런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 했을 리 없다.

하지만 하인데르 후작은 정말로 후작의 의무만을 다하며 조용히, 아주 조용히 사라지는 날까지 지냈기에 이런 식으로 고대신과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비실비실 웃으며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크라이어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16583989479664.jpg

“솔직히 후작이 제국에 무슨 해약을 끼쳤다 한들, 전쟁이 일어나고 당신이 나서는 순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해.”

크라이어가 전장에 나선 순간부터 제국은 무너지고 있었건, 최전성기를 구가하건 멸망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으니까.

16583989479664.jpg

“당신이야말로 항거할 수 없는 자연재해였다고.”

기분 탓인지 초조하다고 그에게 속을 털어놓은 이후, 그가 그녀에게 괴물이었던 과거를 조금 더 쉽고 가볍게 꺼낼 수 있게 되었다.

크라이어도 한결 편해진 그녀의 기색을 느낀 건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16583989479668.jpg

“그렇다면 이번에는 고대신을 추종하는 빌어먹을 종자들에게 재해가 되어야겠군.”

16583989479664.jpg

“내부의 적이면서 항거할 수 없는 재해라니. 더할 나위 없어. 완벽해.”

과장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책상에 눌러붙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던 올리비아는 곧 한숨을 푹 내쉬며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힘들다고 해야만 하는 일들이 배려하며 사라질 일은 없기 때문이다.

피곤하다고 황녀로서 해야 할 일을 그냥 놓아 버릴 수는 없는 노릇.

당장 내일 고대신이 강림해 세계가 멸망한들 오늘 자신이 일을 하지 않으면, 오늘 밤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다리를 질질 끌고 서류 앞에 앉은 올리비아는 꾸역꾸역 오늘 해야만 하는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크라이어는 늘 앉는 자리에 머물렀다.

오후로 기울던 해가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며 노을과 함께 사라질 무렵.

돌로 만들어진 석상처럼 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펜만 놀리던 올리비아가 드디어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16583989479664.jpg

“으, 으아아! 어깨! 내 목! 내 머리!”

-탁.

그와 동시에 크라이어가 거의 다 본 볼셰이크 역사책을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서명을 휘갈긴 서류 위로 드리운 그림자를 따라 고개를 든 올리비아를 향해 몸을 기울인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16583989479668.jpg

“그러게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16583989479664.jpg

“아니야. 버릇되면 곤란하다고.”

16583989479668.jpg

“곤란? 서류 처리는 이전에도.”

고개를 살레살레 저은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16583989479664.jpg

“그런 쪽이 아니라. 당신이 도와주는데 익숙해지는 게 곤란하다고.”

뒷말을 더 붙이지는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무사히 고대신의 일이 해결되고 나면 그와 헤어질 테니, 일을 나눠 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는 의미리라.

16583989479668.jpg

“곤란하지 않게 하면 되지 않나.”

16583989479664.jpg

“곤란하지 않게? 일을 도와주다가 서서히 줄인다던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돌아온 답이 완전히 엉뚱한 것이었지만, 크라이어는 의뭉스럽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을 뿐.

16583989479668.jpg

“아니.”

16583989479664.jpg

“아냐? 그럼 어떻게?”

의식적인지 혹은 무의식적인지, 아예 그가 미래에도 ‘곁에 남는다.’라는 가정을 아예 떠올리지도 못하는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16583989479668.jpg

“풀어 줄까.”

16583989479664.jpg

“응?”

16583989479668.jpg

“어깨 말이야.”

16583989479664.jpg

“아, 그러면 지난번처럼 엎드리라는 말…….”

말끝을 흐린 올리비아는 고개를 살살 젓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듯 입맛을 다셨다.

16583989479664.jpg

“그것보다 오늘은 더 필요한 게 있어.”

그리고 잠시 후.

16583989479668.jpg

“필요하다는 게 술이었나.”

16583989479664.jpg

“이렇게 고된 날에는 한 잔 정도 마셔주라고 우리 조상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올리비아는 한눈에 봐도 독하고 비싸 보이는 술병이 즐비하게 늘어선, 술병만 즐비하게 늘어선 탁자를 탁탁 치며 활짝 웃었다.

16583989479664.jpg

“당신 술 못하는 거 아니지?”

16583989479668.jpg

“기억에 없다.”

16583989479664.jpg

“아, 그렇네. 문제없어.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니까.”

올리비아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술병을 잡고 호쾌하게 뚜껑을 땄다.

그리고 다른 술병 하나를 더 집어 또 뚜껑을 땄다.

16583989479668.jpg

“술을 섞어 마시는 건가.”

16583989479664.jpg

“아니야. 각자 마시는 거지.”

그리 말한 올리비아는 지극히 태연하게 술잔이 아니라 술병째로 크라이어 앞으로 밀어주었고, 그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은은한 버터 향이 나는 술병을 바라보았다.

16583989479664.jpg

“눈으로 마시는 건 그쯤 해두고. 마시자.”

올리비아는 그 말을 끝으로 건배도 없고, 서로 따라주는 일도 없이 병을 나발로 불면서 술을 들이켰다.

16583989479664.jpg

“응? 왜?”

꼴깍꼴깍 물처럼 시원하게도 들이켜는 그녀를 보던 크라이어가 술병 끝을 잡았다.

16583989479668.jpg

“볼셰이크의 역사책 어딜 봐도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는 이야기는 없었다만.”

16583989479664.jpg

“아, 이건 전쟁을 치르면서 배운 거야. 술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고 힘들 때만 마시니까, 이 편이 훨씬 좋더라고.”

16583989479668.jpg

“빨리 취하는데?”

16583989479664.jpg

“뭐든!”

재빠르게 크라이어의 손에서 술병을 빼낸 올리비아는 다시 술을 들이켰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 움직임에 그는 옅은 한숨을 삼키며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술을 들이켜 한 병, 그리고 또 한 병이 비었을 때.

-탁.

16583989479668.jpg

“이 정도로 해두지.”

올리비아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그녀보다 빨리 병을 비운 크라이어가 빈 병을 소리 나게 내려두며 끝을 고했다.

16583989479664.jpg

“뭐? 벌써? 취했어?”

16583989479668.jpg

“취한 걸로 보이나.”

16583989479664.jpg

“그건 절대 아닌 거 같은데.”

독한 술을 그렇게나 많이, 빠르게 들이켰는데도 크라이어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얼굴빛도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얼굴이 빨갛게 익지도, 오히려 하얗게 탈색되지도 않고 마시기 전과 똑같았다.

올리비아는 열이 올라 발그스름해진 제 뺨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16583989479664.jpg

“당신 주량을 알아보려면 이 테이블에 있는 술을 모조리 입에 꽂아야 할까 봐.”

16583989479668.jpg

“사양하지. 그보다…….”

크라이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먹던 술병을 옆으로 치워버리며 그를 붙잡았다.

16583989548235.jpg

 

16583989479664.jpg

“조금만 더 있다가. 혼자 마시기 싫단 말이야.”

술에 취한 듯이 보이진 않았지만, 이미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 그의 소맷자락을 당기는 올리비아는 힘 조절이 안 되는 건지 손등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제 소매에 걸린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아주 느릿하게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천천히 몸을 숙이며 올리비아가 치워버린 술병을 툭 두드리며 답했다.

16583989479668.jpg

“이미 많이 늦었다.”

16583989479664.jpg

“아쉬우니까 한 병만 더 마시고 가. 응?”

16583989479668.jpg

“한 잔도 아니고.”

16583989479664.jpg

“한 잔으로 입술이나 적시겠어? 한 병은 마셔야지.”

깔깔거리며 웃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자리에 앉는 대신 소맷자락을 잡은 그녀의 손을 뗴어냈다.

16583989479664.jpg

“가게? 정말 가?”

올리비아가 발그레한 얼굴로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크라이어는 가볍게 웃었다.

아니, 웃었다고 해야 할지…….

이를 드러내며 지극히 사납게 미소한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바닥을 긁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16583989479668.jpg

“술을 마시면 안 되겠군.”

16583989479664.jpg

“아, 한 병만 하고 가라니까? 딱 한 병이면 되니까.”

물건 팔아도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상인의 말 같은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라는 주정뱅이의 말을 내뱉은 올리비아는 다음 순간, 훅 끼쳐온 익숙한 향기에 눈을 깜박거렸다.

16583989479668.jpg

“한 병 더 마셨다가는 열이 너무 올라 쓰러지겠군. 이미 취했다. 그만 마셔.”

16583989479664.jpg

“안 취했어.”

한창 열이 오른 뺨에 서늘한 손바닥이 닿자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뺨을 부볐고, 크라이어는 목을 낮게 울리며 짧게 웃었다.

16583989479668.jpg

“취한 사람은 취했다고 하지 않는 법이지.”

16583989479664.jpg

“그건 그렇지만, 정말로 취하진 않았어. 그냥 딱 기분 좋은 정도?”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올리비아는 정말로 취하지 않았다.

말했던 것처럼 기분 좋게 알딸딸했을 뿐.

당연히 시야는 좋아지고 조금쯤 흐릿해졌지만, 일렁일렁 흔들리는 시야에도 눈앞에 있는 크라이어만은 어찌나 선명한지.

눈을 깜박이면 아지랑이처럼 아니, 신기루처럼 사라질법한 비현실적인 얼굴을 하고서는 왜 이렇게나 선연한지.

한참 그를 응시하던 올리비아는 선명하다 못해 눈이 부신 듯해서 눈을 가늘게 떴다.

16583989479664.jpg

“당신 뒤에 빛이라도 켜놨어?”

올리비아는 크라이어 뒤쪽으로 손을 휙휙 저었다.

16583989479668.jpg

“뭐?”

16583989479664.jpg

“아니, 눈이 부셔서 아프다고.”

16583989479668.jpg

“확실히 취했군.”

옅은 한숨에 섞인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작은 웃음기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배슬배슬 웃으며, 멀어지려는 그의 소맷자락을 다시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고 했지만 헛손질을 했고 당연하게도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 하고 테이블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0